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종막(17)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얀 재가 흩날리는 메마른 황야 위.
신화 속 전장이 재현되었던 공간이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털썩.
그대로 엘카인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치이익, 그런 그의 주변의 땅은 이미 녹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엘카인 그조차도 마찬가지.
-푸스스….
어깻죽지와 팔은 고열의 섬광에 소멸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공간이 무너지며 일그러진 다리는 제 모습을 잃었다.
유일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 왼쪽 상반신과 얼굴이 전부였다.
쿠르릉, 그의 뒤로는 공허의 문이 추락하고 있었다.
곧이어 그런 엘카인의 앞으로 현성이 걸어왔다.
그러자 엘카인이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녕 이걸로… 너의 승리라고… 생각하느냐?]
“…….”
침묵을 지키는 현성.
그 모습에 엘카인이 킬킬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동시에 그의 어깨를 따라 꿈틀거리는 검은 촉수들.
촉수들은 쉼 없이 분열을 반복하며, 서서히 그의 육체를 뒤덮고 있었다.
재생의 흔적이었다.
그와 함께 엘카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넌 결코 날 소멸시키지 못한다.]
이에 현성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
이 세상에 마계가 존재하는 한,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란 그런 존재였다.
아무리 육체를 갈가리 찢어도 다시 살아나며,
공간을 붕괴시켜도 죽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느리지만 점차 재생되기 시작하는 엘카인의 육체.
일격에 소멸된 어깻죽지와 팔은 다시 제 모습을 되찾고,
섬광에 불타 사라진 외피는 새롭게 덧씌워질 것이다.
악마의 육체에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다.
가히 불사(不死)라고 불릴 법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성은 엘카인에게 죽음을 선고(宣告)하려 하고 있었다.
-촤르륵!
그대로 현성이 인벤토리에서 낡고 검은 책을 소환했다.
그건 다름 아닌 데이몬드의 일기장.
기사단의 무덤에서 들려주었던 모든 이야기가 적힌, 데이몬드의 회고록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이어서 현성이 과거 기사단의 무덤에서 데이몬드가 자신에게 일기장을 건네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짧은 한마디.
처음에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로 돌아가,
일기장을 읽고 그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순간.
현성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기장에는 기사단이 왕을 죽인 이후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그들이 기사단의 무덤에 자리를 잡은 것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줄 알았던 왕자를 찾은 사실도,
그리고 그 왕자를 통해 자신들의 더러운 오명을 씻으려던 것도.
그러나 그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왕자는 그날의 참상을 잊지 않았으며, 심장 깊은 곳에 분노를 새기고 있었다.
결국 왕자는 이 땅에 마족들을 불러왔으며,
데이몬드에게 죽음의 저주라는 이름의 처형을 내렸다.
“…….”
그대로 현성이 엘카인을 내려다보았다.
채 완벽히 재생이 되지 않은 그의 가슴팍.
그곳에는 검은 촉수가 심장을 뒤덮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심장에 아직도 그날의 분노가 남아있나?”
현성이 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멈칫.
그런 현성의 물음에 줄곧 킬킬거리던 엘카인의 웃음이 멎었다.
이어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엘카인이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와 함께 현성이 엘카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데이몬드가 눈앞에서 아버지를 죽일 때의 기분은 어땠지?”
[지금 뭐라고…….]
“그게 아니면 제 아비를 죽인 원수의 손에 키워진 심정이라거나.”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뿌드득! 엘카인의 입을 타고 살벌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현성.
이로써 확신할 수 있었다.
대마법사의 제자, 엘카인.
그는 과거 데이몬드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왕의 아들이자, 그 원수의 손에 키워진 제자였다.
안 그래도 줄곧 의문이었다.
<이스페리아>의 최종보스 엘카인.
그는 최종보스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내에서 그에 대한 스토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물며 데일런트나 크루페돈만 하더라도 배경스토리가 있는 마당에 최종보스인 그의 스토리가 언급되지 않다니.
이에 일부 플레이어들은 엘카인의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의 스토리는 명백히 존재했으며, 지금껏 플레이어들이 이를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즉, 현성이 데이몬드의 일기장을 획득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처음으로 엘카인의 스토리가 밝혀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큭… 크큭…….]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를 갈던 엘카인이 돌연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면서 그가 현성을 향해 말했다.
[그래, 내가 데이몬드의 제자이자, 남은 기사단을 멸망으로 이끈 왕자다. 그런데 그게 지금 와서 어쨌다는 거지?]
그대로 엘카인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이 지금 이 사실을 알아낸다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처음 현성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는 순간 평정심을 잃었다.
그에게 있어, 그날의 기억은 평생에 걸쳐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이자,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역린이었으니까.
허나 데이몬드는 죽었으며,
현성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육체가 수복되었을 때.
현성을 죽이고 다시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그의 방해가 없다면,
더 이상 자신의 앞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서 알케인이 말했다.
[그게 아니면 어쭙잖은 도발로 시간이라도 끌어볼 셈이었나? 그렇다면 유감…….]
하지만 그때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처음부터 시간 끌 생각은 없었어.”
시간을 끌 생각이었으면, 알레시아에게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현성이 노린 건 단 하나.
악마화가 된 엘카인을 쓰러트리고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종말의 악마로 각성한 그에게 육체가 날아갈 정도로 피해를 입힌 지금.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촤르륵!
