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기사단의 무덤(5)
-투두둑.
고요함이 맴도는 묘지 사이.
돌연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하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손을 내밀었다.
곧 그런 그녀의 손끝을 따라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
하선이 아무 말 없이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사박, 풀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추적추적 내리는 비.
그래, 그때도 이런 날이었다.
하선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와 닮은 한 소년이 서있었다.
흑발과 차갑게 가라앉는 눈동자.
허나 그도 잠시.
내리는 빗방울 사이, 소년의 모습은 점차 흐려지더니.
-사아아.
하선의 눈앞에는 어느새 흑발의 소녀 하나가 서있었다.
딱 지금의 현성과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그리고 하선이 그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과거 자신의 하 가문을 나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그와 함께 하선이 작게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만약 그때 내가 가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현성을 놔두고 가지 않았더라면,
언제나 그랬듯 같이 산책을 가고, 웃고, 떠들고.
잠들기 전에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동화책을 읽어줬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선이 현성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때 곤히 잠든 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 대신,
아침이 오면 그에게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넸으면.
지금처럼 현성을 상처 입힐 일도,
그를 제압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이라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선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순간.
으드득, 그녀의 이를 갈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가주였던 부모가 죽은 이상.
메이드 수연을 제외하고 남은 가신이 모두 떠난 이상.
하 가문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간 연락을 이어오던 가문은 모두 등을 돌렸고, 남은 건 그녀와 어린 동생뿐이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
이미 몰락한 가문의 위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그 선택밖에 없었다.
-꾸구국.
그대로 하선이 자신의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하 가문의 인장이 박혀있는 펜던트.
가주의 집무실 낡은 서랍 안에 있던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정체불명의 인장이 찍힌 편지.
그 안에는 마족과 결탁할 것을 제의하는 서신이 있었다.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서신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전부 다 읽으면 당장 편지를 태워버리라는 말까지.
하지만 그때 서신을 읽었음에도 태워버리지 않은 아버지의 안일함이,
하 가문에게 있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버지의 안일함이 아니었다.
‘……선택의 기로.’
그 서신은 하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음과 동시에,
몰락한 가문을 부흥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던 그날, 하선은 기꺼이 양날의 검을 뽑아들었다.
가문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동생을 위해.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어.”
그와 함께 하선의 검은 마기가 날개를 펼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현성을 향해 쏘아졌다.
-퓻!
그대로 빗방울이 일제히 좌우로 갈라지며 하선이 현성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 마기가 한 데 뭉쳐있었다.
마치 짐승의 손톱을 연상케 하는 모습.
-촤아아악!
곧바로 하선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솟구치는 마기.
이에 현성이 팔을 들어 막았다.
-채앵…. 치지직!
검은 마기와 티리카의 건틀렛이 마주치며 거센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 너머, 하선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성, 제발 포기하면 안 될까?”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 뿐.
하선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마기를 폭발시키며 외쳤다.
“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그러면서 하선이 현성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날렸다.
이에 현성 역시도 반격을 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상처 입는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쉬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어. 하지만…. 하지만 너 하나만큼은…….”
그대로 하선이 양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심상치 않은 마기가 한 곳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떨려올 정도로 강한 마기.
-고오오!
괜히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현성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당장 중간에 이키펠을 비롯한 다른 마족들이 개입해도 그랬다.
그만큼 어떻게든 자신의 선에서 끝내야했다.
그게 최대한 현성에게 피해를 덜 입힐 수 있는 최선이기에.
하선은 이번 공격으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다.
“절대로 죽게 놔둘 수 없단 말이야!”
-콰가가각!!
그와 함께 하선의 손에 응축되어 있던 검은 마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대로 바닥을 타고 솟구치는 수십 개의 마기.
뻗어나간 마기의 줄기는 또 다른 줄기로 갈라지며 그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의 모든 걸 먹어치울 기세로 솟아난 마기가 잦아들었을 때.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가시나무를 연상케 하였다.
“하아…. 하아…….”
곧 하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거두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는 검은 가시나무가 밤하늘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이에 하선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됐어.”
적어도 이걸로 현성이 죽을 일은 없었다.
동시에 방금 전 그녀가 외쳤던 한 마디.
절대로 현성이 죽게 놔둘 수 없다는 그 말.
이는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현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그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모두 죽게 될 테니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그 날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하선은 마침내 마족들의 수장 엘카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선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가 바로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자라는 것을.
