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성장의 기회(4)
그런 레이첼의 등장에 현성을 뒤따라오던 시연이 물었다.
“오셨으면 안에 들어오지 그랬습니까.”
시연이 트레이닝 룸으로 오기 전까지는 입구에 레이첼이 보이지 않았으니,
그녀는 적어도 시연이 하린과 대련을 할 동안 계속 밖에서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그들과 트레이닝 룸 안쪽을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땀 흘리는 건 질색이거든.”
실제로 레이첼은 평소에는 트레이닝 룸은커녕 밖에 잘나가지도 않는다.
그녀의 행동반경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숙사와 강의실이 전부.
그마저도 강의실은 사실상 현성과 같이 있기 위해 가는 거에 가까웠다.
“그래도 언니도 막상 운동하면 기분 좋을걸요?”
시연의 옆에 있던 하린이 슬쩍 얼굴을 보이며 웃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지치긴 했지만, 꽤나 상쾌해 보였다.
그러나 레이첼의 의견은 강경했다.
“싫어. 무엇보다 난 너희들에 비해 코가 민감하단 말이야. 땀 냄새는 별로야.”
어차피 현성을 포함한 하린과 시연은 이미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의도한 것 아니지만, 서로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그들의 앞에서는 구태여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언니도 같이 대련하면 좋을 텐데…….”
하린이 여간 아쉬움이 남는 모양인지 중얼거렸다.
그리고 풀 죽은 강아지 같은 그녀의 모습에 레이첼이 작게 움찔거렸다.
“……윽.”
괜히 자신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잠시 뒤.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도도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돼, 됐어. 글쎄 땀나서 싫다니까.”
그런 레이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지만, 어딘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동시에 그때였다.
현성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 미안. 그럼 잠시 떨어져 있을게.”
안 그래도 현성은 운동에 연이은 대련으로 적지 않은 땀을 흘린 상태.
레이첼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아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대로 그가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덥썩.
돌연 레이첼이 현성의 옷깃을 잡았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땀나는 거 싫다며?”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너, 넌 괜찮아.”
어느새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볼은 운동을 한 것처럼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어서 그런 그녀의 모습에 뒤에 있던 시연과 하린이 움찔거렸다.
하여간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안 되었다.
[호오, 이걸 노린 건가.]
곧바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알레시아가 말했다.
그 말에 현성이 알레시아와 레이첼을 번갈아 보았다.
“……뭐가?”
[아니다. 그런 게 있다.]
현성의 물음에 알레시아가 그저 재미있다는 듯.
작게 조소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럼 어서 식당으로 갈까요?”
시연이 현성과 레이첼 사이를 칼 같이 들어오며 말했다.
그와 함께 하린 역시 시연의 말에 맞장구치며 현성의 팔을 끌었다.
“마, 맞아요. 오빠, 저 배고파요.”
자연스러우면서도 빠르게 들어온,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견제였다.
이에 레이첼이 시연과 하린을 째려보고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짧은 틈조차도 허락하지 않다니.
허나 그도 잠시.
“레이첼도 갈 거지?”
“……응?”
“아니면 혹시 벌써 먹었으려나.”
지금은 어느덧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물론 현성과 시연, 하린은 대련하느라 아침을 걸렀지만, 다른 학생들이라면 진즉에 다 아침을 먹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먼저 먹었으면 그냥 우리끼리…….”
그런 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첼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아직 안 먹었어.”
사실 레이첼은 이미 기숙사에서 나오기 전,
간단하게 남은 식빵을 구워 먹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 안 먹었다고 했다가는 꼼짝없이 혼자 남을 게 분명할 터.
‘애초에 아침은 잘 챙겨 먹지도 않지만…….’
오늘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의 옆을 차지하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같이 가지 뭐.”
그러면서 레이첼이 시연과 하린을 번갈아 보며 작게 웃었다.
“둘 다 상관없지?”
은근히 승리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투.
이에 시연과 하린이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미소와는 달리.
셋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미있군.]
확실히 최근 너튜브에서 하린이 추천해준 드라마도 재미있었지만,
그 드라마들보다도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재미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액정 너머가 아닌, 무려 바로 눈앞 1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현성, 인간들이 왜 그렇게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다.]
“……뭐?”
현성이 갑자기 알레시아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도 잠시.
“아무튼 그럼 다 같이 가는 걸로 결정 난 거지?”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식당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역시 운동 후에는 단백질을 보충해줘야지.
그리고 이번에는 하린의 식단도 봐줄 생각이었다.
‘하린은 아무래도 근육량에 초점을 두는 게 좋으려나…….’
그대로 그가 고기 위주의 메뉴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아카데미 내에 위치한 식당.
그곳에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다양한 메뉴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었다.
애초에 아카데미는 현성과 같은 몰락가문도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 검술 명가 하 가문을 포함해 여러 유명가문이 다니는 곳.
