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외전 2. 검사의 고백
검술명가라는 불지의 이름을 지키고 있는 하 가문의 저택.
그 중에서도 셋째, 시연의 방 안.
꽤나 늦은 시간인 만큼 그녀의 방 역시도 불이 꺼져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하아…….”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시연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방의 불을 키고는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벽이 훌쩍 넘은 시간.
무엇보다 그 시간이 될 때까지,
시연은 10시에 침대에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잠에 들지 못한 채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벌써 4번째.
이에 시연이 곤란한 듯 검은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두운 창밖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론 시연이 이 시간까지 깨있는 모습은 그리 드문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그만큼 시연은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며 새벽까지 깨있고는 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다른 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꼭 일찍 잠들기로 맹세했건만.
‘결국에는 이렇게…….’
시연이 새벽이 훌쩍 넘은 시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시계야 당연히 아무 잘못 없겠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런 시계가 야속할 뿐이었다.
“…….”
그대로 잠시 뒤.
창밖을 바라보던 시연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그녀가 코톡을 키더니,
현성과의 대화 내역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 내용은 바로 오늘,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
이에 시연이 스마트폰을 꼬옥 쥐며 심호흡을 했다.
현성과의 놀이공원.
이것이 그녀가 줄곧 잠을 설친 이유였다.
덕분에 시연은 당장 지금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려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긴장할 필요 없다.
그와 함께 시연이 전날 자신의 동생 연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제일 중요한 건 밀당.
이에 시연이 다시금 그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연서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녀가 그 사실에 내심 안심하며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좋아.”
그대로 시연이 굳게 다짐하며 침착하게 불을 끄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준비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으리.”
하 가문에서 내려오는 명언 중 하나로,
전장에 나서기 전, 검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이었다.
그와 함께 시연이 마음 속 깊이 그 말을 새기며, 다시 잠을 청했다.
* * * * *
한편 하 가문의 저택.
그 중에서도 막내, 연서의 방.
그녀의 방 역시도 불이 켜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아…….”
그대로 연서가 연신 방안을 서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녀가 날짜를 확인하고는 불안한 듯 팔짱을 꼈다.
당장 오늘이었다.
아끼는 언니와 여우같은 현성이 놀이공원에 간다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연서는 곧바로 시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연애 지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상대는 현성.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그 안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자리하고 있었다.
“요망한 것 같으니…….”
그대로 연서가 현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연을 보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만큼 연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장이든, 연애든.
무엇이든 초반에 승기를 잡아 둬야하는 법.
이미 시연에게는 자신이 전수할 수 있는 모든 전술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왤까.
현성이라면, 그 요망한 남자라면,
준비한 전술이 모두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화이트레이 토벌전 때도,
가주 쟁탈전 때도 그랬으니까.
이에 연서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
곧바로 그녀가 언니와 현성이 만나기로 한 시간과 장소를 곱씹었다.
분명 12시 놀이공원 입구 앞이라고 했었나.
이어서 연서가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미행한다.”
그대로 결심을 내린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하 가문에서 말하기를,
준비하는 자에게는 승리가 있다고 하지 않나.
“……좋아.”
그렇게 연서와 시연이 같은 명언으로 다른 다짐을 하며.
하 가문의 새벽은 깊어지고 있었다.
* * * * *
그리고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다가온 약속 당일.
시연이 놀이공원 입구 앞에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연은 무려 1시간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1시간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싶었지만,
연서가 말했지 않는가.
첫 번째 밀당, 먼저 와서 기다려야 그만큼 초반에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이에 시연은 조금 과하지만, 연서의 조언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동시에 그때였다.
저 멀리서 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그를 발견한 시연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흔들려고 하는 찰나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연서의 조언.
‘절대 먼저 반가운 티내지마. 언니는 더더욱.’
그와 동시에 시연이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어떻게 할지 고민 하다가,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처억.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이에 현성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자 시연이 작게 심호흡했다.
이제 줄곧 연서가 강조한 회심의 한마디를 날릴 차례였다.
“느, 늦었어.”
그와 함께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물론 원래 정석대로라면 휙 고개를 돌리는 게 맞았지만,
어째 끼기긱 소리를 내며 부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고개.
“……?”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멈칫거렸다.
목이라도 아픈 모양일까.
허나 그것도 잠시.
“미안. 많이 기다렸어?”
현성이 시연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약속시간은 12시.
그에 따라 그 역시도 30분 먼저 나온 것이었다.
-움찔.
