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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98화 (198/240)

198화 성장의 기회(5)

하린의 말에 시연과 레이첼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

이에 하린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좋아요. 여기까지는 생각한 대로네요. 저도 오빠를 좋아하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으니까 넘어갈게요.”

“……”

“그럼 이번에는 조금 다른 건 물어볼게요.”

그대로 하린이 턱을 괸 채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포기할 마음이 있나요?”

그와 동시에 시연과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이어서 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없습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부끄러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흔들림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에 더해 시연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고작 그런 말 하려고 시작한 건가요?”

싸늘함이 전해지는 말투.

그런 시연의 말에 하린이 움찔거렸다.

그러면서 그녀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제 말은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저 대화를 해보자는 말이었는데…….”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슨 대화 말인가요?”

“그게 아니면 그냥 싸우고 싶은 거야?”

이에 하린이 애꿎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당연하게도, 그녀는 시연이나 레이첼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하린은 현성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구해준 시연과 레이첼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현성을 좋아하는 만큼,

시연과 레이첼도 좋아하고 있었다.

으레 아카데미의 다른 학생들이 그렇듯, 하린은 사실 전부터 학생회장인 시연을 동경하고 있었으며.

뱀파이어라는 정체를 드러낸 레이첼 역시도 존경하고 있었다.

하린 그녀 또한 반인반마를 정체를 숨기고 있던 입장.

그렇기 때문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각오와 결심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레이첼은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자신을 도와줬는데 그런 그녀를 미워한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그걸 알기 때문에 더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줄곧 언니라고 부르면서 일부러 대화를 주도하려 했는데.’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언니들이 자신을 구해준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나서 잘해보려 했건만 어째 일을 더 망치기만 하는 거 같았다.

‘바보 같아…….’

하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하지만 싸늘한 분위기 때문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지금 이 분위기가 마치 처음 마족으로 변한 그날의 반응과 겹쳐 보이는 거 같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순간.

-두근두근.

멀쩡하던 몸이 급속도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려지며 공황상태가 찾아왔다.

아니 찾아오려는 찰나였다.

-터억.

시연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하린을 달랬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죠?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시연의 토닥임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시연이 입을 열었다.

“저와 현성, 그리고 레이첼이 당신을 구해준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말아요. 무엇보다…….”

시연이 하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 귀여운 후배가 줄곧 저를 동경해왔다니. 이거 영광이네요.”

그런 시연의 말에 하린이 수줍은 듯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하린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 아니 잠깐. 근데 그걸 어떻게……!”

내가 시연 언니를 동경한다는 말을 말했던가?

분명 방금 전은 속으로만 생각했지 않는가.

그런데 시연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마치 독심술을 쓰는 초능력자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뭐 이미 정체가 드러난 거 어쩌겠어. 그리고 너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레이첼 역시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이에 하린이 당황한 듯 둘을 번갈아 보았다.

“레, 레이첼 언니까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사뿐, 알레시아가 하린의 어깨에 내려오며 말했다.

[이걸로 서로 오해할 일은 없겠지?]

“알레시아님?”

[이럴 때는 마법이 참 유용하단 말이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알레시아가 나머지 셋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

시연과 레이첼이 하린의 속마음을 알 수 있던 것은 모두 알레시아의 전음 덕분.

[그동안 드라마에서 서로 간의 오해 때문에 엇나가는 장면을 볼 때만 내 얼마나 답답했던지. 아무튼, 이번에는 그럴 일 없으니 다행이구나.]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셋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하린은 셋 중 가장 어릴 텐데도 불구하고 먼저 말을 꺼내려 한 것이 여간 기특했다.

그리고 그런 하린의 마음을 알고 달래준 시연은 또 어떠한가.

역시 연서가 괜히 시연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정체를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린이라면 괜찮다며 은근히 위로하는 레이첼까지.

셋 전부 다 그녀가 보기에는 대견하고 귀엽기 그지없었다.

“…….”

그대로 시연과 레이첼이 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전부 전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린이 아직 조금 부끄러운지 애써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그럼 굳이 제가 더 말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래도 난 궁금한걸?”

시연이 방금 전, 하린이 그랬던 것처럼.

턱을 괸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 셋 다 현성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그게…, 별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이에 레이첼 역시 장난스러운 말투로 턱을 괸 채 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결국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한 하린이 양 볼을 붉히며 외쳤다.

“서,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거였죠!”

