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3화
자신의 역린을 서슴없이 건드리는 리스티의 그 말에 아리엔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녀가 비웃거나 할 의도로 한 말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었다. 리스티는 상대에 대한 특별한 악의 없이, 그런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어 왔었으니까.
이걸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 이 친구를 대할 때마다 골머리가 아파왔다.
‘하여간 천재라는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니까.’
내심 투덜댄 아리엔이 이번에는 질문의 대상을 바꿨다.
“그럼 다른 무가하고 비교한다면?”
“다른 무가들? 음, 대충 4차 방정식 수준은 되겠는데?”
“···그 정도 차이라 이거지.”
리스티의 말을 듣고 나니 좀 전까지 납득하고 있던 점에 대한 의혹이 피어올랐다.
지구에서 전승되어 온 무예? 제아무리 외기를 활용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아르탈 행성 연합의 무가들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극상승의 무예가 과연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저 사람 말이야. 시스템 오류로 레벨업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사람 맞지?”
“아아, 연구해 보고 싶다아아.”
자신의 두 뺨을 붉게 물들이며 흥분해하는 리스티. 아리엔이 펄쩍 뛰며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구 소환자들은 건드려선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내가 무슨 불법적인 인체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마나 운용이 신기해서 그러니까 좀 검사 좀 해보자고. 관측장비로 살펴보기만 하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에··· 정말로 안 돼?”
“그래도 안 돼. 잘못하면 상부에서 징벌이 내려올 거라고. 예전에도 몇 번 걸려서 혼나놓고는 또 그래?”
“아아··· 아쉬워라아.”
가볍게 칭얼대며 아쉬움을 표현하는 리스티.
아리엔은 내심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처럼 통제 불능이 되어 사고라도 쳤으면 뒷수습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대결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지만, 너무 격렬해서 중간에 끼어들어 멈추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역시 상대가 안 되고 있어. 좀 우직하긴 해도 클레브의 실력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닌데···.’
솔직히 말해 클레브의 재능은 변변찮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수준의 흔해빠진 재능.
하지만 그가 쌓은 노력 덕분에 검술 그 자체만큼은 생각보다 높은 편이었다. 단지 영력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재능이 부족해 여태껏 E-랭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런 클레브를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진운. 심지어 리스티가 흥분할 정도로 고도의 영력 운용법까지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이진운의 창술은 마치 춤과 같았다. 휘둘러지는 한 자루의 창이 그의 전신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하나 빈틈조차 없었고, 창과 사람이 마치 하나 된 것처럼 보이는 게, 공방일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아리엔의 두 눈에 희미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 * *
이진운과 클레브의 대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분노에 눈이 멀어 체력 안배 없이 무작정 맹공만 퍼붓는 자와, 이것을 냉정하게 받아쳐 응수하는 자.
애당초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싸워봐야 의미 없다고 생각한 이진운은 즉시 제압에 나섰다.
제압은 간단했다. 창대로 급소 몇 군데를 가볍게 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퍽, 퍽퍽!
몇 차례 타격음과 함께 클레브는 완전히 무력화되어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 검을 놓치지 않은 것만 해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인내심을 지녔는지 알 수가 있었다.
“크으으······.”
“이제 좀 머리가 식었나? 하긴, 기운을 다 소진했으니 더 이상 싸울 수도 없겠어.”
신음하며 이진운을 노려보는 클레브. 너무 힘을 쏟은 나머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이진운에 대한 열등감과 적의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진운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적당히 좀 해. 내가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서, 네 녀석한테 화풀이 대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그 차가운 눈빛과 마주친 순간, 클레브는 깨달았다.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잊고 있던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되살아났다.
잠시 바르르 떨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안다, 나도. 이게 추하고 못난 짓이라는 걸.”
“잘 안다니 다행이군. 그럼 더 싸울 필요는 없겠어. 더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하지만··· 이게 내 한계였다. 노력한다고 발버둥 쳐도 더 나아지질 않았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직도··· 아직도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 언제까지? 붙잡을 수도 없는 그런 희망을 붙잡기 위해 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약도 없는 노력만 해야 하는 거냐고!”
그것은 처절하기까지 한 절규였다.
하지만 울부짖는 듯한 그 외침을 듣고도 이진운은 담담하게 대꾸하였다.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그런 노력에 아무런 보답이 없다 해도, 여기서 포기하면 그게 네 한계일 테고 말이야.”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클레브에게, 이번에는 이진운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냐? 하긴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가능성 없는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것도 비효율적인 짓이니까.”
“나는······.”
이젠 지쳐서 때려치울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 클레브는 일순 멈칫거렸다. 마치 굳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그것을 눈치 챈 이진운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잖아. 포기할 수 없어서, 이대로 그만두기에는 납득할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애당초 넌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 단지 화가 났을 뿐이지. 그래서 이런 화풀이 식 비무도 걸어온 거고.”
