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종막(12)
[……유감이군.]
현성의 대답에 엘카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을 휘저으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럼 죽어라.]
그와 함께 검은 마기가 거세게 솟구쳤다.
파도를 연상케 하는 이펙트의 공격.
무엇보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본격적인 3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이에 현성의 발끝을 타고 붉은 화염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가 땅을 박차기 무섭게,
콰아앙! 화염이 폭발하며 현성이 그 반발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엘카인이 미간을 좁히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콰악!
그에 따라 돌연 밀려오던 검은 마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수십 개의 검은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그런 손아귀들이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현성.
-콰앙! 콰드득…. 콰앙! 쿠드득!
그대로 현성이 아슬아슬하게 손아귀를 피할 때마다,
신전의 바닥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공격이 멎었다고 생각한 순간.
현성이 발견한 건 저 멀리, 검은 마법진을 발동하고 있는 엘카인이었다.
이어서 그가 손을 펼치며 외쳤다.
[어둠에 먹혀 사라져라!]
곧바로 엘카인을 중심으로 퍼지는 검은 구슬들.
이에 일순간, 현성의 눈이 좁혀졌다.
<이스페리아>의 최종 보스 엘카인.
그와의 전투는 총 3페이즈로 이루어져있다.
1페이즈는 그의 마족군단을 상대하는 것이며,
2페이즈는 정신계 공격 무저갱.
그리고 3페이즈는 보다시피 폐허가 된 신전을 배경으로 플레이어와 엘카인이 1대 1로 붙게 된다.
애초에 현성 혼자 결계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3페이즈는 플레이어 혼자 상대해야하기 때문.
또한 3페이즈의 양상은 주로 여타 보스전이 그랬듯,
보스가 여러 패턴을 펼치며, 플레이어는 그 패턴을 읽고 파훼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
무엇보다 방금 전의 대사와 주변으로 퍼지는 구슬.
이는 엘카인의 첫 번째 패턴, 타르타로스(Tartarus)였다.
본 패턴은 엘카인이 필드 전체에 검은 구슬을 까는 것으로 시작하며,
플레이어가 이 구슬에 닿을 경우.
구슬이 폭발하며 일정 데미지와 함께 블랙홀이 펼쳐지며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에 따라 플레이어는 2초간 속박상태에 빠진다.
일각의 다루는 보스전에서 상태이상 속박은 꽤나 성가신 제약.
그렇기 때문에 타르타로스의 공략법은 시전시간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구슬을 피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구슬을 파괴하지 않고, 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플레이어가 구슬을 파괴해도 블랙홀이 발동하는 건 똑같거든.’
블랙홀의 발동조건은 플레이어가 구슬에 닿거나,
구슬에 충격이 가해질 경우.
이렇게 두 가지.
동시에 이를 증명하듯, 현성을 향해 날아든 구슬이 신전의 기둥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그와 함께 어둠이 토해져 나오며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블랙홀의 발동.
-콰드드득!
이에 블랙홀은 반경 1m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당기며 집어삼켰다.
당장 지금은 하나뿐이라 충분히 거리를 벌리면 피할 수 있었지만,
필드는 이미 수십 개의 구슬로 뒤덮인 상태.
‘여기서 몇 개만 더 터져도 그만큼 움직이기는 어려워진다…!’
정석대로라면 여기서 현성은 최대한 구슬을 피하며 버텨야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공략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앗!
그대로 현성이 박살난 기둥을 밟고, 위로 도약했다.
이어서 그가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아아…!
현성의 손에 들린 건 시린 한기를 뿜어내는 푸른 창.
곧바로 그의 앞에 아이템 설명창이 펼쳐졌다.
[얼음의 기사 헌리스의 창]
[등급 : 유니크]
설명 : 과거 얼음의 기사라고 불리던 헌리스가 쓰던 창. 그의 이명만큼이나 이 무기에는 방대한 얼음의 힘이 담겨있다. 헌리스의 축복이 함께하는 한 창에 깃든 얼음은 오로지 주인의 의지를 따라 무기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과거 얼음무덤에서 획득한 유니크 등급의 창으로,
불의 악마 크루페돈을 마무리 지었던 무기였다.
이에 현성이 창을 쥐면서 얼음폭풍을 발동했다.
-쩌저적, 콰득!
