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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225화 (225/240)

225화 종막(8)

무저갱.

정신계 공격 중의 하나로,

<이스페리아>의 최종보스 엘카인이 2페이즈에 돌입하면 사용하는 필살기였다.

그리고 이 공격은 회피 불가 상태가 부여된다.

즉, 플레이어 입장에서 무저갱은 무슨 짓거리를 하더라도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이 시스템은 유저들의 큰 반발을 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해당 스킬 무저갱의 연출이 꽤나 괜찮았기 때문이다.

본디 게임을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질 좋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충분히 제공된다면 불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무저갱이라는 스킬이 그랬다.

무저갱은 정신계 공격이었지만, 그동안의 여타 정신계 공격과는 확연히 다른 연출을 보여주었다.

바로 if 엔딩.

우선 <이스페리아>는 플레이어의 선택과 분기점에 따라 스토리가 갈리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튜토리얼에서 유하린을 구해내는 전개가 그랬으며,

뱀파이어 레이첼을 히로인 루트로 편입시킬 것인지, 아니면 보스로서 상대할지 선택하는 전개가 그랬다.

그리고 반인반마의 피를 가진 주인공 유진이 인간과 마족진영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지까지.

이처럼 <이스페리아>는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며 그에 따라 다른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령 A와 B 두 개의 선택지 중 A를 택할 경우,

플레이어는 A에 해당하는 전개밖에 볼 수 없다.

당연한 서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물론 자신의 선택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보지 못한 B의 전개에 궁금증을 가지기 마련.

이에 <이스페리아>는 최종보스 엘카인 전에서 A를 택한 플레이어들도 B전개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준비했다.

이게 바로 앞서 말한 if 엔딩.

한 마디로 다른 선택지를 택했다면 벌어졌을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만약 레이첼을 보스로 상대했다면?

만약 인간 진영이 아니라 마족 진영을 택했다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무저갱은 단순히 정신계 공격이 아닌,

이런 만약의 선택에 따른 스토리를 보여주는 일종의 이벤트 씬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이 공간이 현실이 아닌 거짓인 걸 나타내는 증거들을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

이런 특이한 방식덕분에 무저갱은 회피 불가 상태가 부여된 무지막지한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다.

동시에 과거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던 현성 역시도 그랬다.

그도 그럴게 한 번 선택하면 다른 전개를 볼 수 없도록 고정이 되는 스토리를,

다른 전개도 볼 수 있도록 만든 유저 편의적 시스템 아닌가.

거기다 이곳이 거짓 공간이라는 증거를 찾아내는 방식도 꽤 재미있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현성은 이미 여러 번 무저갱을 경험해본만큼,

그 증거를 찾아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2페이즈는 현성에게 있어 일종의 개꿀패턴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현성에게 있어 이곳은 게임이지만 동시에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현성은 등장인물 유현성에게 빙의된 상태.

그리고 이 모든 게 겹쳐 발생한 변수는 다름 아닌,

[경고. 등장인물 유현성과의 동조율이 너무 높습니다.]

[경고.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경고. 등장인물 유현성의 일부 기억이 손상되었습니다.]

현성이 무저갱에 당해 거짓공간에 빠진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본디 정상적인 플레이어라면 이럴 경우가 없었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는 어디까지나 유진을 ‘플레이’할 뿐,

진짜로 유진 그 자체가 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저갱에 당한 캐릭터 유진은 자신이 무저갱에 당해 거짓공간에 빠졌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캐릭터 유진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캐릭터가 죽는다고 실제 유저가 죽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결국에는 캐릭터는 데이터이며,

유저는 현실에서 캐릭터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뿐이지 않는가.

해당 캐릭터에 몰입하여 간접체험을 경험한다.

이게 게임의 기능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현실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던 유저가 말 그대로 캐릭터에 빙의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로 인해 캐릭터가 죽는다면, 빙의한 자신 역시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게임은 더 이상 간접체험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인 직접체험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페리아>에서 무저갱에 당한 대상은 당연히 자신이 무저갱에 당했는지,

이곳이 거짓 공간인지 자각하지 못한다.

무저갱은 대상을 영원히 환각 속에 빠트려버리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결과.

무저갱에 당한 현성은,

이곳이 거짓된 공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캐릭터가 무저갱에 빠집니다.]

[그에 따라 if 엔딩 : 마족진영을 택한 경우가 전개됩니다.]

[당신의 목적은 거짓된 공간에서 증거를 찾아 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 * * * *

-사아아.

메마른 황야 한 가운데.

흑발의 소년이 서있었다.

그대로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주변을 관망했다.

“…….”

주변에는 그저 시체와 그 시체에서 흘러내린 핏물만이 가득했다.

한때 살아 움직이던 것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전투가 끝난 전쟁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함성소리도,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처절한 비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 줌의 생명도 남지 않는 전장은 비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까악, 까악.

가슴팍에 창이 관통당해 사망한 시체 위.

까마귀들이 부러진 창대를 횃대삼아 앉아있었다.

그 중에서는 이미 죽은 시체 사이를 오가며 썩은 살점을 뜯어먹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대로 흑발의 소년이 앞으로 발을 내딛자,

찰박, 핏물이 튀어 오르며 까마귀들이 날개를 펼쳤다.

