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악몽(16)
추락하는 카이락스.
그리고 그건 그의 등에 타고 있던 하린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현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알레시아.”
사룡 카이락스를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허나 이번 에피소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진은 끝까지 하린을 노릴 터.
그가 이렇게 쉽사리 반인반마의 피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 피만이라도 차지하려들게 분명했다.
그만큼 남은 현성의 목표는 단 하나.
‘……하린의 구출.’
그런 현성의 말에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알레시아가 시계탑과 그 아래 움직이는 언데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지옥문에서 나온 언데드들이 남아있었다.
지옥문은 닫혔고, 카이락스도 쓰러트렸으나 역시 그 수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둘 다 자리를 비우는 것은 무리.
이에 알레시아가 말했다.
[먼저 가보거라. 곧 뒤따라가겠다.]
동시에 부드러운 바람이 현성을 감싸며, 그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알레시아의 마법이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떨어지는 하린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는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지.]
“고마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쉬이익!
현성의 귓가에 들려오는 매서운 바람소리.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떨어지는 하린을 잡아 품안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를 안았다.
‘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닿기 직전.
현성의 발끝을 따라, 바람이 날개를 펼쳤다.
그러면서 그의 주변으로 나뭇잎이 흩날렸다.
“…….”
그런 현성이 착지한 곳은 아카데미 외곽에 위치한 숲 어딘가.
이를 증명하듯 사방에는 빽빽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가 조심스레 하린을 바닥에 내려두고 상태를 살폈다.
아니 살피려는 찰나였다.
-쐐액!
울창한 나뭇가지에 가려져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숲속.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날카로운 검격이 현성을 향해 날아왔다.
이에 현성이 재빨리 몸을 틀었다.
-피잇.
곧 현성의 볼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그와 함께 반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목을 노린 공격이었는데 아쉽군.”
그는 다름 아닌 하린과 똑같은 금발의 남성.
유진이었다.
이어서 그가 검을 털어내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사룡 카이락스를 쓰러트린 건 인정하지. 허나 거기까지.”
-처억.
유진이 현성을 향해 검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하린은 포기해라.”
회심의 카드. 카이락스는 보기 좋게 박살났다.
그리고 아마 나머지 언데드들도 머지않아 정리될 게 분명했다.
이걸로 아카데미 침공 계획은 진즉에 물거품으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
그만큼 원래대로라면 유진 역시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난 뒤.
후일을 도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하린.
반인반마의 피의 소유자이자, 성녀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그러니까 반인반마의 피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계획쯤은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건 그렇다한들.
하린만큼은 어떻게든 회수해야했다.
“……싫다면?”
그의 말에 현성이 대답했다.
그러자 유진의 입을 타고 어금니 갈리는 살벌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처억.
유진이 현성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의 검신을 타고 일렁이는 흑색의 검기.
그대로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없지.”
그와 함께 피어오르는 진득한 살기.
그런 유진과 현성 사이를 타고 숨이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그때였다.
“……오빠?”
현성의 뒤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러자 현성이 손을 펼치며 하린을 가로막았다.
“하린아. 그대로 있….”
허나 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
돌연 유진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이어 몰아치는 검기의 폭풍.
-콰드드득!
그런 유진의 공격은 거칠게 바닥을 훑으며 현성까지 갈아버릴 기세로 날아왔다.
<이스페리아>의 주인공 유진만이 쓸 수 있는 검성식이었다.
이에 현성이 재빨리 주먹을 움켜쥐며 정권을 날렸다.
-화르륵…. 콰아아앙!!
그대로 현성의 화염과 유진의 검기가 부딪히며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솟아나는 자욱한 연기 너머.
유진이 재차 현성의 목을 노리며 검을 날렸다.
‘최대한 빨리 처리한다…!’
아무리 이곳이 숲속이라 한들.
아카데미의 영역 안.
길게 시간을 끌었다가는 불리해지는 쪽은 유진이었다.
허나 그 상대는 현성.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곧바로 그가 팔을 들어 검을 막았다.
-채앵… 끼기긱!
은색의 건틀렛과 검이 맞부딪치며 그 사이로 날카로운 마찰음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던 찰나, 유진이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반응은 좋았지만, 이미 늦었어.”
동시에 그의 그림자를 타고 유령극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기긱, 그와 함께 귀가 찢어질 듯.
사방으로 세뇌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 * * * *
-움찔!
이에 하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유진이 그런 하린을 향해 외쳤다.
