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종막(5)
어두운 하늘이 갈라지며, 그 주변으로 떨어지는 검은 파편들.
동시에 전장에 있는 모두가 숨죽이고 이를 지켜보았다.
그만큼 생전 처음 보는 그 풍경은 기괴하고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사아아.
어느 그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종말이 도래했음을.
“…….”
그건 전장 한가운데, 서있는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그가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주시했다.
<이스페리아>에서 보았던 컷씬과 똑같았다.
종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이미 손끝을 따라 느껴지는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지 오래.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진득한 살기가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갈라진 틈으로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물든 눈과 길게 자란 수염.
엘카인이 등장했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한줌의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이미 온 몸에 마기를 담고 있다는 증거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몬드처럼 마기에 잠식당한 광기도, 갈망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공허(空虛)그 자체.
그곳에는 이대로 끝이 없는 어둠에 빠져버릴 것만 같은 나락(奈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하선이 거세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안 돼…….”
지금이라도 전열을 후퇴시켜 재정비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머리와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공포에 잠식된 떨림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덜덜덜.
그리고 그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 사냥꾼이라는 이명의 암살자도,
검술명가 하 가문의 가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아니 이 전장에 있는 대부분이 그랬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터업, 현성이 하선을 포함한 모두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동시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용족만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패기로,
평소라면 상대를 압박하거나 제압할 때 쓰이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현성은 일부러 드래곤 피어를 주변에 방출시켜,
엘카인의 등장으로 인해 잠식된 공포를 밀어냈다.
“허억…!”
그와 함께 하선이 움찔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공포 때문에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허나 그도 잠시.
점차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되었다.
시연과 수연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대로 현성의 옆에 있던 알레시아가 금빛의 장막을 펼치며 말했다.
[파마(破魔)의 기운이 담긴 장막이다. 아마 이거라면 다시 마기에 짓눌리는 일은 없을 터.]
그러면서 그녀가 검은 하늘위에 모습을 드러낸 엘카인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기분 나쁜 기운이군.]
과거 기사단들과 마족에게 대항하여 최후의 전투를 치를 때와 같은 기운이었다.
물론 그때는 엘카인이라는 존재는 없었지만,
눈앞의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이 알려주는 바만큼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를 소멸시키지 못하면, 세상은 꼼짝없이 종말을 맞이한다.
지금 여기서, 그를 막아내야 한다.
이어서 알레시아가 현성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현성, 지휘를.]
“알고 있어.”
이에 현성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우선은 전장을 지배한 공포를 걷어내야 했다.
그와 함께 현성이 다시금 드래곤 피어를 펼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평정심을 잃지 말고 진형을 유지하라!]
전열을 후퇴시키고 재정비에 들어가는 건 그 다음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단 진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런 현성의 목소리가 효과를 발휘했다.
곳곳에서 뒤늦게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특히 가장 먼저 전열을 가다듬은 건 다름 아닌 하 가문의 검사들.
확실히 그동안 전장을 누비며 실전경험이 쌓여있던 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전부 진형을 유지하며 방어진을 펼쳐라!”
그대로 이어진 진태의 명령까지.
곧바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 가문의 검사들이 체계적으로 진형을 갖추었다.
하지만 전장에는 항상 예기치 못한 변수가 존재하는 법.
“저, 저게 무슨…….”
미하일과 이클레아를 주축으로 모여 있는 마법사 진형 측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성의 드래곤 피어로 인해 몸의 자유는 돌아왔으나,
방금 전까지 엘카인의 공포에 짓눌렸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중에는 도리어 그 경험이 더 큰 공포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마법사들은 대다수가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기 보다는 주로 마탑에서 연구를 하던 게 대부분.
상대적으로 실전경험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리고 공포는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일으켰다.
그대로 마법사 중 하나가 겁에 질려 반사적으로 공격마법을 펼치며 외쳤다.
“주, 죽어라, 망할 마족새끼야!!”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뱀에게 공격하듯,
공포에 잔뜩 질린, 발악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이어서 붉은 화염구가 엘카인을 향해 쏘아졌다.
-쉬이익…. 콰아앙!!
곧바로 엘카인에게 직격한 파이어볼이 폭발하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
이에 이클레아가 이를 으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저런 멍청한……!”
엘카인이 등장할 경우, 진영을 재정비하여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사전에 계속해서 설명했던 전략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공격으로 애써 준비한 전략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제기랄! 당장 뒤로 물러…….”
그와 함께 이클레아가 후퇴를 명령한 순간이었다.
찌릿! 그녀의 오감이 일제히 경고를 보냈다.
동시에 신수, 로미가 황급히 외쳤다.
