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악몽(12)
지옥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이락스.
그런 그는 맨 처음 등장할 때 흉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공중에 정지한 채, 아래를 관조하고 있을 뿐.
[……]
한줌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불길함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룡, 죽음을 몰고 오는 용이자, 이제는 그 자신조차 죽음이 된 그 이름처럼.
카이락스의 모습을 본 자들은 모두 죽음의 공포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끼기긱, 돌연 유령극단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 위치는 다름 아닌 카이락스의 등.
어느새 그곳에는 유진과 그의 유령극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옆, 무릎을 꿇고 있는 하린.
-움찔.
선율을 들은 하린의 고개가 까닥였다.
곧 그녀의 고개를 따라 흔들리는 이마의 뿔.
그와 함께 하린이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현성의 일행과 거리가 먼 탓에 그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하린의 주변을 따라 퍼져 나오는 검은 빛이 그녀가 뭔가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동시에 공중에 가만히 있던 카이락스의 동공이 작게 떨려왔다.
[크륵, 큭…! 키에엑! 크롸라라락!!]
유령극단의 선율이 커질수록, 하린의 주문이 계속될수록,
카이락스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격렬한 바이올린 소리가 이명으로 바뀌어 울려 퍼진 순간.
-삐이이이… 차르륵!
하린의 주변을 따라 퍼져 나오던 빛무리가 검은 족쇄로 변해, 카이락스의 목을 옥죄었다.
그 모습에 현성의 어깨 위에 있던 알레시아가 주춤거렸다.
그런 카이락스의 목을 휘감은 족쇄는 과거 그녀가 블랙마켓에 잡혔을 당시 걸렸던 저주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더 강한 최상위급의 저주.
-멈칫.
이에 연신 몸부림치던 카이락스의 저항이 멎었다.
그대로 잠시 뒤.
떨려오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멈췄다.
[크롸라라라라!!]
이어서 공기를 찢으며 사방으로 삐져나오는 흉성.
그런 그의 울음소리는 방금 전과는 달리,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그 아래 있는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찌릿!
그 경고에 공기가 떨려오며, 이를 지켜보던 하시연은 물론이고, 레이첼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둘이 재빨리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것은 카이락스와 싸우기로 마음먹은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자기 방어에 가까웠다.
반응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건 아마 그의 흉성을 들은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일터.
“…….”
하지만 현성은 그 흉성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볼 뿐.
[이제야 마족들이 왜 그렇게 하린을 노렸는지 알겠군.]
알레시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왕이면 이 상황까지 안 왔으면 했는데 말이지.”
그대로 그가 카이락스의 등 위에 자리한 하린을 바라보았다.
사룡의 목에 걸린 족쇄.
방금 전 봤다시피 그건 하린의 능력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세뇌에 걸린 하린의 능력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야말로 원작의 전개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마족들은 기어코 드래곤의 시체를 손에 넣어, 이를 언데드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타 언데드와는 달리, 사룡 카이락스는 쉽사리 조종해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조종하려 들 때마다 막무가내로 날뛰는 바람에 피해만 늘어갔다.
분명 사룡 카이락스는 좋은 전력이었으나, 그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
반쪽짜리 전력에 불과했다.
그만큼 마족들의 입장은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드래곤이라는 전력을 손에 넣었는데 쓸 수 없다니.
이에 마족들은 그를 제 뜻대로 조종할 방법을 강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게 다름 아닌 하린의 존재였다.
반인반마의 피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성녀의 운명을 타고난 자.
마족의 주목한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분명 그녀가 성녀의 운명을 타고난 건 맞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 안에 있는 반인반마의 피를 이겨냈을 때의 경우.
반대로 그 피를 이겨내지 못할 경우에는 말이 달라진다.
일명 휘광.
본디라면 축복을 내려야 할 그녀의 능력은 단숨에 강력한 구속수단이자 세뇌 능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보는 그대로.
곧 카이락스가 입을 쩌억 벌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모여드는 검은 입자들.
-고오오!
그 모습에 시계탑에 있던 시연과 레이첼이 흠칫거렸다.
불길한 빛을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둘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브레스.”
드래곤이 자랑하는 광역기이자 그들을 중간계의 패왕으로 만들어준 마법의 결정체.
이대로 아카데미를 한 번에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지옥문에서 쏟아지는 언데드, 브레스를 준비하는 사룡.
-스르륵.
시연과 레이첼이 손에 힘을 풀었다.
한 가문의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한들.
뱀파이어 족의 저주를 풀었다 한들.
