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기사단의 무덤(7)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달맞이꽃이 만개한 기사단의 묘지 앞에 도달했다.
다름 아닌 모리안과 함께 꽃을 심었던 그 장소였다.
‘……달맞이꽃이 안내를 해줄 거라고 했던가.’
현성이 모리안이 나무로 돌아가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달맞이 꽃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두운 밤하늘을 따라, 달빛이 꽃밭을 비춘 순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꽃들이 흔들렸다.
-사아아.
그렇게 눈앞에 이는 보라색의 물결은 마치 밤하늘 아래,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파아앗!
그와 함께 돌연 달맞이꽃이 아스라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된 모양이구나.]
달맞이꽃.
옛 기사단의 영지에 가득 피워있던 꽃으로,
그 이름처럼 밤이 되면 달빛에 반응해 빛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알레시아의 앞에 펼쳐진 모습은 과거 티리카와 봤던 그때의 절경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이에 그녀가 작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티리카는 없지만, 알레시아의 곁에는 그의 의지를 잇는 현성이 있었다.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또한 그 운명이 현성을 만나게 해주었듯, 이 빛 역시도 데이몬드에게로 향할 길을 인도해줄 것이었다.
“…….”
그대로 현성이 기사단의 무덤 위로 떠오른 빛 무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은하수가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어서 그의 곁을 맴도는 반짝이는 빛.
그 빛들은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며,
현성에게 그 길을 따라오라는 듯.
계속해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박.
이에 현성이 그런 달맞이꽃의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뒤로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 가던 알레시아가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성. 저길 봐라.]
그러자 그곳에는 넝쿨과 수북한 풀로 가려져있는 문이 보였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에 문이 있을 것이라고는 발견하지 못할 정도.
이에 현성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하듯.
잡초에 가려진 채, 먼지만이 가득 쌓여있었다.
-스윽.
그리고 곧 현성이 문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리자,
문 한 가운데 새겨진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열쇠구멍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
그 모습에 현성이 잠시 문을 주시했다.
그대로 잠시 뒤.
그가 품속에서 폼멜을 꺼내들었다.
절벽 아래에서 모리안이 건넸던 폼멜이었다.
이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쇠구멍에 폼멜을 꽃아 넣었다.
그러자 구멍이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철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드득.
그와 함께 현성이 폼멜을 돌리자 작은 먼지가 일며 서서히 문이 열렸다.
그런 문 너머에는 아래로 향한 길이 나있었다.
이어서 현성이 알레시아를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알레시아.]
현성의 말에 그녀가 손을 휘저어 플래시 마법으로 작은 빛 무리를 만들어냈다.
그대로 밝은 불빛에 의지해 현성과 알레시아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 후로 꽤나 많이 걸어왔다고 짐작되었을 때.
-멈칫.
현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동시에 그런 그의 앞에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다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옆에 있던 알레시아가 내려온 길목과 문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길목은 나중에 만들어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길목은 어디까지나 이 문을 숨기기 위한 임시통로.
이 말은 즉, 이 앞에 있는 문 너머에 기사들이 지키려고 했던 장소가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끼기긱…!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성이 그 앞으로 발을 내딛은 찰나.
띠링, 알림음이 울려 퍼지며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데이몬드의 지하성에 들어왔습니다.]
* * * * *
마치 중세시대 고성과도 같은 모습.
빛바랜 액자가 전시되어 있는 복도부터 먼지가 쌓인 조각상까지.
지하성 내부 곳곳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성의 공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의 모습이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거칠게 찢긴 액자의 그림, 흉하게 박살난 기둥, 바닥에 눌러 붙은 핏자국.
엉망이 된 복도.
그곳에서는 전투의 흔적과 더불어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친 흔적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그때였다.
알레시아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커다란 액자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얼굴 부분은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데이몬드.]
과거 반대파를 이끌던 수장이자, 성의 주인의 이름이었다.
이에 현성이 얼굴 부분이 훼손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던 <이스페리아>의 설정과 똑같았다.
리치로 변해가는 그는 점차 언데드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광증과도 같이 전조 없이 튀어나오는 폭력성과 살육에 대한 갈망.
엉망이 된 복도도 전부 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액자 역시도 그랬다.
인간임을 증명하던 피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져나가고,
흉한 뼈만이 남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데이몬드는 성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신의 사진을 찢기에 이르렀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성에 거울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더욱 더 아래로,
빛 한 줌 들지 않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 결과. 데이몬드는 더 이상 자신을 잃기 전에, 제 스스로 봉인되는 길을 택했다.
-스으으.
그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사방이 막힌 지하성에서 바람이 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현성.]
하지만 이에 무언가 느낀 알레시아가 현성을 불렀다.
그러자 그 역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래야.”
그들의 발아래.
그곳에서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은 다름 아닌 복도 옆에 난 계단.
곧바로 현성과 알레시아가 계단으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래를 향해 길게 이어진 계단이었다.
애초에 지금 있는 성조차 지하에 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아래로 나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부드러운 바람이 현성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익숙한 감각.
알레시아의 플라이 마법이었다.
-끄덕.
그와 함께 알레시아가 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쉬이익!
