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1화
“일단은 기본부터.”
그는 창을 쥔 채 자세를 취했다. 점창의 창술 중 가장 유명한 절학은 관일창이지만, 지금은 일단 기본부터 다져나가야 할 때였다.
창을 수평으로 가슴 높이를 겨누는 좌허식의 자세. 이것이 창술의 가장 기초가 되는 기수식이었다.
그 상태에서 내지르는 창격!
핑!
대기를 관통하는 소리와 함께 창날이 허공을 꿰뚫었다.
허나 그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 뻗어내는 창격은 란(欄) 나(拿) 찰(扎)로 이어지는 기본창식의 정수였다.
찌르고 휘두르고 막는 동작으로 이어지는 창격은 빠르고 매서웠으며,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계되었다. 특히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외전(外傳)과 내전(內傳)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완벽해!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
날카로우면서도 조금도 낭비 없는, 창술의 교본과도 같은 절제된 움직임. 아주 오래도록 고련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솜씨였다.
육합창식(六合槍式).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기초적인 창술이지만, 이것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이진운은 육합창식 하나만으로 상승의 영역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리엔 님. 지금 저 자의 창술이 그렇게 대단한 수준입니까?”
“당연히 대단하지요. 저런 기초 창술을 저렇게 완벽하게 갈고 닦는 게 쉬울 것 같나요? 이 정도면 창술의 대가라 해도 부족하지 않아요.”
“으음.”
아리엔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음성을 삼키는 강화병.
그때였다. 이진운이 펼치는 창술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은.
핑! 피피피핑! 휘리릭!
지금까지는 고작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창을 휘두르는 동작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좀 전까지의 움직임이 인간의 육체로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그 한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놀람으로 가득 찬 아리엔의 두 눈이 일순 크게 떠졌다.
“뭐지, 이 속도는? 갑자기 빨라졌어!”
그녀의 동체시력으로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설마 영력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에 아리엔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놀랍게도 이진운은 지금 영력을 운용해서 신체능력을 강화시키는, 그런 믿기지 않는 재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제 막 각성한 사람이 영력을 다룬다니요?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강화병은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다며 불신에 찬 목소리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예를 펼치면서 영력을 적용하는 것은, 영력으로 초상능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반적인 초상능력은 일단 각성만 하면 발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허나 무예에 영력을 적용시키려면 그만한 노력과 숙련이 필요했다. 제아무리 달인이라 해도 이제 막 각성한 영력을 무예와 함께 운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이진운은 그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결과물을 그들 앞에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기를 관통하고 찢어발길 때마다 창끝에서 번져 나오는 첨예한 예기!
그것은 영력을 체내에서 운용하는 수준을 넘어, 병기에 주입하지 않고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기예였다.
“이건 진짜··· 내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아리엔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처럼 영력을 기반으로 하는 무예를 배운 것도 아니면서, 영력을 곧장 자연스럽게 다뤄내다니.
이게 단순히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잠시 뒤, 한 차례의 연무가 마무리 되었다. 창을 거둬들인 이진운은 내뱉는 호흡을 통해 탁기를 배출하면서 진기를 가다듬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펼친 창술이었다. 평소에도 창술을 수련해오긴 했지만, 내공을 운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제 좀 몸이 풀렸군. 다음에는······.”
마음 같아선 당장 관일창을 수련하고 싶지만, 그건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내공도 부족했고, 신체의 단련 상태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창을 내려놓고 다른 무기를 집어 들려던 그때, 아리엔이 그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어디 물어 봐.”
본래라면 아직 개방할 수 없는 수련장까지 허락해준 아리엔이었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캐묻는 게 아니라면 답해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아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지금 펼친 창술,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영력을 운용해서 펼친 건가요?”
“어떻게···라니? 할 수 있으니까 했지.”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진운.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아리엔은 덧붙여 다시 질문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지구에는 분명 영능이 금제되어 있을 텐데. 어떻게 각성하자마자 영력을 자연스럽게 창술에 담아낼 수 있었냐, 이거에요.”
“아아, 그런 말이었나.”
그제야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 이진운.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답해주었다.
“뭐 어렵지 않은 질문이군. 지구에도 영력을 다루는 무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인가요? 어떻게 된 거죠? 전 소환된 지구인들을 몇 번이나 봤었지만 그런 이야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야 지구에서는 무예를 깊은 수준까지 익힌 자가 드물었으니까 그렇지. 영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무예 따윈 총 앞에서는 무력하니까.”
영력이란 미지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의 무예는 현대의 화기 앞에 무력화 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무예는 퇴보했으며, 이젠 제대로 된 전승자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남아 있는 무예들은 이미 스포츠화 된 것들 뿐. 진수는 대부분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진운 씨가 제대로 된 무예를 익힌 극소수 중 하나란 말인가요?
“그래, 맞아. 내가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지.”
“정말 믿어지지가 않네요. 영능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곳에 영력을 다루는 무예가 있었다니···. 이 사실을 알면 오버러 이능관리국 전체가 발칵 뒤집히겠군요.”