그에 따라 창을 따라 시퍼런 얼음조각들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현성이 필드를 향해 창을 내리찍으려는 찰나.
그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가 푸른빛을 내뿜었다.
-파아아앗!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눈의 결정.
전에 화이트레이를 토벌하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무엇보다 그 효과는 얼음공격에 150%의 보정치가 붙는 것과.
화이트레이의 궁극기, 화이트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대로 현성이 바닥을 내리찍은 순간.
한 줄기의 하얀 섬광이 대지를 강타했다.
무려 얼음의 기사 헌리스의 창에다가 얼음폭풍,
거기다 눈의 결정으로 인해 150%보정치와 특수스킬 : 화이트브레스가 합쳐진 공격이었다.
그 충격에 시퍼런 한기와 얼음이 순식간에 신전 전체를 뒤덮었다.
-콰드드드득!!
분명 검은 구슬은 건드리면 폭발하지만, 얼음 속성을 이용해 얼려버릴 경우.
구슬을 폭발시키지 않고 파괴하는 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타르타로스를 최단시간 내에 파훼하는 법.
-사아아…….
그대로 대지 위의 모든 게 얼어붙었다.
그건 필드에 잔뜩 깔린 검은 구슬도 마찬가지.
그리고 현성이 창을 거둔 그때.
-끼기긱…. 챙강!!
사방에 깔린 검은 구슬들이 일제히 산산조각 나며 파괴되었다.
그 주변에 흩날리는 건 구슬의 파편과 차가운 얼음조각 뿐.
원래대로라면 화이트브레스를 사용한 직후.
마나 탈진으로 인해 쓰러져야함이 맞았으나,
완전히 흡수한 드래곤 하트가 이를 일부분 막아주었다.
덕분에 현성이 미리 챙겨둔 엘릭서를 마셔 빠져나간 마나를 채우고, 재빠르게 엘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퓻!
그런 현성의 모습에 엘카인이 미간을 좁혔으나,
그것도 잠깐.
곧바로 엘카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양 손을 펼쳤다.
[걸렸구나!!]
그와 함께 엘카인의 양 옆을 따라 붕대로 눈을 감은 커다란 미라가 소환되었다.
그리고 쩌억, 미라가 턱을 벌리며 입이 기괴하게 갈라졌다.
그런 미라의 입을 따라 모여드는 붉은 입자들.
-고오오!
두 체의 미라가 쏘아내는 붉은 섬광.
엘카인의 2번째 패턴, 사멸의 빛이었다.
이어서 현성의 눈앞에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엘카인이 사멸의 빛을 준비합니다.]
[사멸의 빛에 맞을 경우 플레이어는 일정 확률로 즉사합니다. 주의하십시오.]
-빠드득!
친절한 메시지 창에 현성이 이를 갈았다.
고오맙다.
정말이지 아주 고마워서 눈물대신 욕지거리를 쏟을 지경이었다.
속박이 붙어있는 타르타로스 이후에 즉사기인 사멸의 빛이라니.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미친 새끼가 만든 패턴일까.
아무리 최종보스라고는 하나, 이 정도면 모친은 물론이며 부친까지.
양친 모두 출타하신 패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악독한 점은 사멸의 빛은 한 번 쏘고 끝나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
무려 5번.
그리고 그 5번 중, 즉사가 붙어있는 건 2개.
물론 그 순서는 완벽한 랜덤이었다.
경고 메시지에 적힌 일정확률이란 바로 이 소리.
그야말로 지랄도 이정도면 풍년이었다.
이래서 랜덤거리는 새끼들은 월급도 랜덤으로 받아야한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현성이라 한들,
5번 중 즉사기가 섞인 2개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요지는 간단했다.
뒤지기 싫으면 전부 다 피해라.
물론 피할 수 있을 때지만 말이다.
그리고 붉은 입자가 전부 모여든 그 순간.
현성을 향해 사멸의 빛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그와 함께 붉은 섬광이 가차 없이 현성을 집어삼켰다.
그대로 쉴 틈도 없이 연이어 쏘아지는 공격.
-콰광! 쾅! 콰아앙! 콰앙!!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섬광이 훑고 지나간 곳에는 오직 자욱한 흙먼지가 솟아오를 뿐이었다.
이에 엘카인이 키식 웃으며 검은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채 피할 틈도 없이 이어진 총 5번의 공격.
