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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94화 (194/240)

194화 성장의 기회(1)

숨 막힐 듯한 적막감 속.

시연, 레이첼, 하린의 눈빛이 모두 현성을 향해 있었다.

이에 그는 애써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며 화제를 돌렸다.

아니 화제를 돌리려했다.

“그나저나 다들 고생했어. 그러니까 일단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허나 그도 잠시.

시연이 칼같이 화제전환을 차단했다.

“그것도 좋지. 그런데 현성,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때.”

그러면서 그녀가 싱긋 웃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하린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 어떻게 생각해?”

그런 시연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현성의 입장에서는 왠지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옆에 있던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어디까지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궁금해서.”

레이첼이 은근히 뒷말을 강조하며 작게 조소했다.

오늘따라 무섭게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

덕분에 현성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듯 했다.

‘……차라리 사룡 카이락스를 한 번 더 잡는 게 나을 정도군.’

그야말로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곧바로 처형대에 목이 올라갈 것만 같은 긴장감이었다.

이에 현성이 과거 공략을 짰을 때처럼,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좋아하지. 너희도 그렇고, 알레시아도 그렇고 이번 사태를 막아준 교수님들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큰 사태로 번질 뻔 했어. 그래서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어.”

현성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시연과 레이첼, 하린, 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을 전했다.

[……임기응변치고는 제법이군.]

좋아하다.

그 사전적 의미는 친밀하게 여기다.

즉, 호감과 친밀감만 가지고 있으면 전부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만큼 활용도와 범위가 무궁무진하게 넓은 말.

현성은 이를 적극 이용해 좋아한다는 말이 감사하다는 뜻으로 전달되도록 적절하게 포장하여 둘러댔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순발력만큼은 인정하는 바.

그러나 그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 가문의 차기가주.

그리고 피의 왕국의 공주.

게다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둘의 시너지는 상상이상.

“그래? 그럼 방금 전 하린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도 선배 혹은 생명의 은인으로서 좋아한다는 뜻이겠네.”

“…….”

“그렇다면 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현성과 하린을 번갈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말 속에는 은근한 경고가 담겨있었다.

이에 시연이 작게 감탄하며 옆에 있는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물론 그녀를 견제할 때도 충분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의도한 대로 판을 유도하는 저 화술.

공동의 적을 두고 임시동맹을 맺은 레이첼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었다.

‘……아주 작정을 했군.’

그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긴장되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이른바 레이첼의 진심 모드.

게임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집중력과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시연 언니랑 그쪽은…. 레이첼 선배님이라고 하셨죠?”

줄곧 가만히 하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회심의 수를 숨기고 있는 듯 했다.

“그래.”

“그럼 우선 언니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그대로 하린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밝게 미소 지었다.

“언니 말이 다 맞아요. 후배로서, 은인으로서 좋아한다고 말했을 수도 있죠.”

이어서 하린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게 아니면……, 이성으로 좋다한다고 말했을 수도?”

-움찔!

그 말에 레이첼이 흠칫거렸다.

그러자 하린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는,

방금 전 레이첼이 그랬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판단은 언니 마음대로 하세요.”

그와 함께 셋의 기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알레시아가 흥미로운 듯 미간을 좁혔다.

[호오…….]

저런 식으로 허를 찌르다니.

하린 역시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단순히 이번 말싸움으로만 본다면 이번에는 하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저, 저, 저……!’

이에 레이첼이 입술을 앙다물며 하린을 째려보았다.

곧바로 그녀가 현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수밖에 없었다.

“현성, 네가 직접 말해.”

“응? 난 방금 말했다시피…….”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똑똑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레이첼이 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말했다.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은 매서운 눈빛.

아무래도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애매한 대답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그으게 말이지…….”

강경한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재빨리 알레시아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알레시아? 미안하지만 이제 곧 한계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일세.]

‘그러니까 이제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현성의 전음.

이에 알레시아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즐길 만큼 즐겼으니, 슬슬 위험해지기 전에 구해줄 생각이었다.

[레이첼. 대화 중에 미안하지만 잠시 실례해도 되겠느냐?]

레이첼과 현성 사이.

알레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무슨 일인데?”

레이첼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저 멀리 숲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은 현성이 카이락스를 쓰러트린 직후, 그의 육체가 추락한 방향이었다.

[전부터 미약하지만 줄곧 사룡 카이락스의 기운이 계속 느껴져서 말이지. 아무래도 현성과 확인해봐야 할 텐데 괜찮겠지?]

