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기사단의 무덤(2)
묘지기 모리안을 쓰러트리는 것 대신 발생한 퀘스트.
이것 역시 특수 이벤트 발생으로 인해 생긴 여파였다.
그리고 이는 현성의 입장에서 굉장히 좋은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구태여 싸울 필요 없이 그냥 꽃만 심으면 된다니.’
까다롭기 그지없는 전투에서 개꿀 퀘스트로 변한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퀘스트의 보상.
데이몬드의 지하성까지의 안내와 의지 스텟+1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의지 스텟이었다.
가뜩이나 올리기 힘든 스텟을 10이나 올려주다니.
그가 이런 좋은 기회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현성이 작게 웃으며 모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현성님.”
곧바로 모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에 현성이 연신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옆에 있는 자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감사하지.’
무려 의지 스텟 10 상승.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할까요?”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현성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런 모리안의 말에 현성이 당연하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의지 스텟을 위해서라면 달밤의 꽃 심기 정도는 아무런 문제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상을 얻을 생각에 어서 빨리 심고 싶을 정도.
이어서 현성이 삽을 쥐며 활짝 웃었다.
“자, 그럼 갑시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빛이 비추는 묘지 아래.
현성이 콧노래를 부르며 땅을 파고 있었다.
-푸욱!
동시에 그런 그가 삽을 풀 때마다,
딱 꽃 하나 심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구덩이가 파지기 시작했다.
이에 그의 옆에서 꽃을 심던 모리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솜씨가 제법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실제로 현성의 삽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특수스킬에 있었다.
예전에 레이첼과 정령의 신전을 공략하던 중에 얻었던 삽질의 황태자.
그 스킬은 그 이름만큼이나,
지금 이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삽질.
[삽질의 황태자. LV4]
설명 : 삽질의 극의에 다다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술로 삽질을 할 시, 최대 500%의 속도 버프를 받으며 높은 확률로 지반의 약점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다.
어느새 2레벨에 불과했던 삽질의 황태자는 벌써 4레벨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최대 500퍼센트의 속도 버프.
그 덕분에 달맞이꽃 심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마지막이군요.”
모리안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자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심으면 그간의 약속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대로 모리안이 묘지를 훑어보았다.
-사아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묘지에 가득 심어져 있던 보라색 꽃들이 흔들렸다.
마치 보랏빛 파도를 연상케 하는 모습.
전부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 혼자 심어왔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알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름답구나. 그렇지 않느냐.]
“예. 아름답네요.”
그대로 모리안과 알레시아가 한참동안이나 흔들리는 달맞이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레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동안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모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리안이 저 멀리 솟아있는 비석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거 없습니다. 그때는 그저…, 나약한 기사 하나만이 있었을 뿐이죠.”
그대로 모리안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방금 전의 비석 대신, 치열한 전쟁터가 펼쳐져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데이몬드 님은! 데이몬드 님은 무사한가!”
“아직은 괜찮습니다만, 슬슬 방어가 뚫리고 있습니다!”
“제기랄, 어떻게든 끝까지 막아내라!”
그런 기사들의 창끝에는 진한 보랏빛 피가 묻어있었다.
그래, 꼭 달맞이꽃과 같은 색이었다.
그대로 모리안이 다시 눈을 뜬 순간이었다.
-스으으.
눈앞에 아른거리는 전장의 풍경이 눈 녹듯 사라졌다.
동시에 귓가에 아른거리던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도,
기사들의 외침도, 마족들의 비명도.
전부 사라졌다.
주름이 가득한 눈 너머 보이는 것은 그저 언제나 그렇듯.
고요하기 그지없는 묘지였다.
“그날의 전장은 마족들이 이 땅에 침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를 데려온 것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 모리안 옆에는 어느새 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다져진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 모리안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모르는 <이스페리아>의 숨겨진 스토리가 드러날 거라고.
“그 아이가 누구죠?”
현성이 모리안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모리안이 주먹을 작게 쥐며 말했다.
“혹시 제가 오두막에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데이몬드 님께서 티리카 님을 기다렸다는 것 말입니다.”
“예. 분명 전할 말이 있었다고…….”
현성이 오두막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에 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데이몬드 님께서는 기사단이 와해된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티리카 님을 찾아 비틀린 관계를 바로잡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하고 싶던 말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모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은 전하의 아들, 그러니까 왕자님을 찾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왕자… 라고? 남겨진 핏줄이 있었다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모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분명 그날, 왕가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전부…….]