동시에 저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현성님. 여기 계셨군요.”

그 목소리에 현성이라 불린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검을 들고 있는 한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길쭉한 뿔이 솟아있었다.

무엇보다도 검게 물든 역안.

마족의 증거였다.

그대로 그가 현성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엘카인님이 찾으십니다.”

엘카인?

이에 현성이 잠시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었더라.

“…….”

그대로 현성이 자신의 몸을 살폈다.

몸 곳곳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양손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가볍게 손을 쥐었다 펼치자,

사아아, 검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런 현성의 모습에 마족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성님?”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랬었지.

인간과 마족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엘카인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그 전장에는 현성 그 역시도 존재했다.

그리고 전쟁은 마족의 승리.

딱히 이상할 건 아니었다.

애초에 병력 차는 마족이 압도적이었으니까.

이에 결과적으로,

마족진영을 택한 현성의 판단은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그대로 그가 마족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카인님이 찾는다고 했나?”

“예.”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가도록하지.”

그와 함께 현성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꽤나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여전히 시체로 가득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곳에서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런 현성의 앞에는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죽음을 맞이한 금발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제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장, 미하일이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마족의 병사가 말했다.

“……인간진영의 수장이군요. 아, 그러고 보니 현성님도 과거에는 이 자와 인연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랬었지.”

현성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인간진영 편에 서서 해피엔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시계탑.

그곳에서 하린이 죽은 날 이후로,

현성은 그게 전부 헛된 희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그토록 믿었던 친구와 교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폭주한 반인반마의 피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약에 조금만, 조금만 더 내가 빨랐다면 살릴 수 있었을까.

현성이 그날을 회상하며 주먹을 쥐었다.

“…….”

허나 그도 잠시 뒤.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없었다.

현성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에는 다 죽음을 맞이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 시점에 남은 히로인은 아무도 없지 않았는가.

하시연은 폭주한 불의 악마 크루페돈에 의해 사망했다.

레이첼은 뱀파이어인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고,

아카데미 침공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눈앞에서 처형당했다.

이클레아는 여왕의 궁전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도플갱어 퀸을 봉인시켰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시계탑에서 하린이 현성의 품에 안겨 죽은 그 날.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마족이 승리를 거둔 전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차라리 이런 분기점도 나쁘지 않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현성이 마족의 본거지에 다다랐다.

-처억.

그와 함께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마족들이 일제히 현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1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이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마족 무리 사이, 한 녀석이 현성을 향해 걸어왔다.

-스윽.

그대로 그가 현성을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까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그 말에 현성이 녀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분명 제 2군단장의 아래에 있던 병사였던가.

현성이 어렴풋이 그를 기억해냈다.

“…….”

아마 전부터 유독 현성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자였을 것이었다.

인간 주제에 마족진영에 붙은 것도 모자라,

다른 마족들을 제치고 군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꼽다는 이유였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자기보다 상관인 현성에게 예의를 표해야 함이 당연했으나,

그는 일부러 한 박자 늦게 인사를 하며 칭호를 생략했다.

“조금 늦으셨네요.”

“……그래서 불만인가?”

“아닙니다.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그런 그는 여전히 존댓말을 쓰고 있었으나,

비아냥거리는 말투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대로 그가 현성의 손에 묻은 피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전투는 괜찮으셨습니까?”

“무슨 의미지?”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메마른 황야 쪽을 향해 까닥 고갯짓을 하며 대답했다.

“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인간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죽이는 걸 망설이면 어쩌나 싶어서 말입니다.”

명백한 조롱.

그와 함께 곳곳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

-쉬익!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성이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오른쪽 눈에 박아 넣었다.

-콰직!

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에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부여잡았다.

“크아아아악!! 이런 망할…. 이게 갑자기 무슨…!”

그가 오른쪽 눈을 부여잡고 현성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업. 현성이 그의 목을 부여잡았다.

-꾸구국!

그대로 현성이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래 보이나?”

“컥, 커헉…. 그, 그게 무슨 말…….”

“아직도 내가 망설이는 걸로 보이냐고 물었다.”

“그, 그건…….”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

현성의 손을 타고 검은 마기가 일렁임과 동시에,

뚜두둑! 그의 목뼈가 꺾였다.

“끄르륵…, 커헉!”

그와 함께 발버둥 치던 그의 몸이 추욱 처졌다.

이에 현성이 휙 그를 던져버리고는,

옆에 있던 병사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치워.”

“……예?”

“못 들었나? 치우라고 했다.”

그런 현성의 말에 그가 화들짝 놀라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알겠습니다!”

곧바로 그가 목이 꺾여 죽은 녀석의 시체를 끌고 사라지고,

마족의 본거지.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하나 방금 전 꼴이 날까 두려워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한 주변을 타고 쩌저적,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라진 틈을 따라 누군가 걸어 나왔다.

-처억.

검게 물든 눈과 길게 자란 수염.

다름 아닌 그의 이름은 엘카인.

그대로 엘카인이 현성을 확인하고는 그를 반겼다.

[그래, 전장에 남은 인간들은 모두 정리하고 왔느냐.]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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