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기사단의 무덤(10)
눈앞에 떠오른 데이몬드의 제안.
이는 역행을 사용할지 말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대로 데이몬드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선택권을 주는 이유는 자네를 믿는 것도 있지만, 자네를 걱정하기 때문일세.]
시간마법. 역행.
이는 데이몬드가 창조해낸 마법이 맞았지만,
실제로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가 대마법사의 경지 그 이상에 올랐으며,
마법에 통달하였다고 한들.
애초에 시간마법에는 수많은 변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자신이 아닌, 현성에게 쓸 상황.
그만큼 역행을 사용하는 데에는 큰 리스크가 뒤따랐다.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현성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상황.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 허나 그렇다고 자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닐세. 그러니…….]
데이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전적으로 자네의 선택에 따르도록 하겠네.]
역행이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그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 역시 기사단.
과거 인류의 최후에 남았던 자이자,
마지막까지 마족과 싸웠던 집단의 수장이었다.
쉬이 무시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상황.
[…….]
그런 데이몬드의 말에 알레시아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티리카가 죽고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을 때.
기적처럼, 운명처럼 만난 계약자였다.
그만큼 그녀는 다시금 계약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알레시아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 늙어 죽어가는 주제에 뭐가 그리 미안하다고 하던지…….]
티리카의 마지막.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을 지켜봤지만, 티리카의 죽음만큼은 유독 쉽사리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래곤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망각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유일한 저주였다.
그리고 만약 지금 현성을 잃게 된다면,
그 모습 또한 영원히 뇌리에 남아 그녀를 괴롭힐 터.
“……알레시아, 넌 어떻게 생각해.”
이에 현성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그와 데이몬드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리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마족의 저지와 현성의 목숨.
둘 중 선택하라고 하면, 알레시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고를 터.
그만큼 그녀는 현성에게 위협이 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걱정하는 마음이라 한들.
함부로 그의 선택을 막아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현성에게는 그만의 선택과 삶이 있었다.
[현성, 나는 자네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난 블랙마켓에서 이미 한 번 삶을 포기한 몸. 그런 나에게 다시금 삶의 의지를 깨워준 건 자네가 아닌가.]
그대로 알레시아가 현성에게 부드럽게 얼굴을 부비며 입을 떼었다.
[데이몬드의 말처럼, 나 역시 전적으로 자네의 선택에 따르겠네.]
“…….”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알레시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지, 충분히 전해졌다.
그대로 현성이 데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닌,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허나 그 눈에서는 광기에 물든 붉은 안광이 아닌 차분히 가라앉은 고요함과 굳은 다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겠습니다.”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지금 여기서 역행을 받지 않는다한들.
어차피 엘카인을 막지 못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결국 그 끝에는 죽음 뿐.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시도는 해보는 게 맞지 않는가.
‘지금까지 해온 게 얼마인데 겨우 죽는 게 무서워서 그만둘 리가.’
애초에 죽는 게 무서웠다면,
처음부터 선천강에 가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해피 엔딩 만드는 걸 포기하고 조용히 멸망을 기다렸겠지.
하지만 그런 건 현성과 맞지 않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한 번 정도는 부딪혀봐야지 않겠는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행.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눈에는 더 이상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데이몬드의 지하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의 실험실.
커다란 반구형의 공간 정중앙에는 제단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이 자리하였다.
무엇보다 그런 제단 앞에는 현성이 서있었다.
그리고 곧 모든 준비를 마친 데이몬드가 아래로 내려왔다.
이미 바닥과 주변에는 온갖 마법진과 마도서가 즐비해있었다.
[……시작해도 되겠나.]
데이몬드가 현성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준비됐습니다.”
[그럼 우선 이걸 받게나.]
동시에 데이몬드가 그를 향해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런 술잔에는 와인과 같이 붉은 색을 띠는 액체가 담겨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액체의 이름은 넥타르.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맥,
바베론 산맥에서 자라는 암브로시아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액을 술과 섞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원은 일명 과거 영웅가라 불리었던 브란델 가.
현성 역시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레드 후드 기사단이 왕실 기사단으로 승격된 당시.
기사단장의 이름이 린 브란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워낙 지나가듯이 나오는 정보라 그리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지만…….’
설마하니 그 브란델 가의 넥타르가 역행마법의 주요 키포인트가 될 줄이야.
꽤나 의외였다.
그와 함께 데이몬드가 말했다.
[브란델 가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브란델을 세운 선조는 넥타르를 먹고, 영웅의 재능을 개화했다고 전해졌네. 그에 따라 브란델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넥타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알 수 있다고 하지.]
“…….”
[이처럼 넥타르의 효과는 복용자의 숨겨진 가능성을 각성시키는 것.]
그리고 역행마법 역시도 과거의 선택에 따른 여러 가능성을 현재에 덧씌우는 것.
