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09화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은 각성한 영능을 시험해 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하긴 얼마 전까지 평범했던 사람들이니 신기해 할 만도 했다.
다들 한창 들떠있던 그때, 한없이 냉정한 눈빛을 하고 있던 듀렌 박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나?”
“예,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아리엔이 고개를 끄덕여 응낙하자, 듀렌 박사가 다시 입을 떼었다.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네. 그 시스템이라는 게 사람들 개개인에게 간섭해 초능력을 각성시켜준 걸로도 모자라 성장까지 보조해준다니. 이건 가히 신의 이적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그는 자신이 느낀 바를 담담하게 이어나갔다. 하지만 하는 말과 달리 감탄의 기색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진한 의문. 그가 아리엔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더군. 어째서 우리 지구인이지? 지금부터 영능이란 걸 갈고 닦는다 해도 시스템을 더 오랫동안 접해온 그대들과 비한다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일 텐데 말이야.”
“그에 대해선 저도 뭐라 말해드리기가 어렵네요. 여러분들을 불러들인 건 바로 시스템이니까요. 죄송합니다. 시스템은 저희로서도 불가해의 영역인지라······.”
“으음, 그런가?”
듀렌은 조금 실망스런 기색을 보였지만, 일견 납득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시스템이란 것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해 영능을 각성시키고 성장까지 보조해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차원적인 무형적 개념체계.
제아무리 발전한 과학문명이라 해도, 여기에 인위적으로 간섭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비슷한 사례들을 모아 낸 통계 데이터가 있으니까요.”
“오, 그런가?”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언제 실망했냐는 듯 화색을 드러내는 듀렌.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히 아리엔의 입을 향해 집중되었다.
“지구인 분들이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이곳으로 소환되었다는 건······.”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곧 무겁게 이어나갔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모성인 지구도 인베이더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아마 거의 10년 이내로 인베이더들의 침략을 받을 게 확실하네요.”
“뭐!?”
“지구가 외계인들에게 침공 당한다는 거야?”
“오 마이 갓! 어째서 이런 일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그거 거짓말이지?”
충격과 경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지구가 외계인들의 침략에 노출된다니!
듀렌 박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곧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인가? 왜 그런 답이 나오게 된 거지?”
“이유를 굳이 추측해본다면 여러분들의 모성인 지구도 인베이더 세력의 침략 사정권에 들어왔기 때문이라 생각되는군요. 지금까지 사례들이 그래요. 시스템에 소환되었던 많은 분들이 훗날 모성의 침략을 겪었었죠.”
“······.”
다들 충격에 빠져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건 비교적 냉정해 보였던 듀렌 백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일종의 선발대입니다. 지구가 인베이더에게 침략당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시스템이 엄별해 선발한 인재들이죠.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구에 남아있을 여러분들의 가족과 친인들을 위해서라도요. 여러분들이 강해질수록, 더 열심히 싸울수록 지구는 더 안전해지겠죠.”
설명이 이어질수록 더 암담해졌다. 지구에서 불려온 사람들 전부가 완전히 얼어붙다 못해 절망적인 낯빛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영능에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전쟁에 억지로 끌려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것은 두려움이 되었고, 곧 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싸워야 하나. 인베이더라는 외계인 놈들하고?”
“난 죽기 싫어!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내가 무슨 전쟁을 하겠어?”
“어쩔 수가 없잖아. 지금 바로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외계인 놈들이 10년 내에 지구로 쳐들어온다는데, 돌아간다고 해서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놈들의 손에 죽는 게 끝이겠지.”
“그래, 맞아. 외계인 놈들에게 무력하게 당할 순 없잖아. 차라리 여기서 영능인지 뭔지를 배우면서 힘이라도 기르는 게 낫지.”
“난··· 그래도 무서워. 이런 힘을 가져봐야 누군가와 피 흘리며 싸울 수 있는 건 아닌데······.”
“제기랄, 가족들이 나 없어졌다고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이런 사실까지 알았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어느 정도 혼란은 있을지언정, 다들 수긍하고 체념하는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완전 남의 일이었다면 돌아가겠다고 계속 발악이라도 했을 테지만··· 지구가 연관된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구에서 살고 있는 가족과 친인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듀렌 박사도 무겁게 입을 뗐다.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건 알겠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영능이란 걸 배워 인베이더라는 외계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지구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건가?”
“아주 못 돌아가는 건 아니에요. 정기적인 휴가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당장은 어려울 겁니다.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긴 해도 여러분들은 영능을 각성했어요. 통제 못하는 영능은 자칫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런 여러분들이 지구로 돌아가면 사회에 큰 혼란만 빚을 뿐이죠.”
“하긴, 우리가 지금 이 상태로 지구로 돌아가면 난리가 나겠지.”
듀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이 자리에 불려온 지구인만 해도 무려 수천 명이다. 이들이 영능을 각성한 채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럼 그 정기 휴가는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 건가? 내 생각엔 그리 쉽진 않을 것 같은데.”
“그것도 기준이 있어서요. 일정 수준 이상의 공적치를 쌓거나, 아니면 정해진 기준을 넘어서는 실력을 쌓으면 가능하죠. 적어도 C랭크? 그 정도가 아니면 5년 이내에 지구로 귀환한다는 건 어려울 거예요.”
“C랭크? 그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아르탈 형성연합의 등급체계를 잘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는 듀렌.
아리엔이 대답하였다.