“…….”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레이첼이 알레시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룡 카이락스에 관한 일.

그것도 알레시아가 직접 말을 꺼냈다.

이에 시연과 하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불러주세요.”

그런 셋의 모습에 알레시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고맙구나. 그럼 현성? 가자꾸나.]

“알겠어.”

동시에 현성이 알레시아의 등에 올라타고.

펄럭, 알레시아가 날갯짓에 바람이 일며 둘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어서 들려오는 알레시아의 전음.

[현성. 전에 말했듯이 나는 소고기가 좋다.]

‘……돌아가면 준비하도록 하지.’

위기탈출의 대가로 소고기 정도면 싸게 먹힌 편이었다.

그와 함께 현성과 알레시아가 카이락스에 추락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아카데미와 숲의 외곽이 맞닿은 곳.

현성을 태운 알레시아가 천천히 착지했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는 사룡 카이락스의 사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의 피막, 뼈를 드러내고 있는 썩은 살점.

거기다 브레스에 맞아 군데군데 소멸된 부분까지.

사룡이라는 그 이름답게, 카이락스는 죽음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성과 알레시아의 합동기.

용의 광시곡이 카이락스를 집어삼킨 직후, 현성의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사룡(死龍) 카이락스를 쓰러트렸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시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내려앉은 죽음의 기운.

이는 아직 카이락스의 힘이 남아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대로 현성이 알레시아의 등에서 내려 그의 사체를 살폈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의 발걸음이 카이락스의 가슴팍에 정지하였다.

-처억.

동시에 그런 그의 앞을 따라,

피와 살점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그 작은 틈 사이로 검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그 기운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카이락스의 드래곤 하트.

[……왜 계속 카이락스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게 원인이었군.]

방금 전 알레시아가 했던 말.

그것은 단순히 급조한 말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현성이 드래곤 하트를 살펴보며 말했다.

“아마 남은 카이락스의 육체 중 가장 온전한 부분이 아닌가 싶네.”

그런 그의 말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맞네. 애초에 드래곤이나 되는 존재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동력원이 필요하기 마련. 그래서 드래곤 하트는 그대로 유지해둔 모양이야.]

물론 그렇다고 앞서 말했듯.

카이락스가 다시 부활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간계의 패왕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힘만은 아직 그 존재감을 남기고 있었다.

-고오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카이락스는 지옥문에서 소환되었을 당시.

온전한 드래곤과는 달리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마나라고는 오로지 육체를 움직이기 위한 게 전부.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카이락스를 쓰러트림과 동시에 파괴되었어야 할 드래곤 하트가 이렇게 멀쩡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카이락스의 기운이 남아있는 이유는 확인.

단순히 드래곤 하트에 잔류된 마나덕분에 일어난 일이니, 다행히 크게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자, 그럼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가 고민이군.]

알레시아가 드래곤 하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카이락스가 죽으면서 드래곤 하트 또한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으면 모르겠지만,

언데드라는 특수성 때문에 변수가 발생했다.

사룡의 힘이 남아있는 드래곤 하트.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된 미사일, 아니 핵폭탄이 눈앞에 있는 격이었다.

[물론 제일 좋은 건 잔류마나가 빠져나갈 때까지 가만히 두는 거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꽤 난감하군.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글쎄…….”

드래곤 하트는 블랙마켓에서도 극히 드물게 거래될 만큼 귀한 재료.

아마 당장 손톱만큼만 떼어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할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카이락스의 드래곤 하트를 추출했다가 중간에 터지기라도 하면?

‘기껏 구해낸 아카데미가 그대로 날아갈 판.’

그와 함께 미하일의 억장도 무너져 내릴게 분명했다.

아니 그의 억장뿐일까.

그건 아마 교수들도 마찬가지일 터.

특히 이클레아라면 더더욱 그럴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그동안 꽁꽁 숨겨온 마법소녀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아카데미를 지켜냈더니, 그 아카데미가 다시 박살난다고 해봐라.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현성이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역시 그냥 미하일을 포함한 교수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으려나.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이에 잠시 멍하니 서있던 그가 돌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대로 현성이 알레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레시아, 아무래도 더 좋은 방법이 생긴 거 같은데?”

그러면서 현성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다.

[사룡(死龍) 카이락스를 쓰러트린 보상으로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사룡(死龍) 카이락스의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시겠습니까?]

[Y/N]

[본 선택의 우선권은 현재 유현성에게 있습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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