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기사단의 무덤(9)
적대상태에서 우호상태로 변한 리치 데이몬드.
묘지기 모리안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대로 데이몬드가 현성의 손 위에 있는 폼멜을 바라보았다.
[……모리안은 어디에 있지?]
그 폼멜은 분명 데이몬드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모리안에게 건네주었던 물건.
그런데 눈앞에는 현성 뿐.
모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그런 데이몬드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족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짧은 한마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리안.
더 이상의 설명은 굳이 필요 없었다.
이에 데이몬드가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공허한 어둠만이 자리한 두 눈동자.
본디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없어야 할 텅 빈 눈을 따라,
그리움과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그와 함께 순간 데이몬드의 붉은 안광이 사라졌다가 다시 아스라한 빛을 뿜었다.
그래, 결국에는 그렇게 된 거로군.
그대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모리안의 마지막은 어땠지?]
그 물음에 현성이 폼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리안님은…. 마지막까지 사명을 다했습니다. 기사들과의 약속을, 데이몬드님과의 맹세를 지키고 말입니다.”
[…….]
현성의 대답에 데이몬드가 아무 말 없이 작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곧 현성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 대신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줘서 고맙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이몬드는 더 이상 모리안에 관한 건 묻지 않았다.
그게 그의 죽음을 기리는 일이자, 사명을 다한 기사에게 바치는 마지막 예우였다.
그리고 잠시 뒤.
데이몬드가 왕좌에서 일어나고는,
현성과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우선…,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그대로 그가 모리안의 폼멜과 현성의 팔에 있는 은빛 건틀렛을 번갈아보았다.
[……아무래도 서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 말이야.]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하성 내부, 과거 그의 서재로 쓰였던 곳.
현성은 그곳에서 데이몬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렇게 된 겁니다.”
사룡 카이락스의 등장부터 이키펠이 이곳에 침입한 일까지.
그런 현성의 설명을 들은 데이몬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자네의 몸속에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졌던 거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능하겠습니까.”
현성이 데이몬드를 향해 물었다.
그가 기사단의 무덤까지 찾아온 이유는 물론 에피소드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다름 아닌 드래곤 하트의 완벽한 흡수.
거기다 이키펠까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등장한 지금.
엘카인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키펠의 죽음으로 인해 그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만큼 현성에게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데이몬드 역시 충분히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현성의 말.
[이키펠이라는 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나.]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연구하던 마법을 노리고 왔을 터.]
데이몬드의 말에 현성이 되물었다.
“……마법 말입니까?”
리치 데이몬드.
그는 전에 말했듯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자.
마법이라는 분야에 한에서는 그를 따라올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알레시아의 마법도 손짓 한 번에 소멸시킨 그였다.
그런데 마족들이 그런 그의 마법을 노렸다면, 그것 역시 보통의 마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대로 데이몬드가 말했다.
[그래. 이건 자네의 질문에도 어느 정도 대답이 되는 말이겠군.]
그러면서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서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마도서와 자리하고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낡은 종이와 펜이 놓여있었다.
오래된 연구의 흔적이었다.
[……우선 내가 연구했던 분야는 시간마법.]
시간. 이 세상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축이자,
과거 소수의 마법사에게만 허락되었던 분야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은 연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진 시간은 어느 특정 부분만 건드린다한들,
결국에는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과거에서 저질렀던 일은 과거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영향력은 감히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통제를 벗어난 변수.
현재의 사소한 일이 미래의 재앙으로 변할 수도 있었으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했던 일이 역으로 더 큰 악영향을 불러일으켜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시간 마법이라면…, 금지된 분야가 아닌가?]
알레시아가 데이몬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긍정하며 말했다.
[맞아. 쉽사리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이었지.]
앞서 말한 이런 이유 덕에 시간마법은 일정 선에서만 연구가 행해질 뿐.
사실상 흑마법과 함께 마법계에서 금지된 마법이었다.
그러나 데이몬드는 기어코 시간마법에 손을 대었다.
[……그때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데이몬드가 저주를 받아 리치가 된 이후.
그는 점점 변해갔다.
흑갈색의 머리는 빠지기 시작하며, 기사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눈은 빛을 잃어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건 광증(狂症)이었다.
아무런 전조 없이 튀어나오는 폭력성과 살육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갈망.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에 모든 게 박살나있었고, 아끼던 생명들이 죽어나갔다.
이에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두려워졌으며, 마지막으로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 자리하던 건 더 이상 기사 데이몬드가 아닌,
흉하고 추한 한 마리의 리치뿐이었다.
[그런 리치로 변한 내게 있어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살육? 파괴?]
“…….”
데이몬드가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살육과 파괴 그 무엇도 아니었네. 내게 가장 큰 욕망은 다름 아닌…….]