앞서 말했듯이 하린은 현성도 좋아했지만, 시연과 레이첼도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마지막에 현성이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여전히 셋끼리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다시 또 좋아하는 사람들을 잃는 건 싫으니까…….’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와 함께 시연과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그런 둘의 말에 하린이 재빨리 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방금도 전음으로…?!”

이번에도 낱낱이 드러난 속마음.

덕분에 하린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

“알레시아님!”

[오늘 날씨가 참 좋군. 그렇지 않나?]

이에 알레시아가 창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작게 미소 짓고 있는 시연과 레이첼.

일주일 전, 숲속에서 삼파전을 벌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대로 잠시 뒤.

“대신 그럼 하나만 약속해.”

레이첼이 시연과 하린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서로 전력을 다해서 노력할 것.”

이어서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승리를 양보받는 건 별로거든.”

그런 그녀의 말에 시연과 하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둘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좋아요. 언니들이라고 양보 안 할거에요.”

아카데미의 식당.

이렇게 현성을 둘러싼 삼파전은 알레시아 덕분에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럼 저희도 일어날까요?”

“그래.”

“그래요. 아, 근데 오빠는 이클레아 교수님을 만나러 간다 했잖아요.”

그러면서 하린이 가볍게 물었다.

“설마 이클레아 교수님도 오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움찔.

그런 하린의 말에 시연과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언제부턴가 현성과 이클레아 교수님이 만나는 빈도가 늘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머지않아.

“에이. 설마.”

“괜한 걱정일 겁니다.”

시연과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애초에 둘은 학생과 교수 관계 아닌가.

그보다 더욱 특별한 뭔가가 있으면 모를까.

단순히 그 정도로는 별일 없을 터였다.

[…….]

이에 알레시아는 이번에는 조용히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하고 입을 닫았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기껏 셋의 훈훈한 분위기가 무너질 게 분명했다.

그와 함께 알레시아가 저 멀리 바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현성. 부디 조심하게나.]

알레시아의 한마디.

그런 그녀의 말에는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 * * * *

한편 이클레아의 집무실.

이 아닌, 아카데미의 옥상 구석.

그곳에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고 있었다.

“젠장, 멀쩡한 연구실을 두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클레아.

그 순간이었다.

옥상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하나.

“교수님?”

이에 이클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아니 얼굴을 가리려 하는 찰나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님. 안심하세요. 접니다.”

그는 바로 현성.

그러자 곧 현성임을 확인한 이클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걸어 나왔다.

“아. 그래. 왔구나.”

그런 그녀의 반응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현성의 물음에 이클레아가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녀가 멀쩡한 연구실을 두고, 기어코 인적이 드문 옥상까지 올라온 이유는 간단했다.

일주일 전, 교장은 물론이며 다른 교수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매지컬 레드임을 드러내는 새로운 흑역사를 하나 갱신했기 때문.

덕분에 그녀의 연구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이클레아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최근에는 일부러 연구실에 가는 걸 피하며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았다.

‘그나마 현성이 옥상을 추천해줘서 다행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진짜 비밀의 숲에라도 가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뿅! 하는 상큼한 효과음과 함께 나타난 흰색 토끼.

[왜 숨어다니는 거야? 매지컬 레드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구!]

그녀는 이클레아와 계약을 맺은 신수.

로미였다.

그와 동시에 이클레아의 손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터업!

그대로 이클레아가 로미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이 망할 토끼 새끼야.”

[읍읍!]

“그게 아니면 정녕 죽음이라는 형태로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원하는 건가? 응?”

이클레아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로미를 째려보며 물었다.

그러자 로미가 움찔거리며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뒤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

이에 로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정녕 마법소녀와 신수의 관계인가.

아무튼 그렇게 로미를 조용히 시킨 이클레아가 혀를 찼다.

“내가 이러니 담배를 못 끊지.”

그녀가 중얼거리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클레아가 현성을 흘깃 바라보고는 곧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피셔도 괜찮습니다만.”

“……됐어.”

그러나 이클레아는 담배 대신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와 함께 그녀가 현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도 줄까?”

담배 대신 막대사탕을 문 채.

사탕을 내미는 이클레아.

원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제법 신선한 모습이었다.

‘난 기왕이면 담배가 좋지만…….’

현성은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하여간 학생으로 빙의한 게 문제지. 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대로 현성이 막대사탕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이클레아와 같이,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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