이에 시연은 당장에라도 고개를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연서의 조언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그래, 이번만 눈 딱 감고 참는 거야…….’
현성과의 첫 데이트.
시연은 어떻게든 이번 데이트에서 현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동시에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현성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들어가자.”
먼저 손을 뻗은 시연.
평소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탓일까.
“…….”
현성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연이 조금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왜, 왜?”
그러나 그도 잠시.
현성이 피식 웃으며 흔쾌히 시연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면서 현성과 시연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부스럭.
길가 옆 풀숲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연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좋아, 이정도면 뭐… 나쁘지 않군.”
연서는 새벽에 말한 대로 착실하게(?) 언니를 미행하고 있었다.
그만큼 모든 걸 처음부터 다 지켜봐왔으며,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뭐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자신이 말한 대로 한다면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동시에 연서가 시연과 현성을 따라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돌연 그녀의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뭐가 나쁘지 않느냐?]
“흐이잇!”
그 소리에 연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금색의 드래곤.
알레시아였다.
“아, 알레시아?!”
[간만이로구나.]
이에 알레시아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허나 웃고 있는 알레시아와는 다르게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연서의 얼굴.
알레시아가 여기 있다면 현성 그 녀석에게도 들킨 게 아닐까.
하지만 그때였다.
알레시아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현성은 아직 모르니 걱정하지 말거라.]
“……뭐?”
그리고 이어지는 예상외의 말.
[무엇보다 재밌어 보이니까 나도 동참하도록 하지.]
줄곧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이었다.
연애를 하는 주인공들을 몰래 따라다니는 모습.
그러던 찰나에 그게 실제로 일어났으니, 어찌 이걸 참겠는가.
“…….”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연서가 그녀와 현성이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보았다.
그대로 머지않아,
연서가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미행은 들키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알레시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그럼 다시 가보도록 하지.]
* * * * *
그렇게 연서와 알레시아가 둘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입구에서 그리 멀지않은 장식품 가게.
그곳에서 시연과 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한 번 써볼래?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 그래?”
“응. 내가 씌워줄게.”
그런 둘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아보였다.
그대로 현성이 시연의 머리에 검은 고양이 귀 머리띠를 씌워주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커헉…!”
연서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움찔거렸다.
언니가! 고양이귀를!
이에 알레시아가 황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연서? 왜 그러느냐!]
이에 연서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셔텨 소리.
“후우, 이제 괜찮아….”
그대로 수십에 달하는 사진을 찍고 나서야 연서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내렸다.
이 순간만큼은 현성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군.
그녀가 그리 생각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그리고 그런 연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알레시아.
그대로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리 뒤틀린 애정이…….]
아무튼 그것도 잠시.
알레시아와 연서가 다시 미행을 시작하며,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이좋게 같이 회전목마와 바이킹을 타거나,
후룸라이드를 타며 찍힌 사진을 보고 웃고 있거나.
츄러스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 후로 이어진 모습은 잘 어울리는 연인과 다름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어색한 게 있다면,
바로 중간 중간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시연의 리액션.
“어때, 재미있었어?”
“응! 재미있었…. 아, 아니 딱히?”
그리고 그 행동의 원인은 당연히 연서에게 있었다.
시연은 줄곧 연서의 말대로 밀당을 하고 있긴 했으나,
현성과 함께하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워 자꾸 밀당을 해야 함을 까먹고 있었다.
동시에 그럴 때마다 연서는 매서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알레시아는?
알레시아는 그런 셋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드라마보다 이게 더 낫군…….]
그렇게 어느덧 시간은 지나 놀이공원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에 따라 놀이공원에는 마지막을 알리는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시연과 현성은 이를 관람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런 시연의 시선은 줄곧 퍼레이드가 아닌,
현성에게 가있었다.
오늘 하루는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특별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현성과 놀이기구를 타며,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 모든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동안 이렇게 즐거운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물론 중간 중간 연서의 조언을 상기하며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현성과 함께한 오늘 하루는 그야말로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아쉬웠다.
오늘 하루가 끝나는 것이,
그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이에 시연이 현성의 소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멈칫.
그녀가 손을 멈추며 망설였다.
연서의 조언 때문이었다.
‘먼저 붙잡지 마.’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꼬옥.
현성이 부드럽게 시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걸을래?”
현성이 먼저 손을 잡아주었다.
이에 시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 * * * *
그렇게 시연과 현성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 둘이 처음 만난 장소, 선천강 둔치였다.
그대로 시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이 찾아온 선천강.
