1권-14화
“그런데 마나 운용이란 것에 대해 뭐가 궁금하단 거지?”
“아까 창으로 저 둔탱이 공격을 받아쳤을 때 있잖아요. 창을 쥔 손으로 마나를 이렇게 운용하던 거요.”
리스티는 그렇게 말하면서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쪽 어깨부터 시작해서 손바닥까지 이어지는 경로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진운이 클레브를 상대할 때 운용하던 기의 운용경로였다.
‘뭐? 내 진기 운용을 읽어냈다고? 고작 한번 본 것 가지고?’
이진운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몇몇 부분에 약간의 오류는 있었지만, 그가 사용한 운용방법의 핵심은 거의 맞춰낸 것이다.
‘대체 뭐 하는 아이지?’
기의 운용 경로를 읽어냈다고 해서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기의 운용법에는 직접 전수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수많은 기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중원무림에서도 그 같은 재능을 소유한 자는 극히 드물어서, 자신과 천마 외의 다른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되게 신기하더라고요. 이런 방식은 처음 봐요. 그런데 왜 운용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건가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건지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은 리스티였다.
이진운은 가볍게 실소를 흘린 뒤 물었다.
“궁금하니?”
“예, 무척요! 알고 싶어요오오. 그 원리만 알아내면 뭔가 재밌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사실 그가 사용한 기의 운용법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절기에 속하지도 않은, 그냥 일반적인 진기 운용법을 사용했을 뿐이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가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중원 무림의 진기 운용법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영능을 발전시켜온 아르탈 행성 연합 쪽에서는 이런 기초지식도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진운은 슬쩍 튕겨보았다.
“하지만 이게 내 밑천인데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지. 엄연히 우리 문파의 비전인데 이걸 어떻게 타인에게 가르쳐 주겠니?”
“앗, 그럴 수가! 안 돼요! 가르쳐 주세요오.”
“안 돼. 지킬 건 지켜야지.”
“그럼 제가 아저씨 문파에 입문이라도 할까요? 그러면 가르쳐 주실 거죠?”
“흐음, 그런데 넌 아무리 봐도 이쪽으론 자질이 없어 보인다. 마법사라고 했지? 몸으로 움직이는 쪽이 아닌 것 같은데, 배울 수나 있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그 원리만 알려줘요. 그럼 나머진 제가 알아서 연구할 테니까요.”
“글쎄··· 안 된다니까.”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에 끈질기게 매달려 조르는 리스티였다.
대체 이 지식을 배워서 뭘 연구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섣불리 확답을 주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본디 거래의 기본은 밀고 당기는 협상에 있다. 그렇지만 한쪽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경우라면 하기에 따라 더 큰 대가를 우려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애가 닳게 만들었다고 여긴 이진운이 슬며시 운을 뗐다.
“외인(外人)인 네가 이걸 배우길 원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시하던가. 대가가 합당하다 싶으면 가르쳐 주지.”
“대가요?”
대가라는 말에 두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바라바오는 리스티. 이진운은 강조하듯 되풀이해 주었다.
“그래, 대가. 기브 앤 테이크(Give&Take)!”
“으으음···.”
리스티의 얼굴이 고뇌에 휩싸였다. 어떤 걸 대가로 제시해야 적당할지 머릿속으로 저울질 해보고 있었다.
대충 5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모양인지, 리스티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럼 어떨까요? 아저씨한테 필요한 장비나 무구를 만들어 드릴게요. 최고 수준으로요.”
무구를 제공하겠다는 말에 이진운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구? 나중에 개인 맞춤제작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당연히 받아야 할 걸 가지고 대가로 제시하겠다고?”
“그거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이건 제 이름을 걸고 만드는 맞춤 제작이랍니다아.”
“그게 무슨 차이인데?”
“그때 전달했던 개인 맞춤 제작은 그냥 양산형 제품을 각 사람에게 맞게 적당히 커스텀해주는 거죠. 그래봐야 흔해 빠진 양산형이에요. 아예 처음부터 맞춤 제작하는 것하고 같겠어요? 성능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걸요?”
“그런가?”
그게 사실이라면 잠시 고민해 볼만 했다. 그가 전생의 경지를 회복했다면 검의 성능 유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성능 좋은 검이나 무구를 쓴다면 그만큼 생존확률도 올라가게 된다.
그런 이진운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는 리스티. 그래도 그의 입에서 쉽게 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질러버렸다.
“에이, 그래도 안 된다면 오늘 나 화끈하게 쏜다! 최고의 재료들만 엄선해서 만들어 드릴게요. 아마 단장 급이 아닌 한, 그만한 무구를 가진 오버러는 찾기 힘들 걸요?”
이진운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 걸려든 것이다.
단장 급의 무기가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뜸을 들이고 나서야 대가로 제시한 걸 보면 값어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일 게 분명했다.
“리스티라고 했지? 네가 만드는 무구가 그렇게 성능이 좋아? 그렇게 장담할 정도로?”
“진짜라니까요. 저 정도 되는 메카닉 그리 많지 않다고요.”
“흐음, 그래?”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한 차례 리스티를 흘겨본 이진운.
확인을 위해 아리엔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맞다고 대답해 주었다.
“···보기엔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다 사실이에요. 하는 행동은 바보 같아도 저 방면에서는 천재거든요. 그러니 믿어도 괜찮을 거예요.”
“들었죠? 저만 믿으시라니까요오오!”
아리엔이 직접 보증해주자, 다시 기세가 살아났는지 에헴 하며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는 리스티.
나이에 맞지 않는 그 한심스런 모습에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천재와 바보는 한끝 차이라더니······.”
“저 바보 아니라고요오오.”