설사 첫 번째를 막고 버텼다고 한들,
이어진 4번의 공격까지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드디어 해치웠다.]
그대로 엘카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제 아무리 현성이라고 해도 끝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부활 플래그 고맙다. 이 새끼야.”
[……?!]
자욱한 흙먼지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건 분명 현성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서서히 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허수아비…?]
구 아카데미 건물에 있던 훈련용 허수아비였다.
이어서 그 뒤에서 튀어 나온 현성이 히죽 웃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훈련용 허수아비.
말 그대로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허수아비로,
어떤 공격을 해도 데미지가 1밖에 닳지 않는 특성을 가진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현성을 이를 이용하여, 과거 정령의 신전을 클리어 했을 때처럼.
엘카인의 즉사기를 막아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현성의 앞에는 3체의 허수아비가 서있었다.
원래는 5체였으나 그 중 2체는 즉사기에 맞아 소멸.
하지만 현성만큼은 눈앞에 보는 대로 멀쩡했다.
물론 사용횟수는 한 번 뿐이지만,
그 한 번에 한해서 훈련용 허수아비는 최고의 방패이자, 신 그 자체였다.
허수아비. 짜릿해. 최고야.
언제나 새로워.
이에 현성이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더스트 스톰, 불스아이.”
그리고 그가 시위를 놓기 무섭게,
두 개의 마력 화살이 엘카인의 양 쪽에 있는 미라를 꿰뚫었다.
연이어 화살을 따라 몰아치는 모래폭풍.
-콰가가가가각!!
그 충격에 미라가 모래폭풍에 갈리며 소멸되었다.
그와 동시에 현성의 신형이 흩어졌다.
그대로 머지않아,
-처억.
어느새 엘카인의 바로 앞에 나타난 현성이 주먹을 당겼다.
그런 그의 팔을 따라 넘실거리는 화염.
이에 현성이 곧바로 엘카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그와 함께 화염이 폭발하며 충격음이 신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정확히 엘카인의 복부에 박힌 주먹.
허나 뭔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끈적거리는 점액질을 타격한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
그 불쾌한 감촉에 현성이 재빨리 팔을 빼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가 한 발 늦었다.
-콰악!
엘카인이 돌연 현성의 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그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슬라임을 연상케 하는 모습.
[크큭, 큭…. 아무래도 이번에는 네놈이 걸린 모양이구나.]
애초에 눈앞에 있는 엘카인의 육체는 전부 가짜에 불과했다.
이어서 엘카인의 턱이 우드득! 꺾이더니,
그의 입을 타고 쏟아진 검은 연기가 현성과 그 주변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
* * * * *
그렇게 검은 연기가 신전 전체를 뒤덮고,
머지않아 공중에서 엘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감추고 있던 본체였다.
애초에 그는 공간의 악마 레이아의 능력을 흡수한 상태.
공간에 균열을 일으켜 그 안에 모습을 숨기고,
대타를 새우는 것쯤은 별거 아니었다.
-스으으.
그대로 그가 아무 말 없이 신전을 가득 메운 검은 연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정체는 마기의 온갖 독기를 섞어 만든 독 안개.
직접적인 공격이라면 허수아비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독 안개는 조금 달랐다.
호흡기는 물론이며, 피부를 통해 흡수되는 독.
이번에는 확실히 먹혔다.
그 증거로 점차 검게 물들어가는 현성의 육체.
[크큭, 큭…. 그래, 됐다…!]
그 모습에 엘카인이 눈동자가 희열으로 물들어갔다.
이제 현성은 독에 걸린 채,
서서히 내부부터 썩어문드러져 죽을 터.
이것으로 방해꾼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것 뿐.
엘카인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마치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균열.
공허 속, 두 차원의 경계가 일그러지며 그 입자들이 검은 눈처럼 흩날렸다.
이에 엘카인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아니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덥썩!
신전을 가득 메운 독 안개 사이.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엘카인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점차 강해지는 손아귀의 힘.
-콰드득!
그런 손은 분명 중독에 걸린 듯 검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 사이 검은 비늘이 돋아있었다.
다름 아닌 드래곤 포스의 증거.
[……?!]
이에 엘카인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독 안개 너머로 검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현성.
“찾았다.”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런 그의 손에는 보라색의 독버섯,
파프질리아가 들려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