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외전 5. 뱀파이어의 무도회
피의 왕국의 연회장.
그곳에는 임플과 란트를 포함한 온갖 뱀파이어들이 모여,
전장의 승리를 축하하며 연회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자리에는 현성 또한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이번 연회에 초대된 유일한 인간.
그만큼 이곳에는 그를 제외하고 전부 뱀파이어들뿐이었다.
이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현성이 어딘가 불편한 듯,
꽉 매어있던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 모습에 현성의 옆에 있던 알레시아가 물었다.
[꽤나 무료해 보이는구나.]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연회가 한창인 뱀파이어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차라리 저 틈에 끼어보는 건 어떤가? 본디 연회란 그런 묘미지.]
“……글쎄.”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현성이 미묘한 표정으로 주변의 뱀파이어들을 훑어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현성을 제외하고는 전부 뱀파이어.
인간인 그가 끼어들 자리는 딱히 없어보였다.
물론 현성 역시도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몸이긴 하나,
임플과 란트, 레이첼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전무하다보니 굳이 생판 모르는 뱀파이어들 사이에 끼어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더 아는 뱀파이어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알케르도.
그러나 연회장에는 그는 물론이며,
귀족파로 추정되는 뱀파이어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긴 알케르도는 레드룸에서 현성에게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났으며,
귀족파의 수장인 그가 무너졌으니,
당연한 서순이었다.
[그럼 뭐라도 마시는 건?]
그대로 알레시아가 뱀파이어들이 저마다 들고 있는 와인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와인 잔에는 붉은 레드와인을 연상케 하는 액체가 담겨있었다.
허나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지금 나보고 피랑 와인 섞은걸 마시라고?”
저건 다름 아닌 피와 와인을 섞은 것.
피의 갈증이 사라지긴 했지만,
뱀파이어들은 여전히 피를 선호하는 성향이 남아있는 탓에 이처럼 혈액과 술을 섞어 마시고는 하였다.
[경험삼아 한 번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미안, 사양할게.”
그대로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냥 이렇게 연회장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그러다 막바지쯤에 임플과 란트에게 얼굴을 비추면 그만.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주변에는 이미 알레시아의 인지 저하 마법이 걸려있는 만큼.
현성은 당분간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을 심산이었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여기 있었네?”
밝게 빛나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붉은 드레스.
그녀는 다름 아닌 레이첼.
피의 왕국의 공주이자,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연회의 주인공께서 여긴 웬일이야?”
“뭐, 그냥 지나가다 혼자 있는 게 보여서 친히 여기까지 온 거지. 영광으로 생각해.”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혼자 있는 게 보였다고?”
지금 그의 주변에는 인지 저하 마법이 걸려있는 상태.
덕분에 웬만해서는 그의 모습은 물론이며,
그가 여기 있는 걸 알아차리기도 힘들었다.
[인지 저하 마법은 어디까지나 인지 저하. 누군가 자네를 찾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지.]
그와 함께 알레시아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레이첼이 그대를 애타게 찾았던 모양이군.]
“그래?”
동시에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애, 애타게라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 걸?”
그대로 그녀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레이첼의 귀는 솔직했다.
“너 귀 빨개졌다?”
“……윽.”
이에 레이첼이 자신의 귀를 감싸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 보지 마. 바보야.”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귀엽기는.
이어서 레이첼이 한시라도 빨리 화제를 바꾸려는 듯, 현성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넌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어?”
그러자 현성이 연회장을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냥. 딱히 할 거 없어서 앉아있었지. 내가 모르는 뱀파이어들 사이에 껴서 뭐하겠어.”
“그래도 너 아는 뱀파이어들은 많을 걸?”
레이첼이 연회장에 있는 다른 뱀파이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이번 연회에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유일한 인간이자, 엘카인을 쓰러트린 영웅님이잖아.”
“……지금 누구 놀리냐?”
그런 현성의 반응에 레이첼이 재미있다는 듯,
한술 더 떠 말했다.
아니 말하려했다.
“거기다 무려 내 약혼자…….”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닫고 시선을 회피했다.
“…….”
레드룸 이후, 뱀파이어들은 현성을 거의 레이첼의 약혼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레이첼 역시 자기도 모르게 본인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하고 만 것.
이에 현성이 눈동자를 좁히고는 작게 조소하며 물었다.
“호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 아니 다른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지.”
“그럼 넌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네?”
“그, 그건…….”
그와 함께 다시 급속도로 붉어지는 레이첼의 볼.
그리고 잠시 뒤.
레이첼이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 몰라!”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귀여워서.”
“……!?”
그런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뭐라 말하려다가,
결국에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 반칙이잖아…….”
그렇게 한참동안 레이첼이 마음을 가다듬고,
어느 정도 그녀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
“걱정해줘서 퍽이나 고맙다.”
그대로 레이첼이 두 볼을 작게 부풀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가 현성과 연회장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튼 딱히 할 게 없어서 심심하다는 거지?”
