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217화 (217/240)

217화 그 날의 약속(3)

그런 현성의 말에 하선이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커다랬다.

예전에는 상처도 막아주지 못하던 그 작은 손이, 어느새 이렇게나 컸다.

자신이 가문을 나가있던 동안,

현성 역시도 계속해서 성장해왔던 걸까.

“…….”

그대로 하선이 천천히 팔을 당겨,

현성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리 해도 동생은 못 이기겠네.”

그렇게 하선은 한참동안,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꼬옥

현성의 안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줄게.”

“…….”

“알케인의 계획에 대해.”

그대로 그녀가 손에 끼고 있는 수호의 반지를 작게 쥐었다.

“알케인이 침공을 시작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두 달 뒤. 그리고 침공이 시작됐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와 함께 하선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곳곳에 검은 탑이 등장할 테니까.”

동시에 그런 하선의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검은 탑.

그 또한 알고 있는 단어였다.

<이스페리아>의 최종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구조물로,

엘카인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탑이었다.

그리고 그 탑의 목적은 일종의 송신탑.

그대로 현성이 과거 최종 에피소드를 플레이할 당시의 컷씬을 떠올렸다.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입구를 여는 엘카인,

이어서 그 순간.

-콰아아!

곳곳에 솟아있는 검은 탑이 반응하며, 꼭대기를 타고 불길한 빛기둥이 쏘아졌다.

그대로 쏘아진 빛 무리는 하늘을 뒤덮고,

검붉은 하늘 아래, 마침내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차원문이 열린다.

그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온갖 언데드와 마수들의 모습은 신화 속에 나오는 아포칼립스의 재림을 연상케 하였으며,

그 모습을 본 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10년 전, 대변동의 재현이라고.

아무튼 그렇게 차원문이 열리기 무섭게 플레이어의 눈앞에는 하나의 퀘스트 창이 펼쳐진다.

그 퀘스트의 이름은 종막.

<이스페리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퀘스트였다.

여기서 플레이어의 목적은 당연히 엘카인의 저지.

동시에 이는 지금부터 두 달 뒤.

현성이 마주하게 될 내용이었다.

그대로 그가 주먹을 꾹 쥐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스페리아>는 앵간해서는 1회 차에 해피엔딩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해피엔딩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총 두 가지.

우선 튜토리얼에서 하린을 구해내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최종장 이후 숨겨진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에피소드의 배경은 다름 아닌 마계.

‘……하지만 마계 에피소드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노말엔딩을 한 번 봐야한다.’

왜냐하면 마계로 가기 위해서는 엘카인이 인간계와 마계를 이은 차원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옥같은 방식 덕분에.

앞서 말했듯이 플레이어는 1회차에 해피엔딩을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허나 <이스페리아>에 표류하고 있는 현성에게 허락된 기회는 단 한 번.

그는 이번 한 번의 기회에 해피엔딩을 만들어내야 했다.

원 코인 해피엔딩.

이것이 그의 마지막 숙제이자,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작게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개 같은 제작사 같으니…….”

“응? 뭐라고 했어. 현성아?”

“아, 아니야. 아무것도.”

이에 현성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하선의 말에 따르면, 현성에게 허락된 시간은 앞으로 두 달.

그만큼 현성은 두 달 안에 원 코인 해피엔딩을 만들 준비를 끝마쳐야했다.

그리고 우선 다행히도 이미 튜토리얼에서 하선을 구해냈으니,

첫 번째 조건은 달성한 상태.

또한 두 번째 조건은 마계의 문이 열리지 않은 지금,

그 조건을 알고 있다 한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현성의 계획대로라면,

어쩌면 두 번째 조건 없이, 그러니까 마계를 가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그대로 그가 품속에 있는 일기장을 매만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하성에서 데이몬드가 건네준 일기장.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가지.

‘……세력의 규합.’

엘카인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그에 대항할 세력들을 모아야했다.

