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허풍쟁이 크로엘(2)
시계탑의 최상층.
진홍빛 머리의 소녀가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는 npc임을 나타내는 표시와 허풍쟁이 크로엘이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대단하네.”
하지만 그도 잠시.
머리 위의 이름이 흐릿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크로엘이라는 이름이 있던 자리에는 레이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빨리 내 정체를 알아낸 인간은 네가 처음인 걸?”
그렇게 말하는 크로엘, 아니 레이아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말투와 교복부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풍겨오던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확실히 보통 아카데미의 학생들과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으나,
도저히 악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
당장 지금도 그랬다.
“……그래도 이번에는 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레이아가 작게 볼을 부풀리며 자신의 교복을 이리저리 살폈다.
과연 누가 이를 공간을 다루는 악마, 레이아라고 생각할까.
‘좀 더 정확히는 사념체지만 말이지.’
현재 현성의 눈앞에 존재하는 공간의 악마는 설정 상 어디까지나 사념체.
그녀의 진정한 본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로 레이아가 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넌 도대체 내 정체를 어떻게 간파한 거야?”
“글쎄.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두지.”
현성이 언제나 그랬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역시나 원작의 설정 그대로였다.
퀘스트 : 크로엘의 부탁.
이는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레이아’라는 키워드를 얻고 종료된다.
허나 본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
주인공은 크로엘이 말한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도서관은 물론이며, 아카데미의 교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찾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말한 레이아란 공간의 악마의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얻게 되는 정보로는 공간의 악마 레이아는 평소에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터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유희를 즐긴다는 것.
그에 따라 모든 정보를 종합했을 때.
플레이어는 마침내 허풍쟁이 크로엘이 사실은 공간의 악마 레이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성이 누구인가.
<이스페리아>에 한해서는 온갖 정보와 공략을 꿰뚫고 있는 썩은 물.
현성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자연스럽게 먼저 선수를 침으로써 그 후에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를 생략해낸 것이었다.
‘……사실 단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 미지의 땅에 가는 방법을 물었을 당시.
레이아가 했던 답변.
미지의 땅을 찾는 건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면 불가능할거란 말.
그녀의 정체를 몰랐을 때는 그저 비유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크로엘의 진짜 정체를 알고 들으면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자기 자신과 계약을 맺으면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물론 알고 들었을 때야 알게 되는 사실이고, 그전까지는 사실상 그거 하나로는 그녀가 공간의 악마라는 걸 추측하는 건 거의 불가능.’
하여간 파면 팔수록 악랄하기 그지없는 제작사였다.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아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걸로 그녀의 정체도 밝혔겠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아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미지의 땅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고 싶은데 어때?”
방금 전과 같은 질문.
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그전과는 사뭇 달랐다.
레이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 질문. 진명에 대한 대가지?”
“물론.”
진명에 대한 대가.
<이스페리아>의 설정에 따르면 악마의 진명을 밝힌 자에게는,
단 한 번에 한해 그 악마에게 거부할 수 없는 부탁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건 말이 부탁이지.
인간계로 온 악마에게 부여된 강제력과도 같았다.
한 마디로 <이스페리아>라는 세계의 절대법칙.
그 효과는 이미 과거 크루페돈 토벌전 당시.
거래의 악마 에르시온에게 사용함으로써 증명되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 현성이 레이아라는 진명을 밝힘으로써, 그 조건이 성립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는데 말이야…….”
레이아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늦은 거 알잖아. 대답은?”
그런 현성의 물음에 결국 레이아가 두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 알려줄게. 미지의 땅으로 가는 방법.”
그러면서 그녀가 손가락을 퉁겼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허공을 타고 공간이 일그러지며, 곧 검푸른 포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오오.
원하는 장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포탈.
이것이 바로 공간을 다루는 악마인 그녀의 능력이었다.
그대로 레이아가 포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내가 말한 미지의 땅과 이어지는 포탈이야.”
“고마워.”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이 너머를 넘어가면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시작될 터.
그렇게 현성이 포탈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직전이었다.
“……본체는 아직 괜찮아?”
현성이 레이아를 향해 물었다.
그와 함께 줄곧 작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레이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앞서 말했듯이 현재 눈앞에 있는 그녀는 사념체.
본체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본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마족의 영역 어딘가.
이미 그녀의 본체의 대부분은 마족의 수장이자, <이스페리아>의 메인보스 알케인에게 흡수된 상태였다.
공간을 다루는 특수한 능력.