“뭐 그런 셈이지.”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슬쩍 입 꼬리를 올리고는 현성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몰래 빠져나갈래?”
“……뭐?”
“그야 나도 질리려던 찰나였거든.”
그런 레이첼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과 장난기가 가득해보였다.
이에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몰래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동시에 그때.
알레시아가 현성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환영마법이라도 펼치고 있을 테니 둘은 마음 놓고 다녀와라.]
그 말에 레이첼이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알레시아. 최고야.”
[후훗, 친구 좋다는 게 무엇이겠느냐.]
그런 둘의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알레시아.”
[별말씀을.]
“그럼 부탁할게.”
그와 함께 현성과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현성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몰래 빠져나가는 건 좋은데 어디로 가게?”
그러자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있어. 내 비밀장소.”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첼을 따라 도착한 곳은 피의 왕국 뒤편에 자리한 산이었다.
그와 함께 레이첼이 뭔가를 찾는 듯 풀숲을 뒤지더니,
“찾았다.”
곧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풀숲 안으로 들어가며,
현성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에 그가 레이첼을 따라 들어온 순간이었다.
-사아아.
그 앞에 보라색 꽃이 가득 피워져있는 꽃밭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도 잠시.
현성은 그 꽃이 달맞이 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도착했어.”
동시에 레이첼이 당당하게 꽃밭을 가리켰다.
그런 꽃밭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있었고,
그 나뭇가지에는 작은 그네가 걸려있었다.
이곳이 바로 레이첼의 비밀장소로,
과거 그녀가 어릴 적,
부모님과 다른 뱀파이어들의 눈을 피해 놀던 추억의 장소였다.
“되게 오랜만에 와보네.”
그대로 레이첼이 들뜬 표정으로 그네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그네에 앉은 채,
현성을 바라보며 잔뜩 신이 난 듯 말했다.
“나 어릴 때 이거 엄청 자주 탔거든. 어때, 괜찮지?”
그러자 현성이 신난 레이첼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멋지네.”
“그치? 멋지지?”
그와 함께 레이첼이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네를 만들겠답시고 저택에 있는 장식 줄을 뜯어왔다가 혼난 일이라거나,
꽃을 심고 돌아온 날, 옷이 엉망이 되서 메이드 장한테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냐며 한소리 들은 일이라거나.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레이첼의 얼굴에는 내내 밝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알아?”
“뭔데?”
“여길 알려준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러면서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영광으로 생각해도 좋아.”
이에 현성이 그녀에게 어울려주며,
마치 귀족들이 인사를 하는 것처럼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공주님.”
“제법 듣기 좋네.”
현성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이첼이 달이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현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여기 와볼래?”
그러면서 그녀가 꽃밭 한 가운데로 걸어가 나지막이 말했다.
“꼭 같이 보고 싶은 풍경이 있거든.”
그렇게 머지않아.
어두운 밤하늘을 따라, 밝은 달빛이 꽃밭을 비춘 순간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며 꽃들이 흔들렸다.
-사아아.
동시에 달맞이꽃이 보라색 물결을 일으키며,
아스라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아앗!
과거 기사단의 무덤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모습.
이어서 보라색의 빛 무리가 하나 둘씩 공중에 떠오르고,
그대로 반딧불이처럼 떠오른 빛 무리가 달빛에 난반사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를 바라보는 레이첼.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
그와 함께 레이첼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 그녀는 동화책에 나오는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렸다.
그래, 꼭 공주와 기사처럼.
왕국 뒷산에 이런 비밀공간을 만든 이유도 비슷했다.
뭔가 이곳에 있으면,
자신이 꼭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화.
나이가 들수록 동화 속 풍경은 점점 멀어지고,
현실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그때 동화내용을 전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잊어버린 동화의 내용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레이첼이 유독 좋아했던 부분은 바로 결말이었다.
마침내 세상을 구한 기사는 밝은 달빛 아래,
공주에게 청혼을 한다.
이에 공주는 기사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둘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대로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지. 어릴 적에는 되게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했다? 왜 기사나 공주 같은 거 있잖아.”
“……어릴 적에는 다 그렇지.”
그리고 레이첼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어떻게?”
“역시 운명적인 만남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간다는 거?”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만든 거 같아?”
현성의 물음.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그와 함께 그녀가 현성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달빛 아래, 붉은 드레스를 입은 레이첼.
그런 그녀의 모습은 동화 속 공주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동화 속 기사와 같은 검은 머리칼.
그리고 동화대로라면,
이제 기사가 공주에게 청혼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동화와는 사뭇 다른,
현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현성, 나와 평생을 함께 해줄래?”
레이첼의 청혼.
이에 현성이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포옥.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첼이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며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사실 대답은 필요 없어.”
그와 함께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동시에 레이첼이 다시 한 번 현성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그렇게 유독 밝았던 달빛 아래.
공주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기사의 이야기는 결말을 맞이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