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종막(14)
그렇게 번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박살난 신전의 바닥과 기둥.
어지럽게 흩날리는 푸른 스파크와 파편.
[쿨럭!]
이에 엘카인이 비틀거리며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그런 그의 입을 따라 흘러내는 검은 피.
마침내 결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그가 피를 흘렸다.
[……?!]
그대로 엘카인이 황급히 자신의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냈다.
수백 년에 다다르는 긴 세월 동안,
예언자도, 대마법사도, 기사도 그 누구도 엘카인의 몸에 피를 흘리지 못했다.
헌데 고작 눈앞의 소년 하나가 그걸 해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엘카인 그가 줄곧 잊고 있던 감정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
자신 역시도 피를 흘린다는 공포였다.
엘카인의 육체는 이미 한계까지 마기를 받아들였으나, 그는 악마의 자리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쌓아온 마기로 수백 년 간 죽음을 피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유한한 삶을 가진 육체.
죽음이란 법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의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그를 속박했으며 피를 흘리는 지금.
잠시 잊고 있던 그때의 속박이 다시금 엘카인을 옥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 시발점은 유현성이라는 인간 하나.
[……설마 내가 그 인간 하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이에 엘카인이 애써 그 감정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가 그렇게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성! 유현성을 찾아 지금 당장 죽여야 했다.
그래야만 지금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기에.
그런 엘카인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움직였다.
-우뚝.
그리고 마침내.
엘카인의 시선이 한 곳에 정지했다.
잦아들기 시작한 흙먼지 너머.
분명 방금 전 움직임이 보였다.
이에 엘카인이 즉시 손을 뻗어 마기를 집중시켰다.
죽여야 한다. 지금 당장!
-고오오!
허나 그 순간이었다.
잦아든 흙먼지 사이, 뭔가 발견한 엘카인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그런 엘카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앞에는.
-스으으.
다름 아닌 엘카인 그가 서있었으니까.
검게 물든 눈과 길게 자란 수염.
그 주변으로는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눈앞의 그가 발을 내딛자,
자신이 엘카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짙은 마기가 그림자마저 집어삼키며 검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또 다른 엘카인의 손을 따라 모여드는 심상치 않은 입자.
그 모습은 그가 전장의 마법사들을 소멸시킨 그때의 빛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엘카인 그밖에 다루지 못하는 힘.
공간의 악마, 레이아를 흡수하고 얻은 권능의 증거였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
이에 엘카인이 버럭 소리치며 달려든 순간.
그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쩌저적, 허공에 균열이 생기며 모든 걸 집어삼켰다.
-콰드드드드득!!
공간 그 자체의 소멸.
그대로 눈앞의 풍경이 찢겨나가듯,
엘카인의 육체가 소멸을 맞이하였다.
* * * * *
-사아아….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공간의 소멸이 선고(宣告)된 눈앞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파편의 흔적도, 마기도, 엘카인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때와 같이 메마른 바람만이 맴돌 뿐.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쿨럭!]
또 다른 엘카인이 기침을 토해내며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겉을 감싸고 있던 형상(形像)이 바스러져 내렸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파스스.
마치 외피가 벗겨지듯, 한 겹씩 사라지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겉모습마저 바스러졌을 찰나,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
도플갱어 퀸의 로브를 쓰고 있는 현성이었다.
그대로 그가 천천히 로브를 벗은 채,
눈앞을 바라보았다.
-띠링!
그러자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엘카인을 쓰러트렸습니다.]
[그에 따라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이 멈춥니다.]
-쿠구궁!
이를 증명하듯 저 위에 자리하던 공허의 문이 제 자리에 정지하였다.
별의 소멸처럼 흩날리던 입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정적만이 맴도는 신전.
-털썩.
현성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피식 웃었다.
최종 보스 엘카인.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보통의 공격이 아닌,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시점이라 한들,
플레이어가 쓸 수 있는 스킬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엘카인에게 데미지는 입힐 수 있어도, 마무리를 지을 만한 최후의 일격은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현성은 이미 공략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게 바로 도플갱어 퀸의 로브.
이클레아 에피소드를 마무리한 보상으로 얻은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으로,
여기에는 특수스킬 : 완전복사가 내장되어있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효과는.
‘5분간 대상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그 능력치까지도 완벽하게 복사하는 것.’
플레이어는 이를 사용해 엘카인의 능력치를 완벽하게 복사해낸 뒤,
공간을 소멸시키는 그의 권능을 사용해 역으로 엘카인에게 최후의 일격을 박아 넣는다.
이게 바로 최종보스의 공략법이었다.
이 공략은 여왕의 궁전을 클리어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방법이자,
제작진의 자그마한 배려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해야했다.
‘<이스페리아>의 제작진은 그렇게 의도가 순수한 놈들이 아니라는 걸.’
그대로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현성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띠링.
돌연 귓가에 알림음이 울려 퍼지며 폐허가 된 신전을 타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
-고오오…!