“지금의 저보다 한 단계 더 높다고 보면 됩니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면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지구로 귀환할 자격이 주어지질 않아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군. 이제 막 영능을 각성한 우리에게 그런 게 가능할리 없잖은가.”
듀렌은 말도 안 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짐작컨대 저 아리엔이란 소녀는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된 수련을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 영능을 각성한 자신들이 고작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
기막혀 하는 그에게 아리엔은 뜻밖에도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예, 지구에서 오신 듀렌 박사님의 말씀처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겠죠. 하지만 절대 터무니없거나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가능하다고?”
“예. 나름 근거도 있고요.”
그렇게 단언한 그녀가 곧이어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분보다 먼저 소환되신 지구출신 분들 중에는 저와 비교할 수 없는 강자들도 상당히 계시죠. 특히 그 중 다섯 분은 저희 아르탈 행성연합 내에서도 상위 0.0001%안에 드는 절대강자의 반열에 오르셨어요.”
“호오, 지구에서 불려온 게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고?”
“지구인 소환은 이미 10년 전부터 매해 계속되고 있었죠. 올해로 열 번째군요.”
“으음···.”
듀렌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지난 10년 동안 전 지구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던 대규모 실종 사태. 이 사건으로 몇 번 사회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헌데 매해 벌어졌던 실종자 발생이 바로 시스템의 소환으로 벌어진 사태였다니.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사실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신들보다 먼저 소환된 지구인들 중에서 아르탈 행성 연합이 주목할 정도의 강자들이 여럿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는데?’
‘아무튼 노력만 하면 돌아갈 수 있다 이거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C랭크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전체 등급을 놓고 본다면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물론 5년 이내라는 조건 때문에 쉽진 않겠지만, 방금 전 언급된 최상위권의 강자도 아니고 중간 수준인 C랭크 정도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였다.
‘C랭크라. D랭크라던 저 여자애보다 한 단계 위라면 대충 절정 정도겠지?’
이진운은 C랭크의 수준을 대충 가늠해보면서 생각했다.
일단 기본 조건은 충족하고 있었다. 단순히 검기를 뽑아내는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런 실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보내주진 않을 것이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게 아르탈 행성연합의 본의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잘 다듬기만 하면 쓸 만한 전력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인재들을 고이 보내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아니, 그런 게 아니더라도 벌써부터 내 실력을 내보일 순 없어. 위험해.’
비상식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진운도 자신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태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각성 시작부터 검기를 뽑아낸다면 어느 누구든 의심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니면 곧장 인체실험실로 끌려가던가.
그래서 당분간은 적당한 수준의 실력만 드러낼 생각이었다. 남들보다는 앞서지만, 크게 의심받지 않을만한 정도로.
‘한 이류 급이면 되겠지. 그 정도면 천부적인 자질 때문이라고 대충 둘러대도 먹힐 게야.’
그러는 동안에도 아리엔의 설명은 계속 해서 이어졌다.
일단 6개월간의 교육이 있을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실전현장에서의 실습을 병행해 교육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총 1년이란 시간 동안 지구인들을 제대로 된 영능력자로 확실히 탈바꿈시킨다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1년이라. 그 동안 내 실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겠군.”
전생의 경험과 깨달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진운이다. 1년의 시간이라면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터.
그런 다음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공을 세울 것이다.
‘반드시 되돌아간다.’
그는 주먹을 굳게 거머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03.-예기치 못한 대련]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뒤, 인원의 분류가 시작되었다. 지구인들이 각성한 영능을 조사한 다음, 그 특성에 따라 분류해 나누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영능력자가 전투에 특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투를 보조하는 계열도 있었고, 그 외에도 생산이나 제작 같은 군수지원 계열도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그런 영능의 특성을 잘 살리려면 비슷한 영능력자들끼리 분류해 교육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은 근접전투 계열로 분류 받았다. 하긴 점창의 무공을 기반으로 백타와 각종 무기술을 다루는 그가 근접전투 계열이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분류를 마친 뒤, 아리엔과 강화병들은 지구인들을 다른 장소로 안내했다. 지금 있는 이 장소는 어디까지나 소환된 자들을 1차적으로 통제하고 분류하기 위한 안전시설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었군.”
안전시설 바깥으로 나온 듀렌 박사는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삼켰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눈에 들어오는 거대 전함들.
상상할 수 없이 컸다. 고층건물 수십 개를 합쳐도 모자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 규모의 전함 수십 척이 허공에 뜬 채로 정박해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여긴 자신들의 고향인 지구가 아니었다. 설령 이곳에서 도망친다 하더라도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우주전함의 탈취? 그런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반쯤 넋이 나간 사람들에게 아리엔이 못 박듯 경고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여기서 탈출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여긴 지구가 아닙니다. 맨몸뚱이로 저 우주를 초광속으로 항행할 능력이 있지 않는 한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에는 거대한 전함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만 봐도 전장만 무려 수km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여기 보고 계신 프라이스 호를 타고 이동할 겁니다.”
놀란 표정으로 전함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아리엔이 목적지를 고했다.
“목적지는 저희 연합의 중심지인 아르탈 행성의 오버러 이능관리국. 앞으로 여러분이 아우터로서 교육받게 될 곳입니다.”
이진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놀랠 노자로군. 중원 시절에는 이런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는데.’
과학이 발전된 21세기의 지구도 그에겐 놀라운 세상이었는데, 여긴 말 그대로 별차원의 수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