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악몽(17)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유령극단의 연주는 확실히 먹혔다.
방금 전 하린의 반응이 그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허나 그것도 잠시.
하린은 자신의 손을 잡는 것 대신 현성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세뇌를 풀었다고?’
유진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유령극단과 하린을 번갈아보았다.
지금껏 극단의 연주를 듣고도, 세뇌에 빠지지 않은 것은 현성이 유일했다.
물론 그건 그가 검신 하신우의 검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하린이 스스로 세뇌를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유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재빨리 유령극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세뇌가 풀렸다면 다시 걸면 그만이었다.
“연주를 계속해라!”
그런 그의 외침과 동시에 유령극단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어두운 숲을 가득 메우는 선율.
그대로 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움찔!
순간 심장이 주저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어서 주변의 소리가 서서히 차단되면서 심장박동소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의 선율이 단순히 세뇌를 발동시키는 일종의 트리거였다면,
이번에는 세뇌를 발동시킬 뿐만이 아니라, 하린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반인반마의 피를 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연주였다.
그에 따라 그녀의 주변을 따라 검은 마기가 넘실거렸다.
-꾸구국!
그만큼 하린이 주먹을 움켜쥐며 연주에 저항하려 했으나, 그럴수록 연주는 더욱 더 격렬하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멈칫.
쉬지 않고 떨리는 하린의 몸이 멎었다.
그대로 현성의 뒤에 있던 그녀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 하린의 모습에 유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제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한들.
세뇌의 선율은 벗어날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이대로 하린을 회수하고 현성을 따돌리는 것 뿐.
‘물론 따돌리는 게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하린만 회수한다면 일은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질게 분명했다.
곧바로 과거 시계탑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진이 하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 돌아가자. 하린.”
이에 하린이 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그녀가 현성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하린을 붙잡지 않았다.
“…….”
그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을 뿐.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유진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린이 유진의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응, 돌아가자. 오빠.”
그 말에 유진이 승리를 확신하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끝.
아카데미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반인반마의 피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기회는 충분했다.
‘됐다…!’
그대로 유진이 하린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오는 하린.
이어서 유진이 하린과 함께 도망치려는 찰나였다.
-꽈악.
돌연 하린이 그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와 함께 하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하자. 전부.”
“……뭐?”
하린의 말에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그도 잠시.
하린의 주변을 타고 넘실거리던 마기가 한 순간에 뚝. 잦아들었다.
-파아앗.
그대로 그녀의 몸을 타고 솟아나는 환한 금색의 입자.
동시에 치이익, 유진의 손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성력?!”
신성력이 분명했다.
그것도 단순히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육체를 태울 정도로 강한 신성력.
이에 유진이 재빨리 손을 빼려했지만, 점점 강해지던 연주처럼 하린은 더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이런…!”
유진은 인간이 아닌 언데드.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몸이 붕괴될게 분명했다.
그와 함께 유진이 고개를 든 그때.
“…….”
그의 눈에 보인 건 반대편에 가만히 서있는 현성이었다.
그런 그를 보는 순간.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린이 그를 지나칠 적에, 현성이 가만히 있던 이유를.
아니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다.
움직일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하린은 더 이상…….’
세뇌에 걸린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대로 유진이 이를 갈았다.
-으드득!
이에 현성이 작게 조소하며 반대편이 있던 하린을 흘깃 바라보았다.
울려 퍼진 유령극단의 선율.
유진을 향해 걸어가는 하린.
거기다 주변에 피어오르는 검은 마기까지.
처음에는 현성 역시 그녀가 세뇌에 걸린 줄 알았다.
이에 재빨리 유령극단의 연주를 멈추려 했으나.
하린이 그를 지나치던 찰나.
그녀가 현성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부탁해요. 제 손으로 마무리 짓게 해주세요.”
“…….”
“오빠가 항상 했던 말처럼, 후회는 항상 늦으니까요.”
그런 하린의 말은 애초부터 그녀가 세뇌에 걸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보는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있던 뿔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역안 역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하린의 상처를 타고 흐르는 피.
그런 그녀의 피는 보라색이 아닌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더 이상 하린은 마족이 아니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 * * * *
반인반마의 피.
그 잠재력은 인간과 마족, 두 진영이 노릴 만큼.
무궁무진한 힘을 품고 있었다.
마족 특유의 재생력과 강력한 육체.
그 뿐만이 아니라, 숨겨진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열쇠의 역할까지.
반인반마의 피는 쓰기에 따라 세상의 운명이 갈린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파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당장 <이스페리아>의 유진이 그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가 마족진형을 선택하면 본인은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최종전쟁은 마족의 승리로 끝나며 그를 제외한 인간은 전부 죽는다.
