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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208화 (208/240)

208화 기사단의 무덤(6)

그런 현성의 말에 품에 안긴 하선이 싱긋 웃었다.

“다행… 이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선이 정신을 잃었다.

아마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했으니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에 알레시아가 정신을 잃은 하선을 바라보며 현성에게 물었다.

[……현성.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할 거지.]

“데려가야지.”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키펠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마족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낼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다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이상.

만약 하선이 그에 관한 정보를 말해준다면 이는 당연히 현성에게 있어 크나큰 이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현성의 친누나.

비록 <이스페리아>에서 정해진 설정에 불과하다한들, 이대로 그녀를 죽이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수연을 위해서 그래야겠지.’

하 가문을 끝까지 모신 유일한 메이드. 이수연.

그녀 역시도 하선이 죽는 건 바라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현성이 수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내가 맡도록 하지.]

“그래. 부탁할게.”

그대로 잠시 뒤.

알레시아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아공간이 펼쳐졌다.

그리고 현성이 쓰러진 하선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스르륵.

그러자 하선의 몸이 부드럽게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푸스스, 하늘을 가릴 듯 솟아있던 검은 가시나무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현성과 알레시아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곧 가려졌던 밤하늘이 걷히고.

방금 전만 해도 가시나무가 있던 곳은 마치 불에 탄 듯한 검은 재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잠깐. 저건?”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검은 재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한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그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반지?”

그건 다름 아닌 반지.

아마 하선이 끼고 있던 반지인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현성의 앞에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수호의 반지]

[등급 : 커먼]

설명 : 유하선이 가장 아끼는 반지. 어릴 적, 그녀의 동생 유현성이 누나를 위해 만들어준 선물이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현성이 반지를 챙겼다.

물론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챙겨두는 게 좋아보였다.

이걸로 우선 이곳은 마무리.

“…….”

현성이 저 멀리 처음 그가 포탈을 타고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로 묘지기 모리안과 이키펠이 싸우고 있던 장소였다.

그곳은 당장 현성이 하선과 싸우던 와중에도 커다란 폭발음과 심상치 않은 힘의 충돌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 역시 전투가 마무리된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만약 모리안이 이겼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알레시아.’

[그래. 알고 있다.]

그와 함께 푸른 마법진을 펼쳐지며, 곧 현성과 알레시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파앗.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과 알레시아가 모리안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리고 처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건 도대체…….]

평평하던 땅은 이미 지진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속살을 드러낸 채 박살나있었다.

아니 땅 뿐만이 아니었다.

나무를 비롯한 주변의 지형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다가,

곳곳에는 붉은 핏자국과 짙은 보라색의 피가 가득했다.

사방에 보이는 건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전부.

그대로 조금 더 걸어가자 사지가 잘린 시체 여러 구가 보였다.

아니 잘렸다기보다는 갈가리 찢겼다는 설명이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 보라색 피로 보아, 아마 이키펠과 하선과 함께 온 마족의 시체로 추정되었다.

허나 그 어디에도 모리안과 이키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그러면 그럴수록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키펠,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본 게임의 메인 보스, 엘카인을 직접 보좌하는 마족이자,

그만큼 강하고 까다로운 보스였다.

우선 유령극단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그 외에도 괴랄한 환영패턴과 여러 꼭두각시를 다루는 전투방식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신경써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환영 속에서 본체를 구별하고, 2페이즈가 오기 전에 꼭두각시를 전부 파괴해야한다는 점이 그랬다.

무엇보다 그는 원래대로라면 이 시점에 등장하지 않는 보스.

그에 따라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야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현성, 찾았다!]

알레시아의 말과 동시에 현성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깎아지를 듯한 거대한 절벽 아래,

등을 기대고 몸을 추스르는 모리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리안님! 괜찮습니까?”

이를 발견한 현성이 알레시아와 함께 그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둘을 발견한 모리안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무사… 하셨군요…….”

그가 자신의 몸보다 현성과 알레시아가 무사한 게 다행이라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리안의 미소와는 달리 가까이에서 본 그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주르륵.

가슴팍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이어진 자상과 반쯤 날아간 복부.

그 상처를 따라 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흘린 피만 해도 상당한 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오른쪽 어깨.

그 아래 있어야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모리안이 애써 웃으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더 말씀하시지 마세요.”

“생각보다 상대가…, 강하더군요.”

그의 상대.

이키펠을 말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모리안이 그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녀석은 제가 쓰러트렸으니까.”

