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종막(11)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전장에서 꽤나 떨어진 폐허.
바로 저 앞에 엘카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곧이어 알레시아가 한 차례 더 속도를 올림에 따라,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엘카인이 뒤를 흘깃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벌써 그 많은 키메라 군단을 돌파하고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허나 여기서 멈췄다가는 오히려 그게 더 큰 실수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에 따라 엘카인 또한 속도를 올리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아래에는 폐허가 된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엘카인이 인간계와 마계를 잇기 위해 초석을 다져둔 장소.
저기까지만 도달하면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파앗!
그와 함께 신전 바로 위에 도달한 엘카인이 재빨리 방향을 바꿔,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그대로 엘카인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고.
그 모습에 알레시아 역시 엘카인을 따라 신전을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그녀가 신전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이었다.
엘카인이 작게 조소했다.
-터엉…. 끼기긱!!
그러기 무섭게 신전을 향해 쏘아지던 알레시아가 튕겨나갔다.
마치 허공이 투명한 유리막에 가로막힌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에 엘카인이 그런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온 노력은 가상하나 이미 늦었다.]
앞서 말했듯이 신전까지만 도달하면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사전에 엘카인이 깔아둔 결계 때문.
무려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대업을 완성시킬 장소였다.
그만큼 엘카인이 이곳에 아무런 대처도 안 해둘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전에 쳐둔 결계는 대마법사의 제자인 그가 전부터 준비하고 직접 설치한 마법.
[네놈이 드래곤이라한들, 결계를 부수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다.]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엘카인 그 하나뿐.
아니 설사 알레시아가 결계를 해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이미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문이 완성됐을 터였다.
결국에는 엘카인이 계획했던 것처럼,
그가 신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들의 패배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엘카인이 저 멀리 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하찮은 미물들.]
제 아무리 히로인들이 길을 뚫어주고, 용을 써 봐도,
그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에 불과했다.
이에 엘카인이 알레시아의 등 위에 있는 현성을 향해 외쳤다.
[애초에 내가 무저갱에서 말했지 않느냐! 현성, 네놈의 선택은 틀렸다고! 이대로 네놈의 패배…….]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엘카인이 하던 말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이상했다.
그도 그럴게 분명 알레시아의 등 위에 있어야 할 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분명히 보였던 현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인가?
이에 엘카인이 곧바로 주변의 마나를 감지해봤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역시 현성이 말한 대로군.]
허공에 떠있던 알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방금 전, 엘카인을 쫓을 당시.
현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레시아, 저 신전 보이지? 엘카인이 저 신전에 들어가는 순간 결계가 발동될 거야. 그리고 결계가 발동한다면 그건 설사 너라고 해도 쉽게 해체할 수 없을 거야.”
[……그럼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이에 알레시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하지만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알레시아가 허공을 향해 외친 순간이었다.
[현성! 지금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돌연 엘카인의 등 뒤를 타고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앗!
애초에 알레시아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끄는 것.
그와 함께 엘카인이 황급히 자신의 등을 살폈다.
그러자 그런 그의 등에는 어느새 검은 팔찌가 붙어있었다.
[……?!]
그건 다름 아닌 아카데미 상점에서 판매 중인 아이템.
실종 방지 목줄의 팔찌였다.
무엇보다 팔찌는 목줄과 한 세트로,
그 효과는 목줄을 찬 대상을 팔찌의 착용자가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시키는 것.
이어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자각한 엘카인이 곧바로 팔찌를 떼어내려 했으나.
팔찌의 발동을 알리는 빛이 터져 나왔을 때부터.
그는 이미 늦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환한 빛 무리 사이.
-스팟!
검은 목줄을 들고 있는 현성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엘카인의 등 뒤.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눈치 채는 게 느려.”
-화르륵!
곧바로 현성의 팔을 따라 타오르는 화염.
이어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염이 폭발하며 엘카인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신전의 바닥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그 파편과 불씨가 흩날렸다.
그렇게 자욱하게 솟아오른 먼지 사이.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며 엘카인이 손을 휘저었다.
-촤악!
이에 자욱한 흙먼지가 단숨에 걷히고,
엘카인이 눈앞에 자리한 현성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혼란에 휩싸여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결계를……!]
그러자 현성이 작게 조소하며 주먹에 남은 불씨를 털어냈다.
“글쎄.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러면서 현성이 폐허가 된 신전을 바라보았다.
<이스페리아>에서 본 그대로였다.
엘카인과의 마지막 결전을 치르던 장소.
그리고 이곳에는 앞서 말했듯 엘카인의 결계가 쳐져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석대로라면 플레이어는 히로인들과 힘을 합쳐,
엘카인이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에게 피해를 입혀 결계를 무효화 시켜야했다.
‘정석대로라면 말이지.’
하지만 현성은 보란 듯이 아카데미의 실종 방지 목줄을 이용해 이 결계를 뚫어냈다.
