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종막(2)
메마른 황야.
그곳에는 과거 문명이 자리했던 잔재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말로는 먼 옛날 폐허가 된 도시.
동시에 이곳이 바로 두 달 전,
하선이 말한 엘카인이 모습을 드러낼 결전의 장소였다.
이를 증명하듯 그곳에는 수백, 아니 수만의 병력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곳인가.”
병력의 선두에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무겁게 가라앉은 주변의 공기.
중력마법의 증거였다.
그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의 교장이자,
대마법사의 제자라 불리는 자.
미하일이었다.
그리고 그 등 뒤에 자리한 수많은 마법사들.
전부 미하일의 부탁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 하나하나가 최소 4써클 이상의 마법사인 만큼.
그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따라, 푸른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대로 미하일의 옆에 있던 붉은 머리의 교수,
이클레아가 메마른 황야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용하기 그지없네요.”
그녀의 말대로 눈앞의 황야는 이제 곧 인류의 존망을 둔 전투가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특별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이곳이 예전에 도시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낡은 잔재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미하일을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억.
“위대한 대마법사의 제자, 미하일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으며,
가슴팍에는 하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그와 함께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이하였다.
“간만에 뵙는군요. 진태님.”
회색 머리칼의 검사.
그런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깊이를 짐작해주는 깊은 주름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양 손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평생을 검을 쥐고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증거.
그의 이름은 하진태.
하 가문을 이끄는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전 가주가 맞는 말이었다.
현재 그는 가주자리를 자신의 딸, 시연에게 넘겨주었으니 말이다.
그대로 미하일과 짧은 인사를 나눈 진태가 이번에는 이클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웅님도 오래만이군요. 아마 그때 대변동 이후로 처음 보는 거니 말입니다.”
“……아, 예. 그, 그렇죠.”
이에 이클레아가 잠시 움찔거렸다.
10년, 대변동.
그러니까 한창 그녀가 매지컬 레드로 활동하던 시절.
진태 역시도 그녀와 같은 전장에 속해있었다.
그만큼 그가 이클레아, 아니 매지컬 레드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 전설적인 영웅이 사실 아카데미의 교수였다니.
“그동안 아카데미에 계셨다니 전혀 몰랐습니다.”
“하하….”
그 말에 이클레아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야 그동안은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겨왔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간의 노력은 이미 카이락스 사태 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지 오래.
“…….”
이클레아가 차오르는 눈물을 씹어 삼키며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허나 그 속을 알 턱이 없는 진태는 작게 웃으며,
미하일과 이클레아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두 분과 함께 한다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진심이 담긴 진태의 한 마디.
이에 이클레아가 흘깃 미하일과 그를 번갈아보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진태와 미하일, 이클레아가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갔다.
먼저 진태가 미하일의 뒤에 있는 수백의 병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마법사 단체와 아카데미의 병력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법사 단체에 속해있는 마법사들과 아카데미의 교수진.
그리고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의 가문들까지.
물론 그렇다고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 중에서 일부 병력은 현재 검은 탑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결전의 날 일주일 전,
하선의 말대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솟아난 검은 탑.
나머지 병력들은 전부 그곳에 있었다.
지금 이곳에 보이지 않는 엘프, 뱀파이어, 기사단 등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엘카인이 등장할 예정인 이 땅에 있는 병력은 현재 마법사 단체, 아카데미와 타 가문,
그리고 하 가문이 끝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다른 곳에 있는 연합들이 검은 탑을 무력화시키기 전까지,
본대를 막아내는 것.
그대로 미하일이 물었다.
“하 가문은 준비됐습니까.”
“예, 보다시피.”
미하일의 물음에 진태가 저 멀리 모여 있는 병력을 가리켰다.
직계파와 방계파를 가릴 것 없이,
현재 하 가문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검사들이었다.
“……믿음직스럽군요.”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법사들과 아카데미 연합, 검술명가 하 가문.
이들이라면 적어도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
“그럼 이걸로 본대를 상대할 병력은 다 모인 겁니까?”
“아뇨. 아직 하나가 남았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펄럭, 미하일과 진태가 서있는 땅을 따라,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그리고 곧 그들 앞에 착지한 것은 바로.
“다들 모여 있었군요.”
금빛의 드래곤과 흑발의 소년이었다.
알레시아와 현성의 등장.
이어서 그들의 뒤로 현성과 똑 닮은 흑발의 여성이 내려왔다.
“…….”
그 이름은 유하선.
현성의 누나이자, 이번 결전이 벌어질 장소를 알려준 장본인이었다.
그대로 그녀가 모인 병력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어딘가 두려움이 남아있는 하선의 눈빛.
과연 이만큼의 병력이 엘카인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옆에서 백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을 겁니다. 아가씨.”