그런 공허의 문틈을 따라,
부유하던 검은 입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한 곳에 모여드는 입자들.
“…….”
그 모습에 현성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앞을 주시했다.
그래, 엘카인을 쓰러트렸는데도 공허의 문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부터,
플레이어는 의심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애초에 진정으로 엘카인을 쓰러트렸다면,
공허의 문 역시 사라져야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한 곳에 모여든 검은 입자 사이,
두근, 무언가의 탄생을 알리는 울림이 요동쳤다.
그리고 현성의 눈앞에 재차 떠오르는 메시지창.
[죽음을 맞이한 엘카인이 악마화(惡魔化)의 조건을 충족합니다.]
[잠시 후, 이 땅에 종말의 악마 엘카인이 강림합니다.]
[당신의 목표는 그전에 엘카인을 봉인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엘카인의 부활.
거기다 기존의 모습이 아닌 종말의 악마로서의 부활.
그런 메시지창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현성은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었다.
“…….”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동시에 현성이 이토록 침착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동안 엘카인은 한계까지 마기를 받아들였으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악마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허나 죽음을 경험한 지금.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을 마주한 존재로서,
악마가 될 조건을 충족하였다.
죽음을 맞이하고 난 뒤에야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엔딩은?
혹시 예전에 엔딩에 관해 말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이스페리아>에는 총 3개의 엔딩이 존재한다.
우선 첫 번째, 온 인류가 멸망을 맞이하는 배드엔딩.
이는 지겹도록 말해왔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노말엔딩과 해피엔딩.
그리고 그 전개는 다음과 같았다.
플레이어는 마지막 결전 끝에 엘카인을 쓰러트리지만,
그가 악마로 변하기 전 봉인을 해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허나 그 과정에서 미하일은 물론이며, 히로인의 희생을 치러야했다.
노말엔딩의 경우에는 히로인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해피엔딩의 경우 전부는 아니지만, 히로인 하나를 무조건 희생.
그에 따라 이제 곧 마족을 처리한 미하일과 연합들이 이쪽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이 알레시아에게 전음을 전했다.
‘알레시아, 내 말 들려?’
이에 잠시 뒤,
신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알레시아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때가 된 건가.]
‘그래. 그럼 전에 말한 대로 해줘.’
현성이 엘카인과 결전을 치르기 전,
그가 알레시아가 하나 부탁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신호할 때, 기필코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달라는 것.
지금부터 현성은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어내기 위해 엘카인을 봉인하는 것 대신,
악마가 된 그를 상대할 것이다.
허나 그 과정에서 미하일이나 히로인이 끼어든다면,
분명 엘카인을 봉인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할 터.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성은 알레시아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이에 알레시아가 말했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알레시아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현성이 악마가 된 엘카인을 상대할 거라는 계획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웠다.
현성이 이대로 죽을까봐.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지 못할까봐.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러나 그때였다.
현성이 알레시아의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
나지막이 전음을 전했다.
‘알레시아, 걱정 마.’
[…….]
‘약속, 반드시 지킬 테니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현성의 목소리.
동시에 알레시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현성이 나눈 약속.
죽지 않을게.
현성은 그녀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로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지?]
그런 그녀의 물음에 현성 역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와 함께 신전 주변에 금색의 장막이 쳐졌다.
알레시아의 결계였다.
이걸로 준비는 끝.
“…….”
이제 남은 건 하나.
현성이 눈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요동치고 있는 검은 입자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고치를 연상케 하였다.
무엇보다 점점 강해지는 격동.
그리고 머지않아 고치의 울림이 멎은 그 순간이었다,
-쩌저적…. 콰아아아아앙!!
고치가 갈라짐과 동시에 폐허가 된 시전을 따라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이어서 그 사이,
현성의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종말의 악마 엘카인이 강림하였습니다.]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이 완성되었습니다.]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익숙한 금색의 퀘스트창.
[히든 퀘스트 : 기사왕의 길을 걷는 자]
<기사왕 티리카의 전설을 마주한 자여, 그대는 티리카의 의지를 이을 자격을 충족하였다.>
퀘스트 내용
-스킬 : 투신의 길 사용하기. (완료)
-티리카의 업적을 따라 그의 흔적을 찾으시오.(진행 중)
-첫 번째 업적 : 폭주한 불의 악마 크루페돈을 격퇴하시오.(완료)
-두 번째 업적 :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조우하기.(완료)
-세 번째 업적 : 데이몬드에게 자격을 인정받으시오.(완료)
-네 번째 업적 : 종말의 악마를 상대로 5분간 버티시오. (진행 중)
보상 : 티리카의 비전스킬.
*본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입니다.
네 번째 업적과 그 내용.
과거 티리카의 마지막 업적이 분명했다.
그대로 폐허가 된 신전 중앙, 최후의 5분이 시작되었다.
[남은 시간 : 5분]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