아직도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수백의 생명이 꺼져가던 그 풍경을.
그의 발걸음에는 언제나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그 곁에는 언제나 죽음의 향기가 머물러 있었다.
그런 엘카인의 목적은 다름 아닌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것.
동시에 이는 곧 10년 전, 대변동의 재현을 의미하고 있었다.
눈앞의 그 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엘카인의 이상향이 이루어지는 그 날.
이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선은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다른 건 전부 상관없었다.
가문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동생을 살리기 위해.
이것이 하선의 유일한 목표이자,
그녀가 마족에게 넘어간 이유였다.
그대로 하선이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
이제 현성을 무사히 데려가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이걸로 동생이 죽을 일은 없다.
남은 건 그저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서, 그와 함께 하는 것 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현성아.”
하선이 싱긋 웃으며 검은 가시나무에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는 찰나였다.
파지직, 그녀의 귓가를 타고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스파크?’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하늘을 메울 듯 치솟은 검은 가시나무 위.
돌연 커다란 천둥이 내리치며 사방이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릉!!
그리고 그 사이.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온 몸에 푸른 번개를 두른 현성.
이에 하선이 미간을 좁히며 움찔거렸다.
“어떻게……?!”
설마 마지막 일격을 맞고도 움직일 수 있다니.
하지만 그도 잠시.
하선이 재빨리 남은 마기를 끌어올리며 손을 휘저었다.
-콰아아아!
그대로 검은 소나기가 내리듯.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검은 창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그 모습에 줄곧 가만히 서있던 현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투신의 길.”
그와 함께 현성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퓻.
그의 인형(人形)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성이 있던 자리에는 오직 푸른 스파크만이 남아있을 뿐.
-콰앙! 콰과가강! 콰앙!
마기로 이루어진 수백 개의 창이 바닥을 가격했다.
허나 그 어디에도 현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선이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처억.
현성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서있었다.
동시에 그가 주먹을 쥐었다.
무엇보다 현성의 눈동자.
-사아아!
그의 시야 앞에는 푸른 입자가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대로 크고 작은 입자들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고, 그 소용돌이가 부딪히며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입자들의 모습은 알레시아와 카이락스가 브레스를 쏘아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투신의 눈을 사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브레스와도 같은 그 기운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현성의 주먹.
‘간다. 알레시아.’
현성이 알레시아를 향해 전음을 전했다.
앞서 말했듯 그는 그녀의 보조를 받아,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다양한 연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현성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알레시아와의 합동기 : 용의 광시곡의 축소판.
전체적인 출력은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일점에 힘을 집중시킨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바로.
“용격(龍格).”
그대로 현성이 일점에 집중시킨 브레스를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그와 함께 과거 카이락스를 소멸시켰던 고열의 섬광이 쏘아지며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사방에 쏟아지던 빗방울이 일제히 정지했다.
아니 소멸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용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타고 하얀 재가 흩날렸다.
-푸스스.
그렇게 흩날리는 재 사이.
위태롭게 서있던 하선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녀는 황급히 검은 마기를 몸에 둘렀으나, 현성의 용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하선은 그동안 현성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면서 버틴 상태.
이미 데미지가 쌓일 만큼 쌓인 상태에서 용격까지 맞은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털썩.
하선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이에 현성이 곧바로 쓰러진 그녀를 받았다.
그런 하선의 주변에 넘실거리던 검은 마기는 한계에 다다른 듯,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현… 성.”
그대로 하선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눈앞에는 흑발의 소녀가 서있었다.
가문을 떠났던 그날의 자기 자신이었다.
-투두둑.
차갑게 내리는 빗방울 사이.
점점 그 모습이 멀어져갔다.
이에 하선이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돼…….’
그렇게 이내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흐릿해진 하선의 시야 앞에 보인 것은 자신의 동생.
유현성이었다.
-꽈악.
이에 하선이 필사적으로 현성의 옷깃을 잡았다.
만약 여기서 그러지 않았다가는, 과거 그녀가 동생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
현성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지마.”
하선이 과거 자신이 가문을 떠나던 날,
곤히 잠든 줄 알았던 동생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던 그 날.
현성이 자신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었다.
“날 두고 가지 마…….”
허나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선의 입에서 나온 말.
이에 현성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안가. 아무데도.”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