실제로 이는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으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세력들은 전부 지금껏 플레이어가 에피소드를 진행하며 등장했던 자들로 구성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모을 수 있는 세력은 아카데미와 하 가문이었다.

겨우 이것밖에 안되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아카데미에는 미하일을 포함한 교수들과 아카데미에 속한 학생들의 가문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 수는 꽤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동안 플레이어가 어떻게 해왔느냐에 따라 추가되는 세력들까지.’

현성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일단 여기서 레이첼을 히로인루트로 편입시키면서 뱀파이어 세력이 추가된다.

거기다 청화길드를 필두로 한 다른 길드의 세력도 추가.

그 밖에도 데이몬드의 히든 이벤트로 인한 와이번의 둥지에 있는 기사단.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성녀 유하린.

당장 말할 수 있는 것만 이 정도였다.

하지만 현성은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주어진 기회가 한 번 뿐인 이상.

현성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패를 쏟아 부을 생각이었다.

‘매드독과 블랙하운드.’

매드독은 무력으로 협박하면 그만이고,

블랙하운드는 수연이 있으니 큰 걱정 없었다.

‘무엇보다 블랙마켓에서 알레시아를 구하면서 만났던 엘프족 전사, 실비아라고 했던가.’

현성이 그녀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구해준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

현성은 이를 빌미로 엘프족에게도 증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아마 실비아를 구해준 은혜에다가, 엘프라는 종족자체가 마족을 반갑게 여길 리 없으니 이 부분 역시도 쉽게 풀릴 터였다.

‘정 안되면 알레시아에게 맡기면 되니까.’

골드 드래곤이 직접 도움을 청하는데 설마 그걸 안 받아들이고 배기겠는가.

하여간 이렇게 세력을 모을 방법은 구상해뒀으니,

이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됐다.

‘두 달 안에 다 모으려면……, 꽤나 아슬아슬하겠군.’

그대로 현성이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선의 정보는 계속되었다.

마족의 병력들과 규모.

그에 대한 부분은 다행히 현성이 알고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알고 싶은, 알아야했던 정보는 바로 침공날짜였으니,

이를 안 이상, 제일 불안했던 변수는 차단한 셈이었다.

“이걸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끝이야.”

그와 함께 마침내 하선의 설명이 끝나고,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세력을 모아야지.”

“그럼 언제부터 움직이게?”

그런 하선의 물음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그대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미하일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보를 알리고,

시연이나 레이첼에게도 상황을 알려야했다.

“……현성. 쉽지 않을 거야.”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난 찰나.

하선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등을 돌려 하선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한 건 반드시 지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등은,

하선의 생각보다 훨씬 커다랬다.

“응, 믿을게. 내 동생.”

그대로 하선이 현성을 향해 싱긋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말한 대로 현성은 미하일과 아카데미의 교수들,

그리고 하린, 시연, 레이첼에게 하선이 말한 정보를 공유했다.

마족의 침공.

이에 아카데미는 모든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그 내용은 자연스레 그들의 가문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미하일이 공식적으로 마족침공을 발표하면서 마법사 단체는 물론,

여러 집단에게 지금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다른 집단들은 처음에는 이를 의심했지만,

아카데미에서 사룡 카이락스의 침공과 그에 따른 마족의 활동을 제시하면서 여론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대로 마족침공은 기정사실화 되며,

미하일을 중심으로 다른 집단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일주일.

그 다음에는 시연의 명에 따라 하 가문이 움직였다.

아카데미를 따라 마족침공에 대비하겠다는 입장발표.

이에 다른 가문들 역시 하나 둘씩 본격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 중에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문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하 가문과 뜻을 같이 했다.

물론 뜻을 같이 한 가문들 전부가 순수한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이번 기회에 유명가문들과 연결점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가문도 존재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결국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엘카인과 대항하는 세력은 늘어날수록 좋았으니까.’