힘의 대가. 그것은 세상의 멸망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의 동생 하린도 마찬가지.
이처럼 반인반마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무엇보다 하린의 마족화와 그녀가 꿔왔던 악몽이 이를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몸이 아직 반인반마의 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한,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
만약 하린이 자신 안의 반인반마의 피를 받아들이고,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단언한다. 그녀는 <이스페리아>의 그 누구보다도 큰 성장 폭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린은 유진의 세뇌로 인해 이미 한 번의 마족화를 경험한 상태.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 과정에서 하린의 몸은 이미 각성한 피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정신적인 문제였다.
하린은 과거 반인반마라는 이유로 온갖 혐오와 차별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금껏 줄곧 자신을 감춰왔다.
자신의 정체를, 자신의 힘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
정체가 드러나면 그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기에.
허나 언제나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사람이, 모두가 떠났다고 생각하던 때에도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 걸 깨달은 지금.
하린은 제 스스로의 힘으로 세뇌를 풀어내고,
한 차례 성장할 준비를 끝마쳤다.
-스으으.
그에 따라 이제는 10년 전 대변동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보여준 무위처럼.
유일하게 검성식을 다룰 수 있는 주인공 유진처럼.
자신의 힘을 개화할 순간이 도래했다.
-파아앗!
그대로 하린의 금발이 눈부시게 빛을 뿜어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금빛을 품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성녀(聖女) 유하린의 모습.
그와 함께 그녀의 주변으로 신성력이 폭사되었다.
“아, 안 돼,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유진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허나 그의 외침과는 달리 점차 붕괴되어 가는 육체.
이에 유진이 이를 악물며 검을 부여잡았다.
원래의 목적은 어떻게든 하린을 회수하는 것이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역으로 그가 당할 위기였다.
어차피 필요한건 정확히 하린의 아닌, 그녀의 피.
죽여서라도 피만 챙기면 문제없었다.
-콰악!
그대로 유진이 검을 부여잡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에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지마. 오빠.”
하지만 유진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매정하게 대답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해라.”
이미 그곳에는 하린 그녀가 기억하는 오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계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유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린을 찌르려던 찰나였다.
-푸욱.
단검 한 자루가 그의 가슴팍에 박혔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
다름 아닌 시계탑에서 그가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 하린, 그러니까 하린의 모습으로 변해있던 현성에게 건넨 단검이었다.
그때의 단검이 지금 왜 여기에?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런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마워.”
“……뭐?”
“덕분에 확신이 들었어.”
그대로 하린이 단검을 움켜쥔 채.
더욱 더 깊이 유진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그와 함께 하린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넌 우리 오빠가 아니야.”
단호한 한마디.
그렇게 말하는 하린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파아아앗!
동시에 단검을 타고 방대한 신성력이 폭발하며,
밝은 빛이 유진은 물론이며 어두운 숲을 가득 메웠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운 숲 속.
신성력의 여파가 남기고간 금빛 입자가 눈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그 아래.
무릎을 꿇은 유진과 하린이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령극단은 신성력의 폭발에 휘말려 사라진지 오래.
“사라… 지고 싶… 지 않아…….”
유진이 작게 웅얼거렸다.
그의 금발이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이미 팔과 다리를 비롯한 육체는 신성력에 불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그 본디의 존재.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에 하린이 품속에서 브로치 하나를 꺼냈다.
하린의 목에 걸린 브로치에 똑같은 모습이었다.
옛날에 그녀의 부모님이 자신과 오빠에게 건네주었던, 동시에 그녀의 오빠가 하린을 위해 희생하던 그 날의 숲.
그곳에서 찾아낸 오빠의 유품이었다.
“…….”
그대로 하린이 유진의 목에 브로치를 걸어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잘 자. 오빠.”
시계탑에서 재회한 유진이 그녀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그런 그녀의 말은 눈앞의 유진이 아닌, 죽은 오빠를 향해 남기는 마지막 인사였다.
-푸스스.
그 짧은 인사를 끝으로.
유진의 몸이 형체도 없이 부서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재와 브로치 뿐.
하린이 그런 브로치를 가슴에 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타고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터억.
하린의 어깨 위로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현성의 손이었다.
이어서 그가 하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그러자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만 건드려도 당장에라도 무너질 거 같았다.
“그러니까…….”
그대로 하린이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현성을 껴안았다.
-꽈악.
그와 함께 하린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이대로 잠시만…, 있어주세요.”
오빠가 죽은 그날과 닮은 어두운 숲 속.
하린은 현성을 꽈악 껴안은 채.
그의 품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슬픔을 토해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