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기사단의 무덤(1)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
이를 확인한 현성이 히죽 웃었다.
그가 기다리던 메시지였다.
‘……됐다!’
<이스페리아>의 원작대로라면 플레이어는 원래 묘지기 모리안을 쓰러트려야함이 맞았다.
하지만 현성은 지금껏 자신의 경험상,
이번에도 한 가지 변수가 발생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티리카의 건틀렛을 통한 특수 이벤트.’
과거 얼음무덤에서 헌리스의 창을 얻을 때도 그랬으며,
불의 둥지에서 크루페돈을 상대했을 때도,
블랙마켓에서 알레시아를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단 하나.
전부 기사왕 티리카와 연관되어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
그에 따라 현성은 이번 기사단 에피소드에서 예측했다.
묘지기 모리안이든,
리치 데이몬드든,
둘 중 하나는 티리카의 건틀렛이라는 변수에 반응할 것이라고.
‘아니면 둘 다 발동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지금.
둘 중 하나는 특수이벤트가 발생한다는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특수이벤트가 발생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현성이 메시지를 흘깃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묘지기 모리안의 상태가 적대적에서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이 사실은 곧 현성이 구태여 힘을 들여가며, 그를 쓰러트릴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동시에 게임에 있어 중간보스의 스킵은 얼마나 큰 이점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곧 모리안이 천천히 힘을 풀며 주먹을 내렸다.
그대로 그가 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이 티리카님의 후예십니까?”
“…….”
그런 모리안의 말에 현성은 굳이 대답하는 것 대신 자신의 건틀렛을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그가 뒤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 맞지. 알레시아?”
그런 현성의 말에 모리안이 흠칫거렸다.
알레시아라니.
설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이 맞는 걸까.
[……그래. 현성, 자네의 판단이 맞았군.]
곧 현성의 뒤에서 알레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펄럭.
그런 그녀는 이번만큼은 본체로 헌신해 드래곤의 위엄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대로 아스라한 달빛 아래,
알레시아의 금빛 비늘이 아름답게 빛났다.
[보아하니 그대 역시 내 친우의 이름 알고 있는 것 같네만, 자네의 이름은?]
그녀가 모리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티리카의 친우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가 확실했다.
이에 모리안이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알레시아와 현성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제 이름은 모리안. 티리카님의 친우와 그 후예를 뵙습니다.”
그러자 현성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지막 기사단을 뵙습니다.”
그렇게 달빛이 비추는 기사단의 무덤.
그곳에서 기사왕의 후예와 마지막 기사단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화르륵.
묘지기 모리안의 오두막 안.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로 현성과 모리안, 알레시아가 앉아있었다.
그대로 모리안이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집어넣으며 현성에게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이거 노친네 한 명만 있는 곳이라 대접할 게 변변치 않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현성이 차를 받아들며 작게 웃었다.
중간보스와 싸울 필요 없이 이렇게 대접받는 것만 해도 달달한 꿀이 따로 없었다.
묘지기 모리안.
그는 겉보기에는 그저 백발의 노인지만, 스토리의 후반에 등장하는 중간 보스이자 마지막 기사단이라는 설정이 붙어있는 등장인물.
그만큼 그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특히 2페이즈에 돌입하여 제 무기를 들고 본 실력을 드러내는 그의 위력은 상상이상.
물론 그 기술을 실제로 못 보게 된 건 꽤나 아쉬운 점이었으나, 이런 전개도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대로 현성이 모리안이 건넨 차를 마셨다.
곧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퍼졌다.
그와 함께 현성이 모리안을 바라보았다.
“…….”
그런 모리안은 오두막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현성과 알레시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여간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에 현성이 그를 향해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전에 우선 현성님과 알레시아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범한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모리안이 재차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자 현성이 손을 저으며 작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그래. 사과할 필요는 없네. 무엇보다 이미 사과라면 충분히 받았지 않은가.]
알레시아의 말처럼.
그는 이미 몇 번이나 현성과 알레시아에게 사과를 한 상태.
이제 그만해도 충분했다.
이에 모리안이 멋쩍게 웃으며 운을 떼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두 분께서는 어찌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그가 있는 기사단의 무덤은 보다시피 묘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
덕분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땅을 알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워낙 소수이니 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간 이곳에 있던 사람이라고는 수십, 아니 수 백 년간 무덤을 지켜온 것은 모리안이 전부.
그마저도 그가 이종족의 피가 섞여 수명이 긴 하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사왕의 후예가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현성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데이몬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동시에 그런 현성의 대답에 모리안이 멈칫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데이몬드님께서도 티리카님을 기다리셨거든요.”
그러자 알레시아가 사뭇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데이몬드가 말인가? 그건 의외로군.]
데이몬드.
과거 티리카와는 다른 뜻을 품었던 기사이자,
지금은 마족에게 넘어가 리치로 변한 자.