아마도 지금 이 정보가 상부에 보고된다면 지구를 담당한 관측조사팀은 대량의 시말서를 써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호들갑 떨 만큼 대단한 건 아니야. 네 말처럼 지구에는 영력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게 불가능해. 그게 금제였는지는 나도 지금껏 몰랐었지만, 아무튼 영력을 체내에 저장하고 다루는 건 불가능했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용 자체가 금제된 거지, 지구에도 영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 느낄 수 있었어.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구의 전승무예들이다.”
이진운은 창을 내려놓고는 근처에 있는 모형을 향해 다가갔다. 수련을 위해 세워놓은 격파용 인형이었다.
그는 설명을 이어나가면서 자세를 취했다.
“이런 식이니 잘 봐. 기본 원리는 간단해. 호흡을 통해 바깥의 기운과 동작을 일시적으로 일치시켜서 근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거지. 그것을 두고 우린 외기(外氣)를 탄다고 한다. 너희들처럼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진 못하지만, 그런 식으로 간접적인 흉내는 가능하지.”
쿵!
호흡과 함께 절도 있는 동작으로 진각을 내딛는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듯 뒤틀어지는 허리와 어깨, 그리고 그 회전력을 고스란히 담아 낸 일장이 외부의 기운이 자연적으로 깃들었다.
이것이 발경(發勁).
호흡을 통해 기공을 활성화시키고, 전신의 경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 발휘하는 무예의 진수였다.
투웅!
파열음과 함께 장저가 닿은 인형의 허리 부분이 박살나 흩어졌다.
아리엔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력을 직접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호흡과 동작, 그리고 외부의 영자의 흐름을 함께 일치시킴으로서 만들어낸 무예의 위력을.
물론 위력 자체는 대단할 것 없지만, 영능의 불모지에서 이런 식으로나마 영력을 다뤄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아, 그랬군요. 그럼 지금 창술에 영력을 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수련 덕분이었군요.”
“그래, 영력을 외기를 다루는 방식으로 꽤 오랫동안 수련을 해 왔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의 차이점은 있지만, 그 정도야 조금만 해보면 금세 적응할 수 있지.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영력의 제약까지 풀리니 이런 식의 운용도 금세 가능해지더군.”
다시 창을 집어든 이진운.
그는 전면을 향해 지르기를 선보였다. 허나 그냥 지르는 게 아니었다.
첫 순간부터 창끝이 일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공간을 가르는 순간, 무려 수십 개의 창영이 되어 허공을 찢어발겼다.
고작 한 자루 창으로 만들어낸 조화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영력을 직접 체내에 담아내서 운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확실히 내공이 있으니 좋긴 좋아.”
초식을 바꾸자 창은 다시 낭창낭창 휘어지더니 마치 뱀처럼 궤도를 뒤틀며 허공을 누볐다.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고 빈틈을 물어뜯는 독사탐와(毒蛇貪蛙) 수법이었다.
이 정도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 이진운이 아리엔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궁금한 거 있어?”
“아니요. 그 정도면 됐어요. 이제 대충 알겠네요.”
아리엔은 다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영력을 각성하자마자 이런 솜씨를 보인 것은 놀랍지만, 그런 내막이 있었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굳어진 얼굴로 이진운을 노려보고 있던 강화병이 문득 앞으로 나섰다.
“이진운이라고 했나?”
“그런데?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무슨 일이냐며 뚱한 표정으로 묻는 이진운.
상대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조금 심상치 않았지만, 내공도 되찾은 이상 꿀릴 것도 없었다.
“너와 비무를 하고 싶다. 한번 겨뤄볼 수 있을까?”
“비무? 지금 말인가?”
“그렇다. 웰라우드 가에서 사사받은 [클레브 로이스터]다. 너와 검을 겨루고 싶다.”
갑작스런 비무 요청에 놀란 것은 아리엔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클레브, 이게 대체 무슨 무례한 짓인가요? 이제 막 각성한 분에게 비무라니요!”
“한번 솜씨를 보고 싶습니다. 지구의 무예가 어떤지 경험해 보고 싶군요. 허락해 주십시오.”
클레브는 단호했다. 어떻게든 그와 비무를 하겠다는 태도였다.
아리엔은 어떻게든 설득해 클레브의 의사를 꺾을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이진운이 답했다.
“뭐, 좋다. 그 비무 제안, 받아들이지.”
“정말인가?”
“먼저 신청해놓고는 뭘 또 묻지? 하고 싶어서 제안한 것 아니었나?”
“아니, 좋다. 그럼 어디 겨뤄 보자. 지구에서 쌓았다는 그 실력, 한번 보고 싶군.”
상대가 비무 제안을 쉽게 승낙하는 바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는 곧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비무를 성사시킬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지?”
아리엔은 탄식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는 상태로 수련장 정 중앙에 섰다.
클레브는 수련용 검을 들었다. 그가 수련해온 것은 검술. 당연히 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