그러면서 그가 줄곧 움켜쥐고 있던 왼팔을 펼쳤다.

동시에 그런 그의 왼손에는 길쭉한 뿔이 들려있었다.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환영의 지휘자 이키펠의 뿔]

[등급 : 유니크]

설명 : 환영의 지휘자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마족, 이키펠의 뿔이다. 이를 사용할 경우, 1회에 한하여 유령극단을 소환할 수 있다.

그대로 모리안이 현성에게 뿔을 건네며 말했다.

“나머지는 아마…. 저 산 끝에 있을 겁니다.”

그가 절벽 끝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산이라고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성은 모리안이 등을 기대고 있는 절벽이 본디는 산이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상에…….’

이 말은 곧 모리안이 이키펠과 전투를 벌이며 산 반쪽을 소멸할 정도의 공방이 오갔다는 소리.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그의 말대로라면 이키펠은 사망.

원래대로라면 플레이어가 쓰러트려할 모리안이 그를 도와 직접 이키펠을 쓰러트리다니.

원작과는 꽤나 다른 전개였다.

‘하여간 이키펠을 쓰러트렸다니 그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다름 아닌 모리안의 상태.

현성의 그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모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했지 않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

“제가 하프라는 건 말씀드렸나요?”

모리안이 자신의 상처를 흘깃 바라보고는 현성을 향해 작게 웃었다.

“전 그 중에서도 드라이어드의 피가 섞였습니다.”

드라이어드.

숲의 나무라고 불리는 종족으로, 인간의 피와 드라이어드의 피가 섞인 모리안은 쉽게 죽지 않는다.

드라이어드 특유의 재생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피해의 정도에 따른 것.

이 정도라면 드라이어드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전 죽지 않습니다. 그저…….”

“나무로 돌아갈 뿐.”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드라이어드 역시 죽는다.

다만 그 방식이 나무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될 뿐이다.

“……역시 티리카님의 후예는 못 속이겠군요.”

그대로 모리안이 주변의 나무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전 여전히 이걸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긴 잠에 들 뿐이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모리안이 자신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현성에게 들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은 폼멜.

데이몬드가 봉인에 들어가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리안에게 맡긴 일종의 증표였다.

“이건…….”

“받으시죠. 이거라면 제가 없어도 문제없을 겁니다.”

그와 함께 모리안이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데이몬드님을 다시 못보고 간다 생각하니 그건 아쉽군요. 기왕이면 직접 안내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자네는 정말 이대로 괜찮겠는가.]

알레시아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전 현성님과 알레시아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리고 안내는 저 대신 달맞이꽃이 해줄 터. 아무런 걱정 없습니다.”

모리안이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그 어떤 고통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해보였다.

그동안은 동료들이 몸을 바친 희생 위에 죽지못해 살아왔다.

데이몬드님을 지키겠다는 사명 아래,

수십, 수백 년 동안 기사들의 묘지기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동료들과의 모든 약속을 지켜내고, 마지막까지 마족을 막아낸 지금.

비로소 그는 묘지기가 아닌 한명의 기사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야 따라갈 수 있겠군요.”

모리안이 기사들의 묘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수백 년간의 일을 마무리 할 시간이었다.

그대로 모리안이 현성과 알레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사 모리안, 마지막으로 티리카님의 후예를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

“그럼 데이몬드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리안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그의 몸이 굳어갔다.

아니 나무로 변해간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이키펠에게 당한 상처도.

그런 상처를 따라 흘러내리는 붉은 피도.

긴 백발도 전부.

-드드득.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깎아지를 듯한 절벽 아래.

그곳에는 그저 고목 한 그루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알레시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손을 휘저었다.

-쿠구궁.

그러자 고목 바로 앞을 타고 회색 비석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 모습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던 현성이 품속에서 보라색 꽃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의 오두막에 있던 달맞이꽃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모리안의 비석 앞에 꽃을 심었다.

이게 그와 알레시아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예우였다.

“……가자. 알레시아.”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이제 데이몬드가 봉인되어 있는 성으로 떠날 차례였다.

그에 따라 알레시아가 흘깃 비석 앞을 바라보았다.

다른 기사들의 묘지와 동떨어진 절벽 아래.

그곳에는 보라색 달맞이꽃과.

짧은 묘비 문이 적혀있었다.

[기사 모리안, 여기 잠들다.]

모리안.

이는 수백 년 동안 홀로 이곳을 지켜온 묘지기이자,

마지막 기사의 이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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