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2화
이제 막 비무가 시작되려던 그때, 클레브의 두 눈이 날카롭게 치떠졌다.
“설마 창을 들 생각인가?”
“그럴 생각인데, 왜?”
“네 녀석 전문 분야는 검이라면서, 지금 나를 상대로 창을 들겠다고?”
“이걸로도 충분해. 내 창 솜씨가 네 검 실력보다 떨어지지 않으니까.”
“뭐라고?”
클레브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당장 검을 들어! 그런 건방진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뭘 들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네 실력이 대단하다면 그때 가서 검을 들지. 그러니 덤벼 봐. 나한테 괜한 신경질 내지 말고.”
노골적으로 내뱉는 이진운의 말투는 무척이나 퉁명스러웠다. 비무를 제안해온 클레브에게서 자신을 향한 적의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날 못마땅해 하는 것 같더니··· 이상한 녀석이군.’
비무라는 명목의 도발에 응수해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검을 들지 않겠다고? 건방진 놈, 어디 본때를 보여주지.’
내심 이를 갈아붙인 클레브는 곧장 검을 겨누었다.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따로 없었지만, 비무는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클레브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중단으로 겨눴던 검 끝이 미묘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한 줄기 선이 되어 매서운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웰라우드 류.
단선(斷線)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검격! 하지만 이진운은 그 궤적을 똑똑히 읽어내고 있었다.
‘내 목덜미를 노리는 빠른 쾌검이군.’
빠르지만 단조로운 투로! 그렇다면 막아내는 것은 더 간단하다.
우웅!
단전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치닫는다. 기경팔맥을 순환한 진기가 창으로 밀려든 순간, 창끝이 작은 원을 그리면서 맹렬한 외전(外傳)을 형성하였다.
팅!
회전하는 창끝에 걸린 검격이 옆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드러나는 클레브의 빈틈.
이대로 창끝을 들이밀면 이 비무를 간단히 끝낼 수 있지만, 이진운은 그러지 않았다. 수십 년 만에 내공을 사용해 겨루는 비무, 좀 더 길게 이어가고 싶어서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간단히 쾌검이 튕겨나갈 줄 몰랐던지, 클레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후합!”
부웅!
기합을 내지르며 이번엔 위맹한 검격을 날려 오는 클레브.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법 심상치 않았다.
웰라우드 류.
위진(危振)
‘창으로 튕겨낼 수 없도록 아예 강격을 날린다 이건가? 확실히 위력은 대단하긴 한데, 이건 너무 느리잖아.’
물론 평범한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격이지만, 이진운에게는 슬로우 모션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절기를 펼칠 것도 없이 삼재보를 전개해 한발 옆으로 물러선다.
그러자 스쳐지나가듯 허공만 가르는 클레브의 검격.
하지만 클레브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던지, 곧장 다음 수로 응수해온다. 텅 빈 허공을 베어가던 검로가 돌연 궤적을 뒤틀며 변화를 보인 것이다.
웰라우드 류.
단선(斷線)-참화(斬華)
복잡한 형태로 뻗어오는 쾌검의 난격. 어지간한 자라면 제대로 대응조차 못했을 테지만, 상대는 이진운이었다.
그는 창대를 휘둘러 클레브의 맹공을 전부 빗겨내 버렸다. 빠르고 강하긴 해도, 힘의 방향성만 살짝 뒤틀어주면 막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거듭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클레브의 안색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냐, 이 창술은? 틈이 전혀 보이질 않아!’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가볍게 휘둘러도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얄팍한 창대가 왜 이렇게 견고한 것일까? 마치 철벽이라도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반면 이진운도 클레브의 검술에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 형편없는 검술은?’
제법 강하고 빠르긴 하지만, 너무 단조롭고 빈틈 투성이었다. 게다가 진기의 운용도 뭔가 빠진 것처럼 허술하고 불완전했다.
이능이 발달한 곳이라서 뭔가 대단한 무예가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건 점창의 입문무공도 못 되는 수준 아닌가.
위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이렇게 틈이 많아서야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수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표면적으로는 클레브가 우세한 형국으로 보였지만, 클레브 본인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리엔도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이진운이 느긋하게 봐주면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건 대등하게 실력을 겨루는 비무가 아니라, 일방적인 지도대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 세상은 모든 게 불합리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왜? 세상은 왜 하필 이런 녀석에게 이 같은 재능을 준단 말인가!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둔재로 불렸고, 영능에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남들은 영능을 각성하자마자 좋든 나쁘든 제각기 고유스킬을 획득했지만, 클레브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희박하기 그지없는 영감(靈感)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무예를 선택했다. 재능이 없는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수련을 통해 우직하게 실력을 쌓아올리는 방법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예를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였다.
재능 없는 이를 받아주는 무가는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그를 받아들여준 곳은 여러 무가들 중에서도 밑바닥까지 몰락해간다는 웰라우드 가 뿐이었다.
웰라우드 가의 무예는 지금에 와선 상당 부분 실전되어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받아주는 곳 없는 클레브에겐 이나마도 감지덕지했다.
그는 그곳에서 필사적으로 수련하였다. 밤낮을 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재능으로 뒤따라가려면 노력밖엔 없었으니까.
하지만 피나는 노력도 결과를 보장해주진 못했다.
그가 이뤄낸 성과는 E-랭크 오버러. 정식요원도 아닌 견습 요원이었다. 당시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D랭크의 정식 요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견습 요원이 된지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E-랭크였다. 그때보다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구에서 소환된 자들은 뭔가? 재능이 있단 이유만으로 각성하자마자 고유스킬을 체득하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D랭크는 우습게 뛰어넘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젠 모든 노력이 허망했다. 지구인들의 존재 자체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흘려보냈다. 수련을 멈추진 않았지만 예전만큼의 큰 의욕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고유스킬로 이능을 각성한 자들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건 일단 각성하기까지 노력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 판가름 되는 분야였으니까.