그 다음에는 길드연합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현성이 화연에게 무기의 개조를 부탁함과 동시에 마족침공 사실을 알린 이후였다.

그 소식에 청화길드는 곧바로 길드회의를 소집했으며,

타 길드마스터들인 모인 자리에서 연합을 제의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길드 대부분은 10년 전 대변동 당시부터 활동하던 헌터들이 주축을 이뤄 만들어진 세력인 만큼.

그들은 별다른 이견 없이 연합결성을 찬성하며 10년 전, 끔찍한 악몽을 막아내겠다는 대의(大義) 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게 청화길드를 주축으로 엘더란과 그 외의 유명길드 모인 길드연합.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뱀파이어 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거기다 마족침공에서 인간들의 편에 서겠다는 발언까지.

그동안 인간들의 눈을 피해왔던 뱀파이어족의 이례적인 등장.

이로 인해 당분간 세간이 떠들썩했다.

과연 이들을 믿어도 되는지부터 급한 대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입장이 오가며,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의 왕국은 단 한 번의 발언으로 이 모든 논란을 종식시켰다.

우린 인간을 믿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 종족을 피의 저주에서 해방시켜준 단 한 사람, 그의 부탁을 따를 뿐이라고.

‘처음에는 이게 먹힐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결과는 대성공.

그동안 줄곧 모습을 감춰왔던 피의 왕국의 수장.

임플과 란트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점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거기다 대마법사의 제자, 미하일의 보증까지.’

사실 이 부분은 현성이 설득시킨 것에 가까웠으나 어찌되었든 상황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었다.

여기까지가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다음은 현성이 직접 나섰다.

와이번의 둥지에 있던 기사단과 엘프,

매드독까지.

기사단에게는 데이몬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목걸이를 증표로 보여주었다.

애초에 현성은 티리카의 후예.

기사단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족을 쓰러트리겠다는 사명아래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서 엘프족에게는 알레시아를 앞세워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 협조를 얻는데 성공.’

아마 인간들과 같이 갔으면 거절당했을 수도 있겠지만 현성과 알레시아 단 둘이서 간 덕에,

그들은 티리카의 후예와 골드 드래곤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었다.

거기다 실비아의 약속도 있었으니 그들을 연합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큰 문제없었다.

‘기사단과 엘프. 둘 다 마족이라면 어떻게든 막아야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던 것도 큰 도움이었고.’

그렇다면 매드독은?

매드독은 사실 제일 간단했다.

현성이 냅다 블랙마켓에 쳐들어가,

협조를 받아낼 때까지 족쳤다.

벽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더 이상의 피해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순순히 협조하라고 칼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몸의 대화의 성능은 확실했다.

“아, 알겠으니까 제발 살려만 주십쇼!”

아직도 그때 칼스의 외침이 귀에 선했다.

사실 그도 그럴게 당시의 현성은 이미 드래곤 하트의 흡수는 물론이며,

역행마법의 효과를 고스란히 받은 상태.

즉, 그는 거의 최종스펙에 다다른 만큼.

그런 현성을 무력으로 막을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매드독의 협조(?)를 받아내고 돌아왔을 당시.

“도련님, 말씀하신대로 협조. 받아왔습니다.”

수연이 해맑게 웃으며 블랙하운드의 수장, 케르반의 인장을 들이밀었다.

여담으로 그 날,

수연의 방에서는 의문의 피가 묻은 단검이 발견되었다.

‘여기까지가 한 달 하고도 이주가 지난 일.’

그리고 이후로는 각지에서 마족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성이 움직이는 만큼.

그들 역시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로 한 달 하고 3주가 지났을 때.

하선의 말처럼 곳곳에서 검은 탑이 솟아났다.

그 후로 일주일이 더 지나고.

두 달이 되기 전날 밤,

깊은 밤이 찾아온 아카데미.

현성은 고요한 시계탑 위에서 아무 말 없이 그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