* * *
리스티와의 거래를 마친 뒤 이진운은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어서였다.
그는 가볍게 운공을 마친 뒤, 숙소의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작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낯선 곳에 소환된 것도 모자라 우주전함을 타고, 클레브란 녀석과 비무까지 벌였다.
몸이야 그다지 피곤을 느끼지 못했지만, 여러 일이 겹치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무기라.”
이진운은 리스티가 제안한 대가를 떠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자신의 손에 맞는 검은 전생에 쓰던 천룡파마신검이었다. 점창파의 몇 안 되는 신물중 하나로서, 점창 최고수만이 쥘 수 있는 신검. 기를 싣지 않아도 검기가 서린 상대의 검을 절단할 정도로 굉장한 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이제 자신의 손에 없다. 죽은 다음에 그 검이 누구 손에 들어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점창파가 아무 탈 없이 유지되고 있다면 다음 대 점창제일검에게 전승되었을 것이다.
“리스티란 애가 천룡파마신검과 같은 그런 검을 만들 수 있을까?”
솔직히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양산형보다는 조금이라도 낫겠거니 해서 거래한 것이다.
대신 검의 형태나 길이 등은 점창파마신검과 똑같이 만들 생각이었다. 이왕 만들 거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검을 드는 게 좋았다.
검의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이진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생에는 그다지 싸울 일이 없을 줄 알았다만··· 역시 타고난 내 팔자가 사나운 건가? 여전히 전장을 벗어나질 못하는군.”
천마신교의 침공에 이어, 이번에는 정체조차 모르는 외계인을 상대해야 한다. 이번 생만큼은 되도록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역시 인생사란 뜻대로 되는 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잠을 청했다.
[04.-가르침]
다음날부터 지구인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프라이스 호는 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워낙 거대한 전함이라 그런지 교육하는 데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정식 교육과정은 아르탈 행성에 도착한 이후부터 진행되겠지만, 지금은 우선 저희 연합의 기본 상식에 대해 가르치겠습니다. 앞으로 연합 내에서 활동하시려면 반드시 숙지시켜둬야 할 것들이니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후, 간단한 기초 지식들을 학습 받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아르탈 행성연합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세력 구도는 어떻게 되는가 였다.
‘역시··· 인베이더나 아르탈 행성연합 외에 다른 세력도 존재했었군.’
현재 우주는 4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과 [인베이더], 그리고 [메세니아 연방 공화국]과 [론데니움 제국]이었다.
하지만 인베이더의 세력은 압도적이었다. 나머지 3대 세력은 서로 손을 잡고 싸워야 그나마 대적할 수 있을 만큼 강대했으니까.
그래서 현재 3대 세력은 연합체로서 유지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엄청난 세력들이 뭉쳐야 겨우 감당이 가능하다는 인베이더는 대체 어떤 놈들이지?’
기초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을 듣긴 했지만, 제대로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진운이 알아들은 건 그저 멸망을 바라는 우주의 괴수라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등급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실질적인 인베이더의 수괴라 할 수 있는 성좌급 정도 되면 신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조차 안 된다.
‘내 전생의 실력으로는 어느 정도 상대가 될지 모르겠군. 이 자들 말로는 신과 같다던데··· 맞상대가 되려나?’
하지만 그 말이 정말이라면 자신 없었다. 당시 중원 무림에서도 단 둘뿐이었던 현경의 경지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신이라고 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죽기 직전에 깨달은 반선지경이라면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뭐라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하긴 깨닫자마자 경지를 제대로 체감도 못해보고 죽었으니··· 뭐, 답이 없군.’
그는 이내 관심을 끊었다.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수련을 해서 예전의 경지부터 되찾는 게 우선이겠어. 그리고 반선지경도 다시 올라서고 말이야.”
결단을 내린 이진운이 두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을 노려봐야겠지.”
무려 신적 존재들까지 설치는 우주적인 스케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비슷한 반열에 올라서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신을 운운하는 교관들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이젠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아르탈 행성 연합을 성립케 한 존재가 바로 여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
심지어 죽은 자도 되살아나는 이적을 선보였다고 하니, 이진운도 신의 존재 여부를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아르탈 행성에는 여신교단이란 곳이 있었고, 여신 루네리아도 그곳에 항상 기거하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는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 * *
하루일과를 전부 마친 뒤, 이진운은 즉시 어딘가로 향했다. 오늘 마침 자신을 부른 사람이 있어서였다.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 가자, 투박하기까지 한 금속문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속문의 센서가 반응하더니 이진운의 신분을 확인하였다.
위이잉!
확인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좌우로 열리는 금속문. 그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 아주 낯익은 목소리와 얼굴이 뒤를 이었다.
“어서 오세요. 귀여운 리스티의 만물공방에!”
“······.”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안면을 덮고 말았다.
분명 문 앞에 마중 나온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안경소녀 리스티였다.
단지 입고 나온 옷차림새가 이상했다. 머리에는 토끼 귀 같은 장식에, 몸에는 바니걸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 끝에 이진운이 어렵사리 입을 열어 물었다.
“···그 꼴은 대체 뭐냐?”
“왜요? 아저씨가 온다고 해서 특별히 입어 봤는데 이상해요오?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고 그러던데에에··· 그게 아닌가?”
자초지종을 묻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스티. 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인 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일반상식 쪽에서는 꽤나 거리가 먼 모양이었다.
이진운은 시름 어림 표정으로 탄식하였다.
“아직 덜 여문 주제에 무슨 소리를···.”
물론 리스티는 객관적으로 보면 장래가 기대되는 귀여운 소녀였다.
하지만 현재 나이는 17세 정도. 여성다운 아름다움을 갖추기에는 아직 많이 미성숙했다. 즉 발육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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