마계와 인간계를 잇기 위해서는 그녀의 능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개상,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아의 본체는 알케인에게 완전히 흡수될 것이고 그때가 바로 <이스페리아>의 종막을 장식하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이었다.
“기왕이면 좀 더 인간계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
아카데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계탑 위.
레이아가 그 아래를 흘깃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그땐 내가 없을지도 모르지.”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아가 고개를 돌려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마지막에는 모두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서 만족이야.”
아카데미에 울려 퍼졌던 우쿨렐레의 선율.
그 안에는 그동안 그녀가 크로엘로서, 전해주고 싶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그대로 레이아가 후련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이제 가보라구. 난 그동안 남은 아카데미 생활을 만끽할 테니까.”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 역시 피식 웃으며 포탈과 레이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작별인사는 미리 해두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이에 현성이 발걸음을 내딛으며 짧게 인사했다.
“잘 있어.”
그런 현성의 인사에 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부디 그대가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길 바라네. 기사의 아이여.”
그렇게 말하는 레이아는 허풍쟁이 크로엘이 아닌,
지금껏 수많은 세계를 오가며 그 시작과 끝을 지켜봐왔던,
공간의 악마 레이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맙군.”
현성이 그녀가 공간의 악마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레이아 역시도 그가 기사왕 티리카의 후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발걸음은 머지않아 종막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또한.
-파아앗!
그 말을 끝으로 포탈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며 그대로 현성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뒤.
아카데미의 시계탑 최상층.
-사아아.
그곳에는 진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서서 아카데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컴컴한 공터.
그곳에 생긴 검푸른 포탈 사이로 현성과 알레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미지의 땅.]
알레시아가 주변을 살펴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사박, 그대로 발을 내딛자 풀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 멀리 보이는 수십 개의 묘와 비석들.
덕분에 지금 이곳이 밤이 찾아온 묘지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임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군.’
레이아가 말했던 미지의 땅.
마지막 기사들이 머물렀던 그 자리는 이미 묘지로 변한지 오래였다.
이를 증명하듯 주변에는 그저 고요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이 묘지 안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돌연 스산한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치며,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물러나라.”
그대로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형(人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름한 로브를 걸친 채.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의 노인.
그런 노인의 머리 위로는 이름이 떠있었다.
[묘지기 모리안]
무엇보다 그의 붉은 이름표.
보스 몬스터임을 뜻하는 증표였다.
그의 이름은 모리안.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물러나라.”
기사단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이자,
이번 에피소드의 중간보스였다.
이에 현성이 건틀렛을 매만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성, 먼저 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현성을 저지했다.
아니 저지하려는 찰나였다.
그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냐. 괜찮아.”
그런 현성은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재차 경고를 했음에도 앞으로 발을 내딛은 현성.
그러자 모리안이 주먹을 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쩔 수 없군.”
그와 동시에 순간 그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콰앙!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있던 땅이 움푹 꺼졌다.
그대로 어느새 모리안이 현성의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고를 무시한 오만의 대가, 죽음으로 갚아라!”
그와 함께 모리안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 그의 공격은 시계탑에서 마주친 유진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한 속도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보란 듯이 그 속도에 반응했다.
-채앵!
아니 단순히 반응한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건틀렛을 들어 공격을 막아내기까지.
이를 증명하듯 사방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공명음.
그가 유진보다 빨랐던 모리안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 에피소드의 보상으로 받은 사룡 카이락스의 드래곤 하트.
비록 아직 6퍼센트의 흡수율에 불과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보여줬다.
방금 공격을 막아낸 것이 바로 그 증거.
-끼기긱…!
그와 함께 모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모든 전력이 아니었다고 한들,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다니.
“제법이군.”
모리안이 단호하게 말하며 건틀렛 너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성이 그를 향해 말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뭐?”
그런 현성의 말에 모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허나 그도 잠시.
순간 모리안의 시선이 한 곳에 정지하였다.
“……?!”
그곳은 다름 아닌 현성의 건틀렛.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선명히 빛나는 은빛의 건틀렛.
그건 분명 모리안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의 것이었다.
“티리카 님?”
모리안이 중얼거렸다.
티리카, 기사왕이라고 불린 영웅이자, 기사단을 이끌던 수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묘지기 모리안이 기사왕 티리카의 건틀렛을 알아봅니다.]
[조건을 달성함에 따라 특수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묘지기 모리안의 상태가 적대적에서 우호적으로 변경됩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