“회귀.”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곧 그런 그의 말에 데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거였지.]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
리치로 변하기 이전으로,
기사 데이몬드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데이몬드는 시간마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어차피 리치가 된 이상.
적어도 시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걸리든 죽지 않는 몸을 얻은 셈이니 시간은 많았다.
그대로 줄곧 겪어오던 충동이 심해질수록.
데이몬드는 더욱 더 광적으로 연구를 파고들었다.
간질처럼 튀어나오는 폭력성과 살육에 대한 갈망을 그보다 더한 집착으로 억눌렀다.
그 결과, 그는 대마법사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맨 처음 대마법사가 등장했을 때 발견한 마법이 뭔 줄 아는가?]
“마법변형 말입니까?”
[그래. 마법변형이지.]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마법은 전부 원형이 되는 마법이 있고,
과거의 위대한 대마법사들이 이를 변형시켜 정리한 게 지금의 마법이다.
파이어 볼은 파이어 월로.
블링크는 텔레포트로.
라이트닝 챠지는 체인 라이트닝으로.
이처럼 원형이 되는 마법의 일부 성질을 바꿔 여러 가지로 뻗어나간 게 현대의 마법체계인 것이다.
실제로 현성이 쓰는 파이어 펀치 역시도 파이어 볼을 변형 시킨 마법변형의 일종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의 경지는?]
“…….”
[마법창조.]
데이몬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다. 그는 마법을 창조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마법은 바로.
[과거의 선택을 현재에 덧씌우는 결과. <역행>.]
이어진 데이몬드의 설명은 이랬다.
과거의 선택으로 나누어진 수십, 수백 개의 가능성을 현재의 자신에게 덧씌운다.
그러니까 ‘만약 그때에 이런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달랐을 텐데….’ 하는 가정을, 데이몬드는 실제로 이뤄낸 것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역행마법은 심지어 미래의 결과를 현재의 자신에게 덧씌우는 것도 가능했다.
말 그대로 시간 선을 역행하는 마법.
[이것이 내가 창조한 마법이었다네. 그리고 이걸 이용하면 현재의 시간을 유지하고 인간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봉인의 길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연구가 끝나고 정신을 차린 그 순간.
그에게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하던 부인은 갈기갈기 찢겨 황야로 돌아갔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은 화마에 불타 재가 되었다.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은 사지가 잘린 채 썩어갔다.
그동안은 연구에 몰두해, 미처 보지 못했던.
아니 보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광증에 빠진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허나 그걸 깨닫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
데이몬드가 앙상한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난 역행마법을 쓰는 것 대신, 스스로 봉인되는 길을 택했다네.]
시간선을 뛰어넘는 초유의 마법?
아니. 수십, 수백의 생명의 희생으로 빚어진 추악한 마법.
그게 역행의 진실이었다.
동시에 그는 두려웠다.
역행을 쓴다한들 그 죄책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역행을 써서 인간이 되었다 해도, 광증이 계속 남아있다면?
아니 남아있지 않더라도 그가 부인을, 딸을, 부하들을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몬드는 도저히 이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두렵고 추악하여, 완전히 이성을 잃기 전에 스스로를 지하에 유폐시킨 것이었다.
[……아무튼 그 마법을 이용한다면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자네의 몸에 흡수시킬 수 있겠지.]
드래곤 하트는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현성의 몸에 자리 잡을 터.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했다.
그만큼 역행마법을 통해 드래곤 하트를 완벽히 흡수시킨 미래의 현성을 현재의 현성에게 덧씌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데이몬드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데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라면 못썼겠지. 허나 내가 창조한 마법이 자네로 인해 올바른 방향으로 쓰인다면……. 그건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이에 데이몬드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짓궂은 질문이로군.]
그리고 잠시 뒤.
그가 현성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물어봤지?]
그대로 데이몬드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자네는 티리카의 후예니까.]
데이몬드 그가 아는 티리카라면,
그리고 그의 뒤를 잇는 자라면,
걱정은 필요 없었다.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거기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지 않는가.
눈앞의 소년이 티리카의 길을 걷는 것을.
이미 그는 자격을 충족하였다.
[……그게 아니면 자네가 말한 것처럼 혹 내 눈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겠지.]
데이몬드가 장난스럽게 자신의 눈,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눈이 있던 움푹 파인 구멍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왕좌에 있던 자신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
현성이 끼고 있던 은빛의 건틀렛을,
손바닥 위에 있던 폼멜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허나 모리안의 눈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네.]
모리안이 그에게 폼멜을 넘겼다면,
이는 암묵적으로 그가 현성을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대로 데이몬드가 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할 텐가.]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데이몬드의 제안을 수락 하시겠습니까?]
[Y/N]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