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 날의 약속(1)
아카데미의 지하.
그곳에는 특정 마법의 실험 따위를 위해 외부와 차단된 연구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의 용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흑발의 여성.
그런 그녀는 양손에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밖에는 경비까지.
“…….”
그대로 하선이 천천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도, 사람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하얀 벽과 유리가 전부.
도대체 얼마나 이곳에 갇혀있던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그저 현성과의 전투 끝에 기절했다는 것 뿐.
그 후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을 살려뒀는지 그 목적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족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유현성. 그녀의 동생이었다.
이에 그녀는 우선 동생이 안전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시에 하선은 현성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인간들과는 말을 섞을 이유도,
그래야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내 말 들리나?”
작은 유리창 너머, 붉은 머리의 여성이 물었다.
아마 이클레아라는 이름의 교수라고 했을 것이다.
곧이어 그녀가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닫고 있을 거지? 이쯤 되면 뭐라도 말해보는 게 어때?”
그런 그녀의 말투에서는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은 이클레아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벌써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한지 4일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간 얻어낸 정보는 제로.
이에 일부 교수들은 그냥 위험대상인 그녀를 죽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그녀를 데려온 현성과 아직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한 교장의 반대로 인해 그 제안은 일단 보류되었다.
물론 이클레아 역시 교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피해 없이 정보를 얻는 건 흔치 않은 상황이니까.’
그러나 그 과정이 여간 스트레스 받는 게 아니었다.
마치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은 답답함.
그대로 그녀가 갇혀있는 하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현성이 올 거야.”
-움찔.
그러자 줄곧 가만히 있던 하선이 반응했다.
이에 이클레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전혀 반응하지 않으면서, 현성에 관한 건.
그 하나만큼은 확실히 반응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금 믿을만한 건 현성 뿐.
이어서 이클레아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말하는 건 물론 본인 선택이지만, 잘 생각해 보도록 해. 어느 쪽이 더 나을지.”
“…….”
“이쪽에서도 참는 데 한계가 있거든.”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클레아가 등을 돌렸다.
아니 등을 돌리려 한 찰나였다.
하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그런 그녀의 말에 이클레아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현성을 제외하고 처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곧바로 이클레아가 말했다.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대답해주지.”
그러자 하선이 자신의 손가락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끼고 있던 반지. 본 적 있어?”
“……반지?”
그 말에 이클레아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뜬금없이 반지라니.
그대로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군. 그건 잘 모르겠네. 대신 다른 질문은 어때?”
곧바로 이클레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럼 됐어.”
단호한 하선의 대답.
이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작게 혀를 찼다.
“……쯧.”
기껏 찾아온 기회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아마 더 이상 물어봐봤자, 똑같을 게 분명했다.
이에 이클레아가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글렀군.”
그대로 그녀가 등을 돌리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클레아가 떠나고 다시 적막감이 맴도는 연구실.
-사아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하선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를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그 목소리에 다시 눈을 뜨자,
하선의 앞에는 흑발의 소년이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현성,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동생이었다.
그런 현성의 뒤로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보였다.
무엇보다 저택의 대문에 새겨져있는 문양.
유 가문의 문장이었다.
“…….”
이에 하선이 가문의 문장과 대저택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문이 몰락하기 전.
그들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왔어? 현성아.”
그대로 하선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동생을 부드럽게 껴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품안에 얼굴을 부비며,
고사리 같은 양 손을 펼쳤다.
“누나, 이거 봐라!”
그런 현성의 손에는 조잡한 반지가 들려있었다.
그 겉은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한데다가 크기도 제멋대로였다.
동시에 하선이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뭐야?”
“선물! 오늘 누나한테 주려고 수연이랑 만들었어!”
수연, 가문에서 그를 돌보는 메이드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른 메이드들이 자꾸 이거 말고 더 예쁜 선물이 좋을 거래.”
이에 하선이 피식 웃으며 현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그래? 누나 눈에는 이게 지금껏 본 반지 중에서 제일 예쁜데?”
“정말?”