그만큼 괜히 학비가 비싼 게 아니었으며, 식당 역시도 그에 걸맞은 퀄리티를 자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돈을 내는데 밥이 맛없었으면 진짜 내가 어떻게든 항의했다.’
현성이 식당가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역시 특히 밥에는 진심을 보이는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지글지글.
현성이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오늘 그의 선택은 다름 아닌 소고기 스테이크.
그대로 하나둘씩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하린은 현성과 같은 소고기 스테이크.
시연은 연어 스테이크를 곁들인 샐러드.
레이첼은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과일 샐러드를 주문했다.
“오빠는 항상 소고기네요.”
하린이 현성과 그의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현성은 한 끼에 한번 씩은 꼭 스테이크를 먹고는 했다.
사실 오늘 하린의 스테이크 역시도 현성의 추천으로 시킨 음식.
“그야 운동 후에는 단백질이니까.”
현성이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며 대답했다.
그러자 붉은 기가 적당히 도는 아름다운 단면이 보였다.
그와 함께 고기를 따라 흐르는 육즙.
“너도 당분간은 고기를 꾸준히 먹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잘 안 나면 간단하게 닭가슴살을 먹는 것도 좋아.”
현성이 포크로 고기를 푹 찍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하린이 싱긋 웃고는 고기를 썰었다.
“네. 그래서 오빠랑 같은 스테이크로 시켰잖아요. 원래대로라면 샐러드를 먹었겠지만 말이죠.”
하린이 시연과 레이첼 앞에 놓인 샐러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에 시연이 연어 스테이크를 마저 썰며 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린 양은 체중감량보다는 근육을 키우는 게 우선이니 현성의 말대로 샐러드보다는 스테이크가 좋을 겁니다.”
“그럼 시연 언니는 체중감량 때문에…….”
그 말에 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밸런스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음. 그렇군요. 그럼 레이첼 언니는요?”
하린이 시연에 이어 레이첼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런 하린의 물음에 포크로 샐러드를 깨작이던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어? 나, 나야 뭐…. 그냥 오늘은 샐러드가 끌려서 시켰지.”
“언니는 평소에도 샐러드 자주 드시나 봐요?”
“……그런 셈이지.”
레이첼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원래 그녀는 딱히 샐러드를 즐겨 먹지도, 현성이나 시연처럼 체계적으로 식사 스케줄을 짜지도 않는다.
그야 뱀파이어는 본디 그런 걸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뭐 경호원들은 선지해장국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레이첼이 과거 경호원들이 말한 썰을 떠올렸다.
선지와 국물을 함께 먹으면 절로 “크어어어!”하고 단전에서 만족스러움이 차오른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녀는 주로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가.
솔직히 샐러드 같은 것보다는 카라멜 마끼야또가 제일 맛있었다.
‘……밤샐 때 좋기도 하고.’
덕분에 한창 철의 권7 랭킹전을 치를 때도 애용하곤 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이 오늘 샐러드를 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과일 샐러드가 제일 덜 배불러 보이니까.
앞서 말했듯 레이첼은 이미 아침을 먹고 온 상태.
그런 그녀에게 있어 적당히 식사시간을 같이 하기에는,
샐러드만큼이나 좋은 선택이 없었다.
‘물론 좋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레이첼이 청포도 한 알을 포크로 찍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략 10분 정도 지났을까.
현성이 스테이크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은 찰나, 돌연 현성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우웅.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이에 현성이 액정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
그대로 잠시 뒤.
저 뒤에 통화를 하던 현성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던 하린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그가 시연과 하린,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응. 이클레아 교수님.”
“……이클레아 교수님이요?”
현성이 이클레아 교수와 자주 만나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이클레아 교수가 가르치는 연금술 분야에서 타 학생에 비해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만큼 관심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당장 저번에도 그랬다.
물론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마족의 습격 때도 이클레아 교수를 부른 건 현성이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현성이 하린과 시연, 레이첼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이클레아 교수님이 잠시 말해야 할 사안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먼저 가봐야 할 거 같네.”
“그래요?”
“미안해. 워낙 중요한 일 같아서 말이야.”
이에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중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죠.”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시연이나 레이첼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그대로 현성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다음에도 같이 먹자.”
현성은 그렇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식당에 남은 시연과 하린, 레이첼.
그런 세 명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빠는 갔네요.”
“갔군요.”
“갔네.”
허나 그도 잠시.
하린이 나이프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시연 언니랑 레이첼 언니도 현성 오빠 좋아하죠?”
하린이 대뜸 둘을 향해 물었다.
그 물음에 연어를 썰던 시연이 움찔거렸다.
그와 함께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집으려던 레이첼이 삐끗거렸다.
“뭐, 뭔데 갑자기!”
“그게 무슨…….”
그런 둘의 반응에 하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오빠도 없는 마당에 조금은 솔직해지자구요. 애초에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면서 하린이 시연과 레이첼을 향해 재차 물었다.
“둘 다, 현성 오빠 좋아하죠?”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