분수에는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며,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 뒤로는 도시의 야경이 빛을 뿜고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
과거 데일런트와 싸웠던 그곳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물었다.
“오늘 어땠어?”
“……뭐 그럭저럭.”
그런 현성의 물음에 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처음 그와 마주했던 곳에,
지금 이렇게 손을 잡고 걷고 있자니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와 힘을 합쳐 데일런트를 쓰러트릴 줄도,
아카데미에서 다시 마주칠 줄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성을 좋아하게 될 줄도 몰랐지.’
시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20분정도 걸었을까.
현성이 분수 바로 옆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앉아있을래? 마실 것 좀 사올게.”
“마실 거?”
그러면서 시연이 연서의 조언을 떠올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와 함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 응, 다녀와.”
“금방 올게.”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풀숲 뒤에서 여전히 둘을 지켜보고 있는 연서와 알레시아.
연서가 자리를 비우는 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마실 걸 사러가는 건가.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해주지.”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돌연 지켜보던 현성의 모습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곧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쯤 되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너, 너?!”
그 목소리에 연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바로 현성.
그대로 연서가 잔뜩 움츠려든 채 중얼거렸다.
“어, 언제부터 눈치챘…….”
“처음부터.”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애초에 연서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어째 시연이 평소답지 않더니.’
그대로 현성이 연서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야. 가서 음료수나 좀 사와.”
“……뭐?”
그 모습에 연서가 멍하니 그와 카드를 번갈아보았다.
이어서 그녀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내가 한다고 할 것 같…….”
“그동안 미행한 거 시연이한테 들키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
그런 현성의 한마디에 연서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연서가 순순히 그의 카드를 받아들며 말했다.
“무, 무슨 음료수 사올까.”
이에 현성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대충 알아서 사와.”
“……예.”
그와 함께 연서가 터덜터덜 편의점으로 향하고,
알레시아가 그런 연서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며 현성에게 말했다.
[나도 같이 다녀오도록 하지. 그러니 그동안 자네는 시연에게 가있는 게 어떤가?]
“고마워. 부탁할게.”
그 말에 현성 역시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렇게 미행을 하던 둘을 보내고.
현성이 다시 시연에게 다가왔다.
“왔구나. 아니 이건 너무 딱딱한가? 그럼 고마워? 아냐, 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시연아?”
“혀, 현성?! 언제 왔어?”
그러자 그가 없는 동안,
현성을 반길 대사를 고민하던 시연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지 이런 모습만 보면 연서나 시연이나 둘이 똑같았다.
“……음료수 사러간다 하지 않았어?”
그대로 시연이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이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흘깃 편의점을 가리켰다.
그와 함께 편의점 문 앞에 보이는 연서.
“곧 올 거야.”
그 모습에 시연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 나 때문에…….”
허나 그때였다.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이다.”
“……뭐?”
“그동안 혹시 나랑 있는 게 불편한 건가 싶었거든.”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불편하다니!”
연서의 조언 때문에 그랬던 건데 이게 그렇게 돌아올 줄이야.
시연이 적잖이 당황한 듯,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난 그게 아니라……!”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연이 휘청거렸다.
벤치 바로 옆에 있던 분수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진 모양이었다.
“시연아!”
이에 현성이 재빨리 시연을 향해 몸을 던지고,
그대로 그녀가 현성의 위에 떨어졌다.
-풀썩.
그 탓에 시연은 자연스럽게 현성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되었다.
그리고 바닥을 따라 솟아오르는 분수대.
-촤악!
그와 함께 차가운 물줄기가 시연과 현성을 적시고,
그런 시연의 검은 머리칼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렇게 시연과 현성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시연이 현성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냐고 물었지?”
선천강에 왔을 때 현성이 했던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연서의 조언에 따라 대답했지만,
이제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로 했다.
“좋았어. 함께한 모든 순간이, 숨이 막힐 정도로 너무 행복했어.”
“…….”
“그리고 나 오늘 고백할게 있는데 들어줄래?”
원래대로라면 좀 더 분위기 있게,
훨씬 로맨틱하고 달콤한 상황에 전하고 싶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동안 항상 마음속에 차올랐던 그 말을,
눈앞의 현성에게 말하고 싶었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그와 함께 다시 한 번 솟아오르는 분수대.
-촤악!
그 사이,
현성이 시연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만약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분수 소리에 묻혀 그 대답이 들리지 않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시연에게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분수가 멎었을 때.
시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둘이 처음 만났던 선천강 둔치.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뒤로 한 채.
시연이 현성을 껴안으며 그날의 밤이 저물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