“너도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 인간들은 결코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과거 시계탑에서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런 유진의 외침에 하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방금 전 눈앞에 펼쳐져 있던 숲도,
유진과 현성의 모습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
끝없이 펼쳐진 무저갱의 공간 속.
하린이 천천히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인 하얀 손.
그곳에는 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녀의 마기가 교수의 복부를 꿰뚫었을 때 묻은 피였다.
이어서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학생들.
그 중에는 하린의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그녀가 황급히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콰직!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줄기가 친구들의 목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 줄기의 정체가 자신의 마기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이제 그만…….”
하린이 허공에 손을 뻗은 채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이미 통제를 벗어난 마기는 무차별적으로 친구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끄아아악!!”
“저, 저리 꺼져!!”
-콰드득! 푸욱! 콰직!
귓가를 타고 들려오는 건 비명소리와 살점이 찢기는 파열음이 전부였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하린의 발밑을 따라 뭔가가 굴러왔다.
-데구르르.
곧 그 정체를 확인한 그때.
하린이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건 다름 아닌 목이 잘린 친구들의 머리통이었다.
“…….”
아무 말 없는 그들의 눈에 담긴 건 과거와 똑같은 경멸과 공포뿐이었다.
반인반마를 향한 혐오와 차별.
그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결국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하린이 자신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허나 닦으면 닦을수록,
손에 묻은 피는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진해졌다.
이에 하린이 손을 닦다 못해 아예 피부를 뜯어내려는 듯, 손톱으로 거칠게 손을 긁었다.
“제발…, 사라져…. 없어지란 말이야!!”
하린이 울음을 토해내며 절규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따라 상처가 늘어났다.
동시에 한 데 뒤섞인 피는 이제 어느 게 교수와 친구들의 피 인지, 자신이 피 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찰박.
어느새 그녀의 발밑에는 피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 웅덩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이마에는 뿔이 솟아있었고, 흉한 역안을 타고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내가 왜…, 나도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하린이 고통스러운 듯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오빠가 죽었을 때도.
어떻게든 버텨왔다.
끝까지 버티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허나 그 끝에 기다리는 건 오직 절망뿐이었다.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받아준다며… 친구라며…….”
우정을 말하던 그들의 입은 결국 사탕발림에 불구했으며.
선의라고 믿었던 가문의 이면에는 추악한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그대로 하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하린,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그 앞에는 자신의 오빠 유진이 서있었다.
그와 함께 유진이 하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리고 하린이 내민 유진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귓가를 타고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 지마…. 신… 차려!”
그 목소리에 오빠의 손을 잡으려던 하린이 멈칫거렸다.
어딘가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이에 유진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아무것도 들을 필요 없어.”
“…….”
“자, 내 손을 잡아.”
허나 그 순간이었다.
쩌적,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방금 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포기하지 마! 정신 차려!”
“이건…….”
“유하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하린이 움찔거렸다.
그럴수록 사방의 균열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후회는 항상 늦잖아!!”
희미하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진 그때였다.
-챙그랑!
눈앞의 유진을 물론이며, 주변의 공간이 산산조각 박살났다.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파편사이.
하린의 앞에 보인 모습은.
“……현성… 오빠?”
현성이었다.
그와 함께 하린의 머릿속을 타고 격통이 느껴졌다.
이에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음과 동시에 그동안의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처음은 현성에 관한 기억이었다.
선천강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그.
얼음무덤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토닥여주는 모습.
그리고 다음은 유진이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헤어지던 마지막 그때.
시계탑에서 다시 조우한 오빠.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유진과 그의 뒤에 있던 얼굴 없는 극단.
이어서 울려 퍼지던 선율.
그리고 시계탑에서 자신을 찌르며 히죽 웃는 유진의 모습까지.
-움찔!
그 후로 잃어버린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유진의 검에 찔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현성.
폭주하는 마법진.
지옥문에서 쏟아지는 언데드와 드래곤.
눈부신 빛 무리 속.
추락하는 자신과 손을 뻗는 현성.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전부 되살아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흑발의 소년.
“하린아! 괜찮아?”
현성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안개 낀 듯 흐릿하게 보이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간의 악몽도, 환영도,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이 눈 녹듯 사라졌다.
“…….”
이에 하린이 아무 말 없이 현성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었다.
선천강에서도, 얼음무덤에서도, 지금도.
언제나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떠났다고 생각하던 때에도,
마족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에도.
하지만 줄곧 흐릿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을, 이제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현성.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준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대로 하린이 현성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런 하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