하 가문의 유일한 메이드이자, 과거 10년 전, 대변동에서 마법사 사냥꾼이라는 이명을 가진 수연이었다.
곧 수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도련님이 있으니까요.”
“……그래.”
그리 말하는 하선과 수연의 시선이 현성에게로 향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미하일과 이클레아, 진태까지.
“마지막 가문까지 전부 도착했군요.”
미하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천천히 걸어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진태가 먼저 손을 뻗었다.
“……가주 취임식 이후로 처음이군.”
그대로 진태가 현성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승산이 있어 보이나.”
“…….”
그런 진태의 말에 현성이 방금 전 그의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모인 병력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네. 가능합니다.”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일반적인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플레이어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은 아카데미와 하 가문이 끝.
그에 따라 이대로 종막이 돌입할 경우.
까다로운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건 다름 아닌 검은 탑의 존재.
아카데미와 하 가문만으로도 본대를 상대하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탑이 발동함에 따라,
점점 강해지는 마족의 병력은 본 에피소드의 난이도를 상승시키는 주요원인이었다.
그래서 본대를 뚫고 엘카인에게 도달한 즈음엔 남은 병력이 거의 없게 된다.
덕분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엘카인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배드 엔딩을 마주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엘프, 뱀파이어, 기사단, 길드 연합, 매드독, 블랙하운드.
현재 검은 탑 주의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검은 탑을 무력화 시킬 수 있을 터.
이것만으로도 승률은 크게 상승한다.
아니 적어도 엘카인에게 도달하기 전에 전멸당하는 경우는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엘카인과 싸워 이길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확률은 반반.
“……정말 가능하다고 보는가?”
진태가 현성을 향해 재차 물어봤다.
그는 10년 전, 대변동 당시에 직접 싸웠던 만큼,
마족이라는 존재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쩌면 그때보다 더 강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자 현성이 메마른 황야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결국에는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지식을, 시간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태가 작게 웃었다.
결의가 느껴지는 현성의 대답.
그런 그의 모습에서 과거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와 함께 진태가 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그가 어깨를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에는 부딪혀봐야 알 사실. 그 믿음, 끝까지 잊지 말게나.”
그 말을 끝으로 진태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가문의 아이들에게 말해줄게 있거든.”
이에 미하일 역시 모인 병력들을 흘깃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네. 마법진도 확인할 겸 말이지. 그리고 하선이라고 했나?”
“…….”
“엘카인에 대한 정보를 더 듣고 싶은데 괜찮은가?”
그러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하선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현성에게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잡은 하선의 손을 끌었다.
“가죠. 아가씨.”
“……그러지.”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하나라도 승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현성에게 갈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미하일과 하선일행을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대화라면 교수인 그녀 역시도 빠져서는 안 될 거 같았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도 가봐야겠네.”
“그렇죠. 매지컬 레드가 빠지면 안 되죠.”
“…….”
그 말에 이클레아가 현성을 째려보았다.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아무튼 다녀오세요.”
“오냐.”
동시에 이클레아가 등을 돌리기 직전,
아무 말 없이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잠시 뒤.
이클레아가 현성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치지 마. 알겠지?”
그녀의 진심이 묻어나오는 한 마디.
그러자 현성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그렇게 현성이 대답하고 나서야,
이클레아가 작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이어서 그녀의 옆에서 언제 나온 건지 모르는 로미가 중얼거렸다.
“부끄러워하기는.”
“닥쳐.”
그 모습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사이좋은 듀오였다.
아무튼 이클레아마저 가고 알레시아와 현성만이 남은 자리.
[……여긴 오래만이구나.]
알레시아가 황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 옛날, 폐허가 된 도시.
알레시아는 그때 그날의 풍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바로,
과거 기사단과 마족이 결전을 치렀던 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다시 인류의 존망을 두고 마족과 대적해야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우연의 일치였다.
그런 그녀의 눈앞을 타고,
전장의 가운데서 치열하게 싸우던 기사들이 아른거렸다.
그 중에서도 은빛 건틀렛을 끼고 용감하게 선봉에 섰던 기사가 보였다.
그의 이름은 티리카.
기사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녀의 친우였다.
[현성, 나와 약속 하나 할 수 있겠는가.]
“……약속?”
그와 동시에 알레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죽지 말게나.]
그때, 그날의 티리카는 이제 그녀의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남은 건 현성 뿐.
더 이상 혼자 남겨지는 건 싫었다.
다시는 계약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러자 현성이 부드럽게 그녀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약속할게.”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메마른 황야.
그곳을 따라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사아아.
이에 알레시아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시작된다.]
과거 기사단과 마족이 결전을 치렀던 땅,
그곳의 이름은 이스페리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마지막 전장이 될 곳의 이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