이는 일종의 버그성 테크닉이자,
현성이 발견해내기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그도 그럴게 어느 미친놈이 펫 실종 방지 아이템으로 최종보스의 결계를 뚫으리라 생각했겠는가.
그건 엘카인 또한 마찬가지.
[……큭, 크큭, 크하하!]
이에 엘카인이 돌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도 잠시.
뚝, 엘카인의 웃음이 멎었다.
[그래, 인정하겠다. 넌 지금껏 봐왔던 하찮은 인간들과는 다르다.]
그대로 엘카인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룡 카이락스의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고, 절대 섞이지 못할 세력을 하나로 뭉쳤다.
거기다 무저갱을 빠져나오고, 방금 전 결계를 뚫고 들어오기까지.
지금까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자들은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현성은 독보적이었다.
영웅이라 불리던 자들도,
세상의 종말을 막아내려던 예언자도,
이지를 깨우친 대마법사도 실패한 걸.
눈앞의 소년이 해냈다.
당장 지금도 그러지 않은가.
그러면서 엘카인이 위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아름답지 않나?]
그런 신전의 천장 위에는 마치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균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계와 마계를 잇기 위해 그가 이어둔 공간의 문이었다.
그 너머로는 죽은 별과 같은 입자들이 공허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사아아.
[인간계와 마계가 합쳐지면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그대로 엘카인이 멍하니 공허 사이,
부유하는 입자들을 매만지듯 허공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기사도, 왕도, 인간도,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겠지.]
그렇게 말하는 엘카인의 말에서는 후회와 분노, 기대.
온갖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이어서 그가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날의 악몽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말이다.]
그런 엘카인의 주위로 서서히 검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엘카인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정하지. 넌 그 멍청한 족속들과는 다르다.]
그래, 현성은 달랐다.
그저 세상의 종말을 도래할 것이라며,
그 뒤에 있는 숭고한 뜻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행동만 앞서는 무지몽매한 녀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현성에게는 자신의 뜻을 관철해낼 힘과 능력이 있었으며,
지금껏 이를 증명해냈다.
그거면 충분했다.
현성과 같은 자라면 자신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목도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가 만들 세계에는 인재가 필요하지 않은가.
이에 엘카인은 그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하사하기로 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건 어떤가.]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을 타고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엘카인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최종 결전을 앞에 두고 발생한 이벤트 창.
원작에서는 본 적 없는 새로운 전개였다.
동시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
<이스페리아>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이런 대사도, 이런 제안도 존재하지 않았다.
곧바로 마지막 결전에 돌입하는 게 전부.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이벤트가 발생했다면,
이는 지금의 이야기가 현성이 알고 있던 전개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거 마음에 드네.”
그런 현성의 말에 엘카인이 작게 웃었다.
[그래, 너라면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럼 내 손을 잡…….]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멈칫.
그와 동시에 엘카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명 방금 마음에 든다고 했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라니.
[……앞뒤가 다르지 않나?]
이에 현성이 빤히 엘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한 게 설마 네 제안이겠어?”
[……뭐?]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한건 다른 거야.”
현성이 알고 있는 전개와는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
한마디로 변수.
그가 마음에 든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지금의 이야기가 그가 알고 있는 전개와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곧 엔딩 역시도 현성이 알고 있던 기존의 엔딩이 아닌,
‘새로운 엔딩’을 만들어낼 희망이 있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즉,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해피엔딩.
지금까지 현성이 수십, 수백 번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집착했던 부분이었다.
물론 그는 해피엔딩을 본 적이 있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엘카인을 쓰러트린 후에 전개되는 엔딩일 뿐.
그가 추구하는 무결점 엔딩과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기존의 해피엔딩은 엘카인을 쓰러트리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게 되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는 마지막 결전 끝에 엘카인을 쓰러트린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가 악마로 변하기 전, 봉인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하일은 물론이며, 히로인의 희생을 치러야했다.
“노말엔딩의 경우에는 히로인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해피엔딩의 경우 전부는 아니지만, 히로인 하나를 무조건 희생해야하지.”
아무리 해피엔딩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히로인 한 명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수백 번에 다다르는 회차 동안 현성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히로인의 희생으로 이루어낸 해피엔딩?
아니, 그딴 건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나은 노말엔딩일 뿐이지.
“그야 완벽한 배드엔딩은 있는데 완벽한 해피엔딩이 없다고? 말도 안 되잖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스페리아>에 있는 온갖 업적을 깬 그에게 있어,
완벽한 해피엔딩은 일종의 마지막 과제와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알고 있는 전개와 다르게 흘러가는 지금에야 비로소,
현성은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배드엔딩이니 해피엔딩이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넌 그저…….]
이에 엘카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현성이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래, 넌 그저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 지금부터 난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모든 걸 쏟아 부어,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로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N 버튼을 누르며 히죽 웃었다.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어 낼 거라는 걸.”
[엘카인의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엘카인의 성향이 적대적으로 고정됩니다.]
[3페이즈에 돌입합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