즉 넥타르는 역행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물질이었다.
무엇보다 넥타르는 비단 브란델 가의 핏줄에만 반응하는 게 아니다.
[그저 브란델 가의 사람들이 유독 넥타르를 잘 받는 체질일 뿐, 넥타르의 효과 자체는 모두에게 적용되지.]
이에 데이몬드는 그 점에 주목해 기존의 넥타르를 변형하여, 모두에게 반응확률을 올리는 넥타르를 만들어냈다.
그에 따라 넥타르를 마시는 것이 역행마법을 받아들일 첫 준비라고 할 수 있었다.
[쭉 마시게나.]
그런 데이몬드의 말에 현성이 곧바로 넥타르를 들이켰다.
무엇보다 간만에 맛보는 술이라 그랬을까.
현성이 쉬지 않고 한 번에 넥타르를 털어 넣었다.
[……자네, 괜찮나?]
그 모습에 데이몬드가 현성와 텅 빈 술잔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아니 사실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적당히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그대로 현성이 술잔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첫 시작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데이몬드가 현성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손가락에 피를 내게나.]
이에 현성이 눈앞의 제단을 바라보았다.
제단 바닥에는 둥근 진과 여러 갈래로 나눠진 홈이 길게 나있었다.
그리고 홈이 멈춘 곳에는 둘레를 따라 작게 솟아있는 기둥 수십 개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둥 끝부분에 달린 유리구슬.
‘데이몬드의 말에 따르면 과거 브란델 가에서 쓰던 제단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왔다고했지.’
그러면서 데이몬드가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자네의 일부, 그러니까 피를 떨어트릴 경우. 제단이 반응하며 기둥 끝에 있는 구슬들이 빛날 것이야.]
여기서 수십 개의 기둥들이 나타내는 것은 다름 아닌 현성의 미래들.
그에 따라 데이몬드는 그 중에서 그가 드래곤 하트를 완벽히 흡수한 미래를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그 다음에는 해당 미래를 자네에게 덮어씌우면 끝난다네.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넥타르를 마시고, 피를 낼 경우.
과거의 선택에 따라 갈린 수십 개의 미래가 보일 것이며,
그 중 드래곤 하트를 완벽히 흡수한 미래를 덧씌운다는 말이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그대로 데이몬드가 뒤로 물러났다.
이에 현성이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주르륵.
곧 흘러내린 현성의 피는 바닥의 홈을 따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피가 기둥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하나 둘씩 구슬을 타고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아앗!
그 모습에 데이몬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순조로웠다.
빛이 들어온 구슬은 총 3개.
이제 이 중 드래곤 하트를 완벽히 흡수한 결과를 찾으면 사실상 끝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돌연 다른 구슬들이 빛을 내더니, 곧 모든 구슬이 일제히 빛을 토해냈다.
아니 단순히 빛을 토해낸 정도가 아니었다.
빛 무리가 폭사되듯 쏟아져 나오며 그 충격에 제단이 흔들렸다.
심지어 제단뿐만 아니라 천장이 흔들리기까지.
-드드드득…. 쿠구구궁!!
[……?!]
이에 데이몬드가 주춤거렸다.
그의 이론상, 빛을 내는 구슬은 아무리 못해도 10개미만으로 정해져있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과거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 한들.
구슬이 반응할 정도로 완성된 미래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고 한들,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그랬다.
어느 한 부분이 뛰어나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에 따라 10개 이상의 구슬이 빛나는 건 불가능……!’
허나 눈앞의 풍경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10개 이상, 아니 수십 개의 구슬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 이 진동까지.
[뭔가 심상치 않다…!]
그 결과에 데이몬드가 황급히 기둥들을 확인했다.
기둥에는 분명 결과, 즉 현성의 미래가 담겨있을 터.
그 중에서 드래곤 하트를 흡수해낸 결과를 찾아야 했다.
-스팟.
그대로 데이몬드가 구슬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데이몬드가 계속해서 다른 구슬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곧 그가 모든 구슬을 살펴본 찰나였다.
데이몬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은 채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데이몬드의 눈앞에는 휘광을 내뿜는 현성과,
구슬이 보여주는 수십 개의 결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은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억.
이어서 금발의 남성이 검을 휘두르기 무섭게,
눈앞의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일도양단되었다.
그 다음은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콰드드득!
그대로 그가 창을 내지르자 땅이 갈리며 폭풍이 쏘아졌다.
그 다음은 마법, 단검, 주먹, 활.
심지어는 마법과 검을 결합한 모습까지.
[…….]
검사, 창술사, 마법사, 암살자, 격투가, 궁사, 마검사, 마창사 등등.
이는 다름 아닌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클래스의 정점에 오른 모습이자,
그 외형은 현성이 과거 주인공 유진으로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던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