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종막(9)
전장에 남은 인간들의 정리.
이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 그랬었지.
엘카인이 그에게 맡긴 일이었다.
현성이 방금 전까지 전장에 남아있던 이유 또한 그 때문.
“……예,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대로 현성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그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펼치며 미간을 좁혔다.
전장에서부터, 당장 지금도.
마치 기억의 필름이 잘려나간 듯,
그간의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발 뒤늦게 기억들이 떠오르곤 하였다.
아니 떠올랐다기보다는 기억이 억지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맴돌았다.
-사아아.
처음에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던 기시감은,
어느덧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설마 이제 와서 엘카인의 밑으로 들어간 것에 회의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허나 그것도 잠깐.
그럴 리가 없지.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냈다.
며칠 밤낮 동안 전장을 배회하다 보니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것이 회의감이든, 후회든.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간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애를 쓰든 결과는 진즉에 정해져있었다.
그래, 제 마음대로 엔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글러먹은 생각이었다.
“…….”
내 까짓게 얼마나 노력한다 한들,
히로인이 전부 죽은 세계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남지 않았으며,
그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다.
그가 엘카인으로 밑으로 들어간 이유 또한 그랬다.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상,
마족을 택하건 인간을 택하건 딱히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그저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고,
하린과 레이첼을 죽인 아카데미를 박살낼 기회를 제공한 게 엘카인이었기에.
현성은 마족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대로 엘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어서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잘했다.]
“…….”
[내가 말했지 않느냐.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거라고.]
엘카인이 무릎을 꿇은 현성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실제로 그가 이끈 마족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의 뜻에 반대하던 인간들은 전부 죽었다.
결과적으로는 현성 그 또한 마족을 택했기에, 엘카인을 따랐기에,
이렇게 살아남아 힘과 권력을 얻은 셈이었다.
마계의 제 1군단장이라는 위치와,
그 휘하에 있는 수백의 병력들까지.
다시는 그 누구도 현성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갈 수 없었다.
비록 그게 모든 걸 잃어버린 후의 결과라고 한들.
앞으로는 잃을 일도, 잃을 것도 없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삶이라 한들.
현성에게서는 일말의 원망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곧 인간계와 마계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그토록 추구하던 이상향이 펼쳐질 터.]
그런 엘카인의 말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허(空虛). 검은 하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의 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공허가 땅 위를 전부 뒤덮는 순간.
인간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전장의 잔향도, 폐허도 전부 없어질 것이다.
그럼 지금 온 몸을 뒤덮은 원인 모를 기시감도 사라지겠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런 그의 눈앞에는 엘카인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대로 그가 말했다.
[내 손을 잡아라.]
“…….”
[그렇다면 이것으로 그간 네가 고른 잘못된 선택들이 전부 올바른 결과를 맞이할 터이니.]
이에 현성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플레이어를 향해 손을 뻗는 엘카인.
분명 본 적 있는 연출이었다.
플레이어가 마족을 택했을 때,
마지막으로 나오는 엔딩씬이었다.
이걸로 전부 끝이다.
곧 현성이 천천히 엘카인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돌연 현성의 목에 있던 목걸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빛바랜 목걸이.
그건 다름 아닌 기사단의 무덤에서 데이몬드가 건네준 목걸이였다.
그 사용처는 와이번의 둥지에 있는 기사단들을 이끌기 위한 것.
허나 지금 이곳에서,
목걸이의 숨겨진 효과가 발동되었다.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데이몬드의 목걸이가 발동합니다.]
[그 효과로 의지가 +10 상승합니다.]
엘카인이 데이몬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듯이,
그 역시 엘카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만큼 데이몬드는 현성에게 목걸이를 건네주며, 그의 정신계 공격 : 무저갱에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방금 현성의 눈앞에 떠오른 의지 스텟의 10 상승.
이걸로 무저갱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효과를 넣은 이유는 간단했다.
현성 그라면 분명 가능할 테니까.
동시에 데이몬드가 노렸던,
마지막 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의지 스텟 100을 달성하였습니다.]
[한계를 넘은 노력의 대가로 특수버프가 부여됩니다.]
[특수버프 : 강인한 정신]
특수버프.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총 5개의 스텟 중, 하나가 최대치 100에 달성했을 때.
플레이어에게는 부여되는 버프로.
현성의 기존 의지 스텟은 딱 99.
헌데 여기서 방금 전 데이몬드의 목걸이가 발동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의지 스텟이 100을 넘어갔다.
그 결과, 보다시피 강인한 정신이라는 특수버프가 발동한 것이며,
그 효과는 1회에 한하여,
모든 정신계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것.
-삐이이이!
그에 따라 날카로운 이명이 현성의 귓가를 찔렀다.
이에 현성이 미간을 구기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동시에 어지럽게 뒤섞이는 기억들.
선천강, 불의 둥지, 피의 왕국.
여왕의 궁전, 블랙마켓, 기사단의 무덤.
과거, 현재. 미래할 것 없이 온갖 기억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아니 뒤섞이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현성은 아카데미에서 사룡 카이락스를 쓰러트림으로써 하린을 구해냈고,
불의 둥지에서 크루페돈을 격퇴하여 시연을 지켜냈다.
피의 왕국에서는 알케르도를 꺾으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격을 증명했으며,
여왕의 둥지에서 보란 듯이 도플갱어 퀸을 쓰러트렸다.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전부 살려냈다.
이 모든 건 다름 아닌 현성 그가 이룬 업적들.