하지만 이진운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지구에서 알량한 무예 좀 수련한 것 가지고, 바로 영력에 적응해 운용한다고? 게다가 각성하자마자 6급의 체화스킬?
‘그럼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은 뭐지? 그냥 쓰레기였나?’
이건 자신의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악물며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내려던 그때였다. 방어와 회피로 일관하던 이진운이 돌연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뭐냐? 이젠 도망이라도 갈 생각이냐?”
성난 목소리로 묻는 그 말에,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 더 이상의 비무는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의미가 없다니,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지? 네놈이 졌으니까 패배를 자인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도발하듯 던져진 그 말에 이진운은 피식 웃어 보이며 화답하였다.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이 비무에서 누가 이긴 건지? 내 입으로 굳이 말해 줘야 알아듣겠어?”
“······.”
“뭐, 노력은 인정하지. 변변찮은 재능에 그런 엉터리 검술 가지고 그 정도 수준에 이르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알만 해. 하지만 거기까지야. 이 이상은 무의미하지.”
잠깐 무기를 맞댄 것만으로 이진운은 클레브의 대부분을 파악해낸 뒤였다.
부족한 재능으로 여기까지 쌓아온 건 가상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이다. 길을 잘못 든 이상,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지금보다 더 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말이 상대의 역린을 건든 것일까? 클레브의 두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네놈이···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냐? 그래서? 지금까지의 내 모든 노력이 쓸데없었다고! 네놈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아주 쓸데없었던 아니지만,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고는 해두지.”
“너, 이 자식!”
결국 폭발하고 만 클레브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살기등등한 모습이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상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클레브! 멈춰요!”
“말리지 마십시오, 대장! 이놈과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겁니다.”
보다 못한 아리엔이 소리쳐 만류했지만, 클레브는 조금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분기에 찬 검격이 이진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캉! 카캉 카카카캉!
창과 검이 서로 부딪치면서 요란한 금속음을 토해내고, 두 사람의 인영이 서로 부딪쳤다 떨어지면서 격돌했다.
하지만 용호쌍박 같은 싸움은 여전히 이진운의 우세였다.
그는 공격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클레브의 모든 공격을 창 한 자루로 전부 튕겨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검이 나아가는 길목을 막아 검로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이진운은 여유롭게 막아내며 빈정거렸다.
“분노를 담은 검은 읽기 쉬워지지. 검로도 더 단조로워지고.”
“닥쳐!”
“기운의 운용이 거칠다. 상체에서 검으로 이어지는 진기의 낭비가 너무 심해. 그런 식으로 운용하면 위력은 조금 세지겠지만, 기운이 금세 줄줄 새나갈 거다.”
“입 다물란 말이야!”
분노로 이성을 잃은 클레브는 이젠 방어까지 도외시하며 목숨 거고 덤벼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진운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창을 내밀 때마다 그의 검로는 파탄이 나면서 그 맥이 끊겨버렸으니까.
이건 단순히 이진운의 수준이 더 높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창은 마치 바늘귀를 꿸 수 있을 만큼 정밀하게 제어되고 있기에 가능한 재주였다.
아리엔은 어느새 두 사람을 만류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이진운의 창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건 말 그대로 새로운 차원의 영역이었다.
‘사람의 동작이 이렇게까지 정밀할 수가 있다니. 아니, 이건 그냥 육체의 훈련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분명 영력의 힘이 작용하고 있어. 어떻게 운용하면 이런 게 가능한 거지?’
한창 몰입해 있던 그때였다. 돌연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진짜 대단해에에. 마나를 저런 식으로 운용할 수도 있구나아.”
“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옆을 돌아본 아리엔. 그 옆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딴 안경소녀가 서 있었다.
안경소녀가 히죽 웃으며 해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녀어어엉!”
“리스티, 너 언제 여기에 온 거야?”
“방금. 저 둔탱이가 막 달려들 때부터인데, 왜?”
그 말에 아리엔은 내심 자책하고 말았다. 싸움을 말려도 모자랄 판국에, 그걸 멍하니 지켜보느라 리스티가 다가오는 것조차 몰랐다니.
일단 먼저 침착하게 용건부터 물었다.
“매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네가 수련장에는 무슨 일로 온 건데?”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찾아왔어.”
대체 무슨 수로 수련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알아챈 것일까? 하지만 아리엔은 굳이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안 봐도 뻔해. 전함의 메인시스템을 해킹했든가 뭔 술수를 썼을 거야.’
리스티와는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지만, 아리엔도 그녀를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연구에만 몰두해온 외곬수라서 범인들과는 생각하는 것 자체부터가 다른지, 항상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어 불안할 정도다.
특히 어떤 특정 대상에게 호기심을 품을 때는 더욱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리스티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이진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 처음 봤어. 마나를 저렇게 다루는 거 말이야. 저렇게 복잡하면서도 세밀하게 운용하다니. 나도 다 읽어낼 수가 없을 정도야. 아리엔, 네가 펼치는 검술도 봤지만, 그거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운데?”
인간성이야 둘째 치더라도 리스티의 천재성은 아리엔도 내심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정도야? 정확히 어느 정돈데?”
“굳이 비유하자면 덧셈 뺄셈하고 미적분 정도의 차이? 아무튼 그 정도로 수준이 높아. 하긴 너희 가문의 검술은 원래부터 수준이 많이 낮았었지? 애당초 비교 대상이 아니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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