[이클레아! 피해!]
-고오오!
그렇게 로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욱한 연기 너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엘카인의 한마디.
[재미있군.]
그대로 엘카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거창한 마법도, 마기를 끌어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을 휘저은 게 전부였다.
-쩌저적…!
그 시작은 작은 파열음이었다.
마치 유리잔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
하지만 그 다음 벌어진 광경은.
-콰드드드득!!
공간이 찢겨 갈라지는 모습이었다.
그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사라졌다.
-스으으.
그리고 잠시 뒤.
엘카인이 손짓한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마법사도, 시체도, 그 무엇도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오직 메마른 바람 뿐.
그 모습에 시연과 수연이 움찔거렸다.
방금 전 엘카인으로 손짓으로 인해 전체 마법사의 반에 다다르는 전력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게 무슨…….”
“마법사들이… 사라졌어?”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사라진 게 아니야. 공간채로 소멸시킨 거지.”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다.
지금의 전개상, 종막에 등장하는 엘카인은 이미 공간의 악마 레이아의 능력을 완전히 흡수한 상태.
그에 따라 그는 공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마계와 인간계의 문을 연 것이 그랬으며, 그가 등장할 때 갈라진 하늘 역시도 그 증거였다.
그리고 방금 전 마법사들이 손짓한번에 소멸한 것도 마찬가지.
“이런 망할…….”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주먹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손짓한번에 마법사들의 반이 소멸하다니.
저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안 되는 건 지금부터 그들이 이런 엘카인을 상대하고,
끝내 쓰러트려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등장하기 전,
그러니까 제1진과 2진의 공격에 이어 하 가문이 합세할 때만해도 정말로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엘카인이 등장하고 불과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런 그녀의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그와 함께 하선이 줄곧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카인을 상대로는 절대 이기지 못해.
그 당시에는 그저 마족을 믿는 광신도의 허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그녀는 과거 10년 전, 대변동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하나였으니까.
그만큼 이번에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이클레아가 저 멀리 엘카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기껏 떨쳐낸 공포가, 다시금 스멀스멀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어느 누가 방금 전의 광경을 두 눈으로 목도(目睹)하고도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이,
엘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윽.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하선과 현성이 있는 방향.
기어코 마족이 아닌 인간을 택한 어리석은 배신자와,
여왕의 궁전과 블랙마켓,
거기다 아카데미와 기사단의 무덤까지.
끝까지 모든 걸 방해하며 눈에 거슬리던 녀석이 있는 곳이었다.
[그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며 죽어라.]
그대로 엘카인이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이 손을 뻗었다.
쩌저적,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불길한 소리.
방금 전과 같은 파열음이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현성 역시 공간채로 소멸당하는 최후를 맞이할 터.
이에 이클레아가 황급히 현성을 향해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려는 찰나였다.
-덥썩.
미하일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그의 만류에 이클레아가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당장 이거 놔요! 어차피 이대로면……!”
현재 가장 큰 전력은 바로 현성.
이렇게 허무하게 그가 죽는다면 어차피 전쟁은 패배할 게 분명했다.
그만큼 어떻게든 현성의 죽음만은 막아야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 군을 믿어보게.”
미하일의 단호한 한마디.
그 말에 이클레아가 멈칫거렸다.
“그게 무슨…….”
그러면서 그녀가 저 멀리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전장을 주시할 뿐.
항상 저 눈이었다.
여왕의 궁전에서도, 아카데미에서 사룡 카이락스를 막아냈을 때도,
현성은 보란 듯이 상황을 역전시켰다.
“자네는 저게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가?”
“…….”
“난 아닌 거 같네만.”
그런 미하일의 물음에 이클레아가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말대로, 현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하는 건.
‘……그런 현성을 믿는 것 뿐.’
그래,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현성이라면 언제나처럼,
반드시 상황을 역전시킬 거라고.
* * * * *
그대로 하선이 초조한 눈빛으로 엘카인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자신이 막아낸다면 현성만은 살릴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죽는 것 따위는 몇 번이든, 수백 번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동생을 살릴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끝날 수밖에 없는 건가.
하선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처억.
돌연 현성이 하선의 앞을 막아섰다.
“……현성?”
그대로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누나, 저번에 말했었지?”
“…….”
”내가 누나를 지키겠다고. 그러니까.”
곧바로 현성이 수호의 반지를 끼고 있는 하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를 믿고 옆에서 지켜봐줘.”
그와 동시에 다시금 엘카인이 손을 휘젓자,
마법사들을 소멸시킨 그때의 빛이 현성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소멸의 빛이 그에게 닿기 직전.
-히죽.
하선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작게 조소하고 있는 현성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