“전부 저희들의 손으로 끝냈었죠.”
모리안이 주먹을 쥐었다 피며 중얼거렸다.
“저희가 죽인 갓난아기는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왕자역할을 하던 누군가였겠죠.”
[그렇다면…….]
“어쩌면 전하께서는 반란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던 걸지도 모르죠.”
모리안이 알레시아를 향해 작게 말했다.
“……저희 역시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런 그의 말에 알레시아가 미간을 좁혔다.
기사단의 와해된 결정적인 사건은 왕의 죽음.
여기까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왕에게 숨겨둔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왕국이 불타던 그날, 왕가의 핏줄은 전부 죽였으니까.
아니 죽인 줄 알았으니까.
[그럼 데이몬드가 티리카를 기다렸다는 말은 그 사실을 티리카에게 전하기 위해…….]
“예. 데이몬드 님께서는 훗날, 왕자가 다시 왕위에 오르면 저희들이 모시던 왕을 제 손으로 죽였던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데이몬드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그의 밑에 있던 모리안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희들은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을 죽인 기사라는 오명을,
명예를 저버린 기사라는 수치를,
왕자만 왕위에 오른다면 전부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변명이자, 위선이었을 뿐.
현실은 사뭇 달랐다.
왕자는 그날의 참상을 잊지 않았으며, 심장 깊은 곳에 분노를 새기고 있었다.
그 결과.
왕자는 이 땅에 마족들을 불러왔으며,
데이몬드에게 내려진 건 죽음의 저주라는 이름의 처형이었다.
“그렇게 리치가 된 데이몬드 님께서는 더 이상의 참상을 막기 위해 스스로 봉인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럼 데이몬드는 마족의 편에 붙었던 게 아니란 말인가?]
“예. 오히려 마족에게 당했다는 게 맞겠죠.”
그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데이몬드가 리치인 것은 그대로.
허나 그 경위가 <이스페리아>에 알려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껏 <이스페리아> 플레이하면서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야.’
다회차를 플레이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정보.
그야말로 히든 스토리였다.
그대로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이야.’
모리안의 설명에 알레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이 그리 쉽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데이몬드가 스스로 봉인을 택하고 전투가 벌어졌다면……. 그래,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
아무리 마족이라고 한들,
기사단을 전멸시키는 건 힘들었다.
그러나 티리카와 다른 기사들이 빠진 상태에서 남은 기사단의 최대전력인 데이몬드가 제외되었다면?
마족들이 기사단을 전멸시킨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기사단은 봉인된 데이몬드까지 지켜야 하는 만큼.
이 땅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 끝에 결국 살아남은 건 자네 하나뿐이었군.]
“…….”
그 말에 모리안이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그의 주먹이 작게 떨려왔다.
알레시아의 말 그대로였다.
살아남은 건 자신이 전부.
그리고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종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수명이 길다는 이유.
그게 전부였다.
“만약 제가 좀 더 강했다면, 데이몬드 님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죠.”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몬드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는 끝까지 남을 기사가 필요했다.
그 역할로는 다른 인간 기사들보다 월등히 수명이 긴 그가 제격.
결국 지금 모리안이 부지하고 있는 목숨은 동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그의 목숨은 오로지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모리안에게 허락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수십, 수백 년이 될지라도 이 땅을 지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동료들과의 약속을 행하는 것.
-처억.
자리에서 일어난 모리안이 비석을 향해 걸어갔다.
이어서 그가 땅을 파고 자루에서 마지막 달맞이꽃을 꺼내 비석 앞에 심었다.
그대로 모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
고요함이 내려앉은 묘지.
그곳에는 보라색 달맞이꽃이 가득했다.
드디어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띠링.
그와 함께 현성의 앞을 따라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기사단의 마지막 유언]
퀘스트 내용
-묘지기 모리안을 도와 기사단의 묘지에 달맞이꽃을 심으시오.(완료)
보상 : 데이몬드의 지하성까지의 안내, 의지 스텟+10
동시에 모리안이 현성과 알레시아를 향해 말했다.
“……그럼 데이몬드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니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였다.
돌연 저 멀리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콰아아아앙!!
이어서 치솟은 검은 화염.
이에 현성과 알레시아가 일제히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떠오른 새로운 메시지 창하나.
[캐릭터가 위협을 느낍니다.]
갑작스러운 폭발.
현성의 앞에 떠오른 메시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데이몬드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모양이군요.”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모리안이 미간을 좁히며 나지막이 말했다.
“예. 이 땅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들어왔습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