그대로 현성이 들고 있는 일기장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눈부신 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그 사이로 현성이 엘카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악마의 진명에 대해 알고 있나?”
악마의 진명.
말 그대로 악마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이름으로,
여기에는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진명을 불린 악마는 단 한번,
그 인간이 무슨 부탁을 하던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것.
이는 이 세상에 마계가 존재하는 한,
사리지지 않는 마계의 법칙이자.
변하지 않는 <이스페리아>의 설정이었다.
진명의 대가로 악마의 소멸을 명한다.
이게 현성이 노린 마지막 패이자,
엘카인의 악마화를 기다린 이유였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지금.
엘카인은 진명의 대가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것으로 종말의 악마를 쓰러트릴 모든 것이 갖춰졌다.
-사아아.
그대로 현성의 주변을 따라 하얀 빛이 불씨처럼 흩날렸다.
이는 현성이 최후의 최후까지 기다려 만들어낸 유일한 기회임과 동시에,
비로소 기나긴 전장의 끝을 맺을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움찔!
그런 현성의 말에 엘카인이 주춤거렸다.
악마의 진명에 대한 건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엘카인은 지금껏 자신의 이름을 숨겨왔다.
엘카인이라는 이름 역시도 그랬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가 만들어낸 가짜 이름.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던 자는 단 둘 뿐.
그의 아버지와 데이몬드가 전부였다.
허나 아버지는 데이몬드의 손에 죽었으며, 그 데이몬드 또한 죽은 지금.
그의 진명을 알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했다.
그대로 엘카인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네놈이 내 진명을 알 리가…….]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의 손위에서 쉴 새 없이 넘어가던 일기장이 멈췄다.
그리고 그 마지막 페이지에는.
-처억.
엘카인, 그의 진명이 적혀있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콰직!
현성의 손이 엘카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두근두근.
그대로 현성의 손끝을 따라 엘카인의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이에 엘카인이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쿨럭!]
그렇게 검은 피가 땅을 적시고,
그런 엘카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괜찮다. 재생할 수 있다.
이정도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다.
재생! 재생만 한다면 아무 문제없었다.
-콰악!
이에 엘카인이 남은 한 쪽 손으로 현성의 팔을 부여잡았다.
이 손만 뿌리치면!
그래, 이 손만 뿌리치면 된다.
그대로 엘카인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성이었다.
[…….]
그런 현성의 눈빛에 엘카인이 허망하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메마른 황야, 무너지는 공허의 문.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결말이 다가왔음을.
만약 자신이 마지막 일격에 당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악마화가 되기 전에 그를 끝냈더라면.
이야기는 좀 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허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현성을 바라본 그때,
그런 미련들은 너무 늦은 후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라져. 테오스.”
그대로 현성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을 뽑았다.
촤악! 그와 함께 사방으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엘카인.
-푸스스.
동시에 재생되던 그의 몸이 흩어졌다.
마치 검은 재가 바람에 무너지듯,
육체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
그런 엘카인의 눈앞에 흩날리는 검은 재.
그 너머로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보였다.
이어서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테오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엘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 어디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흩날리는 검은 재 뿐.
그대로 점차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소멸이 찾아오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
이에 엘카인이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아귀를 부여잡기 무섭게,
푸스스, 손 틈 사이로 검은 재가 흩어져 내렸다.
[이리 허무하게…….]
그가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엘카인의 마지막 순간,
흐려지는 시야 너머 보인 풍경은.
-콰드드득.
공허의 문에 삼켜져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라질 수는 없단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엘카인, 아니 테오스의 육체가 바스러져 공허의 문 저편으로 떨어졌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사아아…!
남아있던 공허의 문마저도 무너지고.
메마른 황야 위.
그곳에 서있는 자는 오직 현성 그 하나뿐이었다.
“…….”
동시에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축하드립니다. 종말의 악마 엘카인을 쓰러트렸습니다.]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이 소멸합니다.]
처음은 엘카인의 소멸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 떠오른 메시지는 다름 아닌.
[축하드립니다. <이스페리아>최초로 아무도 죽지 않는 엔딩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획득 : 최초의 결말을 이루어낸]
그대로 현성이 한참동안 눈앞의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종말의 악마 엘카인의 소멸, 엔딩달성, 업적.
지금 이 모든 게 오로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완벽한 해피엔딩의 달성.
그토록 현성이 만들어내고 싶던 엔딩이었다.
그와 함께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내려오는 익숙한 검은 글자들.
엔딩 크레딧이었다.
이는 에피소드 : 종막의 끝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날아오는 금색의 드래곤.
알레시아였다.
무엇보다 그 뒤로 보이는 시연과 레이첼, 이클레아.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린과 수연, 하선까지.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해냈다.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완벽한 엔딩을 만들어냈다.
“…성! 괜찮…. 인… 다친…. 당장… 게!”
알레시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에 당장에라도 반겨주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간의 긴장이 다 풀려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엉망이네.”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곳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무기는 진즉에 깨지고 한쪽 어깨는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뚫린 옆구리까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정말이지 이 몸으로 움직인 게 기적일 정도.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던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포기.
그러면서 그가 엔딩 크레딧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엔딩 크레딧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직접 게임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대상에게 바치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있는 짧은 문장.
[Special Thanks to….]
[<이스페리아>를 플레이 한 당신.]
이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래서 이 게임을 못 끊지.”
그대로 붉은 석양이 내려오는 하늘 아래,
현성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