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종막(10)
그런 현성의 말에 엘카인이 노기(怒氣)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감히……!]
현성이 들고 있던 뿔과 소환된 유령극단.
분명 자신의 수하 이키펠의 것이었다.
헌데 제 주제도 모르는 인간 나부랭이 따위가 그 뿔을 들고 도발하다니.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현성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엘카인이 주먹을 꾹 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내가 무슨…….”
“난 방금 전까지 분명 아카데미에서 있었는데 왜…?”
그의 주변에는 방금 전 현성의 공격으로 인해 눈동자가 소멸함으로써,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을 인질로 삼는 것은 물론이며,
다시 무저갱을 사용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공간을 다루는 레이아의 능력과 무저갱까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2가지의 패가 봉인 당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현성 그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
이에 순간 엘카인의 머릿속에 작은 불안함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전면적으로 싸워 이기는 건 문제없었다.
허나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현성과 싸워 이기는 게 아닌,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것.
그만큼 만약, 정말 만약에.
‘……그간의 계획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수백 년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자칫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을 몰랐다.
그러나 당장 지금조차도 불안함의 씨앗은 커져가고 있었다.
눈앞의 소년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처참히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럴수록 더더욱 신중해야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엘카인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선택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다…!’
일단 두 차원을 잇기만 한다면,
그것만 성공한다면 아무런 문제없었다.
그 후에는 이미 목적을 이룬 이상.
현성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도 결국에는 전부 헛수고였으며,
엘카인 또한 앞뒤 잴 거 없이 그냥 방해가 되는 그를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일단 눈앞의 현성을 따돌린다.
-파앗!
그대로 엘카인이 양 손을 마주치며 마기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주변을 따라 검은 마기가 솟구치며 사방에서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마치 화연의 디멘션 게이트가 열릴 때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기분 나쁜 기운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 균열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자리할 뿐.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균열 너머의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둠이 아니었다.
-꿈틀!
머지않아 그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너머에는 그동안 엘카인이 손에서 탄생한 온갖 키메라와 마수, 언데드들이 한 데 뭉쳐 있었다.
어둠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지네.
그 몸통에는 좀비와 스펙터가 구더기처럼 잔뜩 들끓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키메라 무리가 썩은 날개를 휘저으며 고개를 비틀고 있었다.
[내가 꽤나 공들여 준비한 아이들이다. 그만큼 제아무리 네놈이라도 이만한 수는 힘들 터.]
그와 함께 엘카인이 쩌저적! 균열을 깨트리며 히죽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내가 만들 이상향에서 말이지!]
그렇게 그의 외침과 동시에 균열에서 수천에 다다르는 키메라가 쏟아져 내렸다.
갈라진 균열과 그 사이에서 내려오는 기괴한 키메라들.
그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도(地獄道)와 다를 바가 없었다.
[키륵, 키르르륵!!]
[그워어어억!!]
이에 현성이 재빨리 엘카인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의 손이 닿기 직전,
키메라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그 사이.
엘카인이 등을 돌리며 날아갔다.
-파앗!
그 모습에 현성이 이를 갈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을 따돌리고 그 사이에 인간계와 마계를 연결할 속셈이 분명했다.
그를 저지해야했다.
허나 현성이 엘카인을 추격하려들기 무섭게,
커다란 지네형상의 키메라가 냅다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대로 키메라가 현성에게 직격했다.
“……이런 제길!”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현성이 저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저 멀리 절벽 아래.
자욱한 흙먼지 사이, 현성이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키메라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아냈지만, 다행히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육체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을 물론이며, 지상까지 가득 메운 키메라 군단.
앞서 말했듯 엘카인이 인간계와 마계를 잇기 전에 그를 추격해야 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키메라 군단을 뚫어야했다.
‘물론 쓰러트리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저만한 수의 군단을 뚫고 도착한 뒤에는 이미 늦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돌연 현성의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괜찮아. 현성.”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누나, 하선이었다.
아니 하선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도련님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세요.”
“길은 우리가 뚫을 테니까.”
수연과 시연이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연이어 레이첼과 이클레아.
거기다 하린까지.
“이제 저희가 활약할 차례네요.”
하린이 싱긋 웃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전장 한 가운데 모인 <이스페리아>의 히로인들.
오직 현성 그 하나만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자,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현성, 준비되었느냐.]
어느새 그의 옆에 온 알레시아가 물었다.
이에 현성이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
[얼마든지.]
그리고 알레시아의 단호한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하선과 수연이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간다. 수연.”
“서포트하겠습니다. 아가씨.”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퓻!
하선과 수연의 신형(身形)이 사라졌다.
곧 둘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키메라 군단의 한 가운데.
그런 하선의 양 손에는 어느새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으며, 그녀가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찍은 찰나였다.
-콰아앙…. 콰가가가각!!
하선의 손에 응축되어 있던 검은 마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대로 바닥을 타고 솟구치는 수십 개의 마기.
뻗어나간 마기의 줄기는 또 다른 줄기로 갈라지며 눈앞의 모든 걸 집어삼켰다.