“그럼. 너무 마음에 드는 걸.”
그 말에 풀이 죽어있던 현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나름대로 반지의 배경 스토리까지 만들었는지 열심히 반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중간 중간에 드래곤과 공주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어제 자기 전 읽어준 동화책의 내용을 참고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성의 설명에 하선이 물었다.
“그럼 이 반지의 이름은 뭐야?”
허나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건지,
현성이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음…….”
그대로 머지않아.
현성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호의 반지야!”
“수호의 반지?”
“응! 앞으로 꼭 끼고 다녀야해. 그래야 반지의 효과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와 함께 현성이 하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보였다.
그리고 하선의 눈에는 그런 현성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물론이지. 꼭 끼고 다닐게.”
“정말이지? 약속할 수 있어?”
그러면서 현성이 작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에 하선이 싱긋 웃으며 흔쾌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약속.”
“좋아. 약속!”
현성이 하선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그녀가 눈을 뜨자, 그곳에는 현성 대신 차가운 유리벽이 자리할 뿐이었다.
“……꼭 끼고 있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하선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날, 현성과 약속한 이후로 줄곧 끼고 다니던 반지였다.
하지만 기사단의 무덤에서 기절하고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손가락에 있어야할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떨어트리기라도 한 것일까.
하선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 * * * *
그대로 머지않아.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잘 있었어?”
이에 하선이 싱긋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넌 어때? 오늘따라 조금 늦게 온 모양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아, 그래봤자 여긴 시계가 없어서 시간도 확인 못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뭔가 꼭 오늘은 평소보다 늦은 느낌인거 있지?”
하선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자 현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말할 생각은 없는 거야?”
마족에 관한 정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현성의 말에 하선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그래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고.”
“…….”
이번에도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아무리 마족에 관한 정보를 말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도,
하선은 엘카인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듯.
줄곧 대답을 피했다.
이에 현성이 주먹을 쥐며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그냥 말해줄 수는 없어?”
그러자 하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 역시도 말했을 텐데. 난 더 이상 네가 위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아.”
하선이 이러는 이유는 명확했다.
현성을 지키기 위해.
만약 여기서 마족에 관한 정보를 넘겼다가는 자신이 위험해지는 건 물론이며,
더 나아가 현성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선은 끝까지 침묵을 지킬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깟 유리벽?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박살낼 수 있었다.
물론 밖에 있는 다른 교수들이나 경비들은 거슬리겠지만,
탈출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떻게 현성을 보호하는가.
일단 그를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그 이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엘카인이 인간계를 침공하는 날.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현성만 둔다면,
그를 살릴 수 있었다.
허나 문제는 현성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
“……넌 아직 엘카인의 진정한 힘을 몰라. 그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른단 말이야.”
하선은 처음에는 가문의 부흥을 위해 엘카인의 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생존.
엘카인에게 대적한 자들의 말로는 전부 죽음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의 뜻을 따라야했다.
설령 그것이 세상의 인간 전부가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할지언정.
그녀는 현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인류를 배신할 수 있었다.
“…….”
이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하선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야기한 내용 그대로였다.
그리고 대화를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선이 엘카인을 따르는 건 맞지만,
이키펠이나 다른 마족처럼 엘카인을 믿는 건 아니다.
그래. 오히려 믿음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압도적인 힘을 마주한 공포.
엘카인을 따르지 않으면 벌어질 이후의 일.
하선은 그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의 밑에 있는 것에 가까웠다.
믿음이 아닌, 공포를 통한 지배.
이것이 현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동시에 이건 현성에게 있어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고 있었다.
만약 맹목적인 믿음이 기반이 되었다면,
협상의 여지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이유가 공포 때문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 하선에게 필요한 건 공포를 이겨낼 믿음.
‘……그 믿음만 심어준다면 회유할 수 있다.’
그러면서 현성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하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이거 기억나?”
“이건…….”
그런 현성의 손바닥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반지.
과거, 그가 자신의 누나 하선에게 선물로 주었던,
수호의 반지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