그의 귓가를 따라 들려오는 매서운 바람소리.
그 상태로 잠시 뒤.
순식간에 맨 아래에 도착한 현성이 자연스럽게 착지했다.
아래에 도착하자 위에서 느껴졌던 기운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그 근원지는 어둠 너머 자리한 문.
과거 데이몬드의 연구실 겸 집무실로 쓰였던 곳으로, 지금은 그가 유폐된 장소였다.
-끼익.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은 커다란 왕좌를 연상케 하는 내부였다.
빛 한줌 들지 않는 어둠과 거미줄이 잔뜩 쳐진 내부는 스산함이 맴돌았다.
무엇보다 그 왕좌 중앙에 앉아있는 해골.
그런 해골의 가슴팍에는 검 한 자루가 박혀있었다.
이에 현성이 해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가 과거 데이몬드의 지하성을 공략할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랑 변함없군.’
가슴팍에 박힌 검.
플레이어가 그 검을 뽑는 순간.
데이몬드의 봉인이 풀리며, 바로 보스전에 진입하게 된다.
이어서 사방으로 쏟아지는 마기와 번쩍이는 붉은 안광.
그와 함께 재생되는 웅장한 배경음악은 플레이어에게 본격적인 전투에 진입했다는 감상을 남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어서 오거라. 필멸자여.]
봉인에 깨어난 데이몬드의 첫 대사였다.
현성이 이를 전부 기억할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는 꽤나 인상 깊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
‘물론 모리안이 건네준 폼멜이 있으니 가장 우려하는 경우는 벌어지지 않아야 할 테지만…….’
여기서 예기치 못한 변수가 하나 발생했다.
이키펠의 침입.
그리고 그로 인한 모리안의 사망.
‘그만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어쩌면 최악의 사태로 번질지도 모르지.’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현성이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터업.
혹시 몰라 알레시아는 당장에라도 마법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
이에 현성이 곧바로 박혀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해골의 입을 따라 토해지는 검은 안개.
그런 안개는 순식간에 내부를 가득 감쌌다.
안개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기.
[현성!]
그러자 현성이 재빨리 입을 막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려나려는 찰나였다.
줄곧 가만히 있던 해골의 손이 움직였다.
-꽈악.
그대로 앙상한 해골의 손이 현성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와 함께 해골의 안광이 붉은 빛으로 번쩍거렸다.
무엇보다도 갈비뼈 안쪽에 반짝이는 보라색 결정.
리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라이프 베슬이었다.
끼이익, 현성의 귓가를 타고 귀곡성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봉인에서 깨어난 데이몬드의 턱뼈가 움찔거렸다.
[……어서 오거라. 필멸자여.]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 데이몬드의 입에서 나온 대사.
틀림없이 보스전에 돌입하기 직전의 대사였다.
그리고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우려하던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모습에 뒤에 있던 알레시아가 외쳤다.
[현성! 충격에 대비하거라!]
곧 그런 그녀의 외침과 함께 캐스팅하고 있던 마법이 데이몬드를 향해 쏘아졌다.
화염의 폭풍부터 전격까지.
-콰가가각!!
형형색색의 고위급 마법이 일제히 왕좌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데이몬드가 나머지 손을 치켜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라져라.]
그저 한 마디.
그 짧은 말과 동시에 데이몬드의 손을 따라 검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리고 날아오던 마법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졌다.
-푸스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에 알레시아가 당황한 듯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구겼다.
‘예상은 했지만…….’
과거 반대파 기사들을 이끌었던 수장 데이몬드.
그는 티리카와는 다르게, 다른 종류의 무력을 사용하곤 했다.
그것은 바로 마법.
데이몬드는 당장 그 경지만 하더라도 대마법사에 오른 존재였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기는 술식 파훼.
상대방의 술식을 파훼해 마법의 발동 자체를 막아버리는 기술이었다.
그에 따른 이명만 하더라도 침묵의 마도사.
이 때문에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 그와 보스전을 치룰 때도 마법은 처음 1회를 제외하고는 통하지 않았다.
허나 방금 전은 처음 마법이 먹히기도 전에 알레시아의 마법이 소멸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나의 지배자라 불리는 드래곤.
그런 드래곤의 마법을 소멸시킨 것부터,
현성 그가 알고 있던 패턴과는 뭔가 달랐다.
‘이렇게 됐다면 어쩔 수 없다.’
우선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게 먼저.
곧바로 현성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기 무섭게 그의 팔을 따라 타오르는 붉은 화염.
-화르륵!
이에 데이몬드가 방금 전과 같이 검은 마법진을 펼쳤다.
마법을 소멸시키려는 생각이었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
마법진이 발동했음에도 그의 화염이 소멸하지 않았다.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었다.
그는 히든 클래스, 힘의 마법사.
그만큼 현성의 마법은 여타 다른 마법과는 그 발동방법이 달랐다.
그리고 이 뜻은 적어도 이 술식을 파훼하기 전까지는,
현성의 마법이 통한다는 뜻.
“손. 받아간다.”
그의 단호한 한 마디와 동시에 현성의 주먹이 데이몬드의 팔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그대로 데이몬드의 지하성.
현성의 화염이 폭발하며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