-콰드드드득!!
마치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검은 가시나무.
과거 기사단의 무덤에서 보았던 하선의 공격이었다.
이에 주변의 키메라들은 날카로운 가시에 몸이 꿰뚫린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스팟!
푸른 섬광과 검은 섬광이 키메라를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공중에 흩어지는 검은 피.
허나 섬광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가시나무에 박힌 키메라들을 뒤덮었다.
-핏! 피잇! 피비빗!
들리는 것은 오로지 날카로운 파공음이 전부였으며,
보이는 것은 푸른빛의 연속과 어지럽게 쏘아지는 검은 섬광 뿐.
마스터 암살자 클래스의 궁극기, 쉐도우 브레이크였다.
그리고 마치 검은 가시나무에 꽃이 피어나듯,
사방으로 검은 피가 흩날릴 때.
레이첼이 발을 내딛으며 시연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지?”
“알고 있어.”
그런 레이첼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검, 동백을 매만졌다.
이어서 레이첼의 눈동자가 붉게 반짝인 순간이었다.
-펄럭!
그녀의 뒤를 타고 피로 이루어진 붉은 날개가 펼쳐졌다.
그에 따라 붉은 깃털이 흩날리며, 레이첼의 주변을 따라 피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조소하며 말했다.
“한 눈 팔면 미워할 거야. 알겠지?”
장난스러운 레이첼의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가 날아오르자 전장 한 가운데, 거대한 붉은 해일이 키메라 군단을 덮쳤다.
그 크기는 방금 전 현성을 공격한 커다란 지네를 전부 뒤덮고도 남을 정도.
-콰아아아아!!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뻘건 피의 바다 속.
레이첼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먹어치워. 바스커빌.”
동시에 그 순간,
붉은 파도 사이, 커다란 지네를 삼킬 정도로 거대한 입이 솟아나왔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빙산의 일각처럼 솟아난 송곳니 뿐.
-쿠구구구…!
그대로 붉은 개가 아가리를 벌린 채,
한 입에 지네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콰드드드득!!
그 사이로 지네의 몸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이어서 넘실거리던 파도가 일제히 소용돌이치며 위에서 아래로 솟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용오름을 연상케 하는 모습.
-고오오…. 쿠르르릉!!
전장 한가운데 솟아오른 용오름은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지네를 비롯한 키메라를 찢어발겼다.
그와 함께 공간 전체를 타고 파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습에 줄곧 뒤에 있던 시연이 천천히 동백에 손을 올렸다.
-사아아.
그리고 그녀가 검을 휘두르기 직전.
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극의 : 절.”
그대로 시연이 좌에서 우로.
검을 휘둘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검격.
화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 단 한번 검을 휘둘렀을 뿐.
허나 그때였다.
-피잇!
시연의 검 끝을 따라 허공에 그려지는 푸른 선.
그대로 선이 흩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검격이 붉을 해일을 갈랐다.
-콰가가가각!!
말 그대로 파도를 자른 일검(一劍).
이에 파도 사이 섞여있던 키메라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검격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키메라들이 쓸려나가는 파도 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클레아와 하린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자리한 곳은 키메라 군단의 정중앙.
허나 하린과 이클레아의 얼굴에는 그 어떤 두려움과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둘이 손을 맞잡고 하늘 위로 뻗었다.
이어서 이클레아가 말했다.
“우리도 질 수 없지?”
“물론이죠.”
이에 하린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아아.
마치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일제히 날아오르듯.
하린의 금색 머리칼이 떠오르며, 사방으로 금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신성력은 밝고도 따스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휘감은 붉은 입자.
이클레아의 힘이었다.
이어서 금빛과 붉은 입자가 한 데 섞여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메마른 황야를 타고.
눈부신 빛기둥이 솟구쳤다.
그대로 솟아난 빛기둥은 키메라는 물론.
어두운 검은 하늘을 가르고 뻗어져나갔다.
그렇게 빛기둥이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파아앗!
빛기둥이 날개를 펼치며, 하린의 신성력과 이클레아의 방대한 마력이 유성우처럼 붉고 환한 꼬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별빛이 내리는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
[끼에에에엑!!!]
이에 빛이 닿자마자, 주변의 키메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처절한 비명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마력이 뒤섞인 빛은 가차 없이 키메라들의 육체를 불태웠다.
-푸스스.
그런 빛 무리 아래,
하얀 재가 눈처럼 내려왔다.
이에 어느새 눈앞을 가로막았던 수천의 키메라 군단 사이로, 길이 뚫렸다.
무엇보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엘카인의 모습.
동시에 그 순간.
-펄럭!
알레시아가 날개를 펼치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선과 수연, 레이첼과 시연. 그리고 하린과 이클레아까지.
“…….”
더 이상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그대로 현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단호한 현성의 한 마디.
그와 함께 알레시아의 날개 끝에 머무르던 바람이 사방으로 폭발하며,
그녀와 현성이 엘카인을 향해 쏘아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