그리고 이명이 멎었을 때.
-사아아.
줄곧 그의 몸을 감싸던 원인을 알 수 없던 기시감이 사라졌다.
필름이 잘려나간 것 같았던,
그간의 기억들이 전부 돌아왔다.
-띠링.
이를 증명하듯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현성의 눈앞을 타고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강인한 정신의 효과로 플레이어에게 부여되어 있던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유현성의 기억이 전부 돌아옵니다.]
[당신의 목적은 거짓된 공간에서 증거를 찾아 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성이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의 행동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현성이 엘카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터업!
그런 현성의 행동에 엘카인이 움찔거리며 재빨리 그의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꾸구국, 그럴수록 현성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힘이 강해졌다.
“……방금 전 그랬지?”
그대로 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내가 고른 잘못된 선택들이 전부 올바른 결과를 맞이할 거라고.”
[다, 당장 이 손을 놓지 못할까!]
이에 엘카인이 그를 향해 일갈했지만,
더 이상 무저갱을 자각한 현성에게 있어 그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없었다.
“근데 ‘잘못된 선택’이라니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하더라고.”
[……뭐?]
그렇게 엘카인이 미간을 좁힌 그때.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야 내 선택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화르륵!
그와 함께 현성의 오른팔을 따라 불꽃이 타오르더니,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카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그대로 폭발하는 붉은 화염.
무엇보다 그 사이.
마치 유리가 박살나는 것처럼,
허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티디딕…!
그리고 현성이 조소를 날리며 입을 연 순간.
“그럼 현실에서 보자고.”
-챙강!!
그의 눈앞은 물론이며,
주변의 공간 전체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현성의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다름 아닌.
[네놈!!]
황급히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채,
분노에 섞인 외침을 토해내는 엘카인의 모습이었다.
[플레이어 유현성이 목표를 달성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무저갱이 붕괴됩니다.]
[잠시 후, 현실로 복귀합니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부신 빛 무리가 걷히고 현성의 주변에 보인 건 메마른 황야의 전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바로 앞에 있는 기괴한 눈동자와 엘카인.
무저갱에 당하기 전, 그가 본 모습과 모든 게 똑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무사히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
“오랜만이지?”
-철컥.
그대로 현성이 자신의 스태프를 부여잡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느새 그런 양 손에는 하얀 망치가 들려있었다.
이어서 무저갱 속 환상에서처럼, 현성의 팔을 따라 붉은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른 그때.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넘실거리는 불꽃이 엘카인을 집어삼켰다.
이에 엘카인이 재빨리 손을 휘저으며 사방으로 마기를 방출시켰으나,
그의 대처가 한 발 늦었다.
-치이익…!
그대로 저 멀리 밀려난 엘카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엘카인이 이를 갈며 재차 손을 펼쳤다.
-으드득!
눈앞의 현성이 무저갱을 박살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
전장의 다른 이들은 여전히 환상 속에 빠져있었다.
곧바로 엘카인이 양 손을 뻗으며 검은 마법진을 펼쳤다.
그에 따라 다시금 움직이는 커다란 눈동자.
무저갱에 빠진 존재들을 전부 죽여 버릴 셈이었다.
[결국에는 환상과 현실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알려주마!!]
그런 엘카인의 외침과 동시에 눈동자에서 검은 빛이 터져 나왔다.
아니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현성이 히죽 웃으며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저갱.
2페이즈에 돌입하면 엘카인이 쓰는 필살기로,
이 공격에는 회피 불가 상태가 부여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이를 막을 수 없다.
방금 전 현성이 그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최초 1회에 한하는 경우.
2회부터는 말이 달랐다.
이어서 현성의 손에 딸려 나온 건 다름 아닌 길쭉한 마족의 뿔.
정확히는 엘카인의 수하였던 이키펠의 뿔이었다.
동시에 현성의 앞에 떠오른 설명창.
[환영의 지휘자 이키펠의 뿔]
[등급 : 유니크]
설명 : 환영의 지휘자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마족, 이키펠의 뿔이다. 이를 사용할 경우, 1회에 한하여 유령극단을 소환할 수 있다.
정신계 공격에는 정신계 공격으로,
이것이 2번째 무저갱을 막아내기 위해 현성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이키펠의 뿔을 움켜쥐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콰아아아아!!
이에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뿔을 사용하기 무섭게,
과거 아카데미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얼굴 없는 유령극단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끼기긱…!
찢어지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시작으로 메마른 황야 가득 극단의 연주가 울려 펴졌다.
그렇게 퍼져나가는 선율과 무저갱의 빛 무리가 격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콰아아아앙!
팽팽한 힘겨루기 끝에 무저갱의 빛 무리가 소멸하며 자욱한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흙먼지가 가라앉은 직후.
엘카인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한 자루의 창을 들고 있는 현성이었다.
“더스트 스톰(dust storm).”
그대로 현성의 말과 함께,
창끝에 모여 있던 모래먼지가 거세게 몰아치며 커다란 눈동자를 향해 쏘아졌다.
그렇게 쏘아진 창이 눈동자를 꿰뚫으며, 몰아치는 모래폭풍이 말 그대로 눈동자를 갈아버렸다.
-콰드드드득!!
이걸로 더 이상 무저갱은 사용 불가능.
동시에 현성이 자신이 들고 있는 길쭉한 뿔을 가리키고는,
엘카인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야. 니 부하 뿔 쩔더라?”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