그만큼 그가 티리카를 기다렸다는 말은 의외였다.
그리고 그건 현성 역시도 마찬가지.
원래 <이스페리아>의 전개대로라면 플레이어는 앞서 말했듯이 모리안를 쓰러트려할 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면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즉 이후의 대화는 현성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숨겨진 스토리.
이에 현성이 모리안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기 시작했다.
“데이몬드님께서는 티리카님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늦게라도 이렇게 찾아오셔서 다행입니다.”
“…….”
데이몬드가 티리카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말.
이대로라면 데이몬드와 조우했을 때도 특수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대로 현성이 모리안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지금 바로 데이몬드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건…….”
그 말에 모리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데이몬드님이 계신 곳까지는 얼마든지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허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군요.”
“……마음에 걸리는 거 말입니까?”
“네. 현재 데이몬드님께서는 스스로 봉인에 들어가신 상태. 만에 하나, 봉인을 풀었을 때 저희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리안의 대답에 현성이 과거 본 에피소드를 진행하던 기억을 되짚었다.
원작의 전개상 플레이어는 중간보스 묘지기 모리안을 쓰러트리고,
데이몬드의 지하성에 진입.
그곳에서 봉인된 데이몬드를 마주한다.
그러면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가 봉인에서 깨어나며 곧바로 보스전 진입.
여기까지가 이번 에피소드의 순서였다.
‘그리고 지금 모리안의 말대로라면 만약 봉인에 풀린 데이몬드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경우, 이 전개가 그대로 진행될 위험성이 있다는 건데…….’
하지만 그때였다.
모리안이 현성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쇼.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의 사태니까요.”
그러면서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다름 아닌 검 손잡이 끝에 다는 장식, 폼멜이었다.
이에 현성이 그와 폼멜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건?”
그러자 모리안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데이몬드님이 기사임명식을 치를 때.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폼멜입니다. 그리고 데이몬드님은 다른 건 몰라도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물건은 분명 기억하실 겁니다.”
[기사의 맹약인가?]
“네, 맞습니다.”
알레시아의 말에 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사의 맹약.
기사의 자리에 오를 때, 그들의 주군인 왕이 직접 한 가지 물건을 하사하며 맺는 약속이었다.
“무엇보다 이건 데이몬드님께서 봉인에 들어가기 전, 앞서 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제게 맡기신 일종의 증표. 이거라면 괜찮을 겁니다.”
“…….”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이 직접 하사하고, 데이몬드가 직접 맡긴 물건이라면 문제없을 터.
그와 함께 모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데이몬드님이 스스로 봉인에 들어가실 때만해도 다시는 뵙게 될 일이 올 줄 몰랐는데 역시 인생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군요…….”
무려 수백 년 동안 묘지를 지켜온 그였다.
그만큼 감회가 남다를 터.
그리고 그도 잠시.
“……두 분께 혹시 지하성으로 가기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모리안이 조심스럽게 현성과 알레시아를 향해 물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말입니까?”
“예. 다름이 아니라 데이몬드님을 만나러 가는 것 말인데…. 가능하다면 내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현성이 바깥을 흘깃 바라보았다.
내일이라.
안 그래도 어차피 오늘은 너무 늦은 관계로, 내일 출발할 생각이었으니 그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모리안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줄이야.
혹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현성이 물었다.
“그건 상관없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그런 현성의 물음에 모리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오두막 옆에 세워진 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약속한 게 있거든요.”
이어서 모리안의 자신의 의자 옆에 있는 허름한 자루를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자루 안에는 흙과 보라색 꽃이 가득 담겨있었다.
동시에 알레시아가 관심을 가지며 말했다.
[이건…, 달맞이꽃 아닌가?]
“예, 맞습니다.”
[예전에 기사단의 영지에 피어있는 모습이 참 장관이었지. 자네도 기억하는가?]
“물론이죠.”
그대로 모리안과 알레시아가 작게 웃었다.
달맞이 꽃.
과거 기사단의 영지에 가득 피워있던 꽃으로, 그 이름처럼 밤이 되면 달빛에 반응해 빛나는 모습이 참으로 절경이었다.
[헌데 그 꽃이 왜 여기에 있는가?]
“…….”
그러자 모리안이 자루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동료들의 유언입니다. 누구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녀석이 모두의 묘지에 꽃을 심어주기로 했거든요.”
모리안이 씁쓸하게 입을 떼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를 따라서 허심탄회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제가 될 줄이야…….”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감정을 추스르고는.
현성과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내일이면 남은 묘지에 꽃을 전부 심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송구하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퀘스트 창이었다.
[퀘스트 : 기사단의 마지막 유언]
퀘스트 내용
-묘지기 모리안을 도와 기사단의 묘지에 달맞이꽃을 심으시오.(진행 중)
보상 : 데이몬드의 지하성까지의 안내, 의지 스텟+10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