“···그래, 네 말이 맞다. 도저히 포기를 할 수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났던 거야.”
클레브는 인정하고 말았다.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본심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던 검을 더 굳게 잡았다.
잊을 수 없었다. 처음 검을 잡았던 그때를.
재능이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입은 그는 어린 마음에 무예의 길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때의 맹세를 저버릴 수 없기에, 지치고 힘들어도 포기하길 주저하면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포기할 수 없다면··· 더 매달려야겠지. 그 끝에 아무런 보답이 없다 해도 말이야.”
그렇게 읊조린 클레브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이진운에게 급소를 얻어맞은 덕분에 전신의 근육이 풀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안간힘을 써서 끝내 일어섰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이진운을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사죄했다.
“너한테는 실례가 많았다. 내 옹졸함과 질투심 때문에 너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고 말았어.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그리고 방황하던 날 깨우쳐줘서 정말 고마웠다. 이제야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어.”
상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 사과는 받아들이지. 네 처지도 대충 이해가 가고 말이야.”
“받아줘서 고맙다. 앞으로 너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불러라. 꼭 찾아가겠다.”
그 말에 이진운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과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예는 포기는 안할 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없지. 끝까지 해보겠어. 되든 안 되든 말이야.”
제법 결의에 찬 대답이었다.
그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한 이진운은 클레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흐음, 그래도 근성만큼은 쓸 만한 것 같군. 생각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와라. 그 보잘 것 없는 실력을 조금이라도 쓸 만하게 가다듬어 줄 테니까.”
“뭐?”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크게 뜬 클레브.
이진운이 덧붙여 말했다.
“나이가 많아서 널 내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야할 길이 어딘지는 제대로 알려줄 요량은 있으니 시간 있으면 찾아와.”
“이봐, 잠깐?”
클레브가 뭔가 더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진운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전생부터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많이 봐 왔었다. 재능의 한계에 부딪친 자들을.
그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부류들은 대체적으로 둘로 나눠진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노력하든가, 아니면 열등감과 질투심에 함몰되어 끝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든가.
‘전생 때도 내 재능을 질투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지.’
하지만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열등감을 연료로 삼아 자신을 끝없이 연마해나간 자들은 나름대로 대성을 이루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클레브란 자는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까?
보잘 것 없는 재능으로 여기까지 해온 걸 보니, 누군가가 잘 이끌어주기만 하면 그런 대로 괜찮은 실력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어지간하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던 이진운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녀석이라면 조금 가르침을 내려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게 바로 기연 아니겠어?’
일단 선택지는 건네주었다. 그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다면 보다 높은 경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고, 만일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걸로 인연은 끝이다.
‘뭘 선택할지는 모르겠지만, 안 찾아오면 그것도 다 자기 팔자지.’
더 이상 수련하기도 뭣해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아리엔의 옆에 있던 웬 낯선 안경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클레브와 대결할 때부터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리엔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소녀라니. 이건 또 누구지?
이진운이 뭐라 묻기도 전에 안경소녀가 먼저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오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전 리스티아 프론사이드라고 해요. 친한 사람은 다들 절 리스티라 불러요. 그러니까 앞으로 리스티라 불러주세요.”
“······.”
이진운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보통 첫 만남에서의 인사라는 건 서로 정중하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밝다 못해 너무도 쾌활한 것이 무슨 장난 하는 것 같았다.
이진운은 아리엔을 향해 곁눈질하며 저 소녀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지?”
“···저희 부대의 메카닉 담당이죠. 저하고는 어릴 적부터 오랜 친구였고요. 본래 성격이 좀 독특하니까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해도 좀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래, 확실히··· 첫 인상만 봐도 독특하구나.”
한숨지으며 설명하는 아리엔만 봐도 대충 어떤 타입의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에이, 이건 독특한 게 아니라 개성이 넘치는 거랍니다. 제가 나름 한 개성 하거든요.”
‘이런 게 4차원이라는 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타입의 인간은 처음이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 지 할 말을 찾지 못하던 그때, 리스티라는 소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어어··· 궁금한 게 있는데요. 좀 물어봐도 되요?”
“궁금한 거? 뭔데?”
뭘 묻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면서 묻는 리스티의 태도에, 이진운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되물었다.
“방금 전에 저 둔탱이랑 싸우면서요. 마나를 좀 독특하게 운용하던데, 그게 어떤 원리에요?”
“마나?”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리엔이 첨언해주었다.
“아, 리스티는 마법사에요. 메카닉 전문 마법사죠. 마법사들이 다루는 타입의 영력을 마나라고 부르죠.”
“아, 그렇군.”
마법사라. 그래서 인기척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던가? 무예를 갈고 닦은 무인들하고는 확실히 많이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원무림의 술사들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하긴 여긴 중원무림이 아니니, 기(氣)에 대한 명칭도 제각기 다르겠지.’
아르탈 행성 연합은 수많은 행성들의 집합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에 대한 명칭도 그만큼 다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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