도저히 저것만큼은 막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이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시연, 레이첼. 미안하지만 한번만 더 도와줄 수 있을까?”
“……뭐?”
그 말에 레이첼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저걸 막으려는 생각인가?
진심으로?
그리고 그건 시연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브레스를 막기엔 늦었으며, 막을 방법도 없었다.
그대로 시연과 레이첼이 눈이 마주쳤다.
“…….”
“…….”
찰나에 흐르는 정적.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과 레이첼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저 현성을 믿는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을.
그것 말고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고마워.”
그런 둘의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와 함께 그가 지옥문에서 쏟아지고 있는 언데드 무리를 가리켰다.
“둘은 우선 쏟아지는 언데드들만 막아줘. 전부 처리하라는 말이 아냐. 그저 피해가 더 번지지 않도록, 밖으로 퍼지는 것만 막아도 충분해.”
“알겠어.”
“그럼 브레스는 어떻게 막을 셈이야?”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건 괜찮아.”
그러면서 그가 시계탑 아래를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우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
동시에 그런 현성의 손에는 어느새 스마트폰이 들려있었다.
* * * * *
한편 아카데미의 대강당.
그곳에는 급하게 대피한 학생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 원인은 시계탑이었다.
검은 마기 사이 열린 지옥문.
그리고 그 지옥문을 타고 쏟아지는 온갖 언데드와.
죽음을 두른 드래곤의 등장.
그와 동시에 학생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당장 지금도 어느 누구하나 섣불리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대로 곳곳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퍼져 나왔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처억.
누군가 대강당 단상 위로 나섰다.
그는 바로 미하일.
대마법사의 제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장이었다.
이어서 그의 뒤로 나타나는 아카데미의 교수들.
그 중에는 당연히 이클레아도 서있었다.
그대로 미하일이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계탑에서 신원미상의 인물이 테러를 계획한 것부터 현성을 구하러 간 시연과 레이첼.
그리고 지금.
사룡 카이락스가 소환된 상황까지 전부.
“이에 저를 포함한 교수진들은 우선 대규모 전이 마법을 통해 학생들을 안전지역으로 대피시킨 후, 아카데미 상공에 출현한 드래곤을 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미하일의 말에 강당의 학생들이 그와 바깥을 번갈아보았다.
평소라면 몰랐겠지만, 이미 공포에 잠식된 학생들의 두려움은 쉬이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마, 막을 수는 있는 건가요? 혹시 대피하는 도중에 마법진이 붕괴되기라도 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공격을 받아 대규모 전이 마법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남은 학생들은 꼼짝없이 고립되는 꼴.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안전하게 교수들까지 같이 대피하는 편이 나았다.
“약속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학생 여러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희는 여길 떠날 수 없습니다.”
단호한 미하일의 말.
그와 함께 그가 시계탑이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의 의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생들을 무사히 지키는 것. 그리고 그건 지금 시계탑에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미하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아카데미를 떠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허나 방금 말한 대로 저, 미하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치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대마법사의 제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장.
미하일이 대강당의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동시에 그의 그런 각오를 알려주듯,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오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미하일의 진심이 전해건지, 학생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미하일이 작게 웃으며 손을 펼쳤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학생 여러분들은 1학년부터 차례대로 교수들의 인솔을 따라 움직여주십시오. 전이 마법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런 그의 말에 따라, 강당의 학생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곧 마지막 학생까지 전부 나가고.
“……다들 준비됐는가.”
미하일이 교수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다른 교수들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준비됐습니다.”
“그럼 가지.”
-스팟.
그와 함께 미하일과 교수들이 모습이 사라졌다.
곧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시계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
가까이에서 보니 그 처참한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워어억… 워어어어…!]
이미 사방을 가득 메운 언데드 무리.
무엇보다도 상공에 떠있는 검은 드래곤.
그 압도적인 공포에 교수들이 주먹을 쥐었다.
-꾸구국.
그대로 미하일이 검은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창립 이래.
지금껏 이토록 위험한 상황이 있었는가.
그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허나 그도 잠시.
미하일이 심호흡을 하며 양팔을 펼쳤다.
“시작하지.”
“예!”
그와 동시에 바닥은 물론이며, 공중에까지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수는 도저히 손짓 한 번에 펼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이 이 정도 마법진을 다룰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미리 알려줘서 고맙네. 이클레아 교수.”
바로 이클레아 덕분.
얼마 전 열린 교수회의에서 그녀는 강경하게 미연의 사태를 대비해 아카데미 방어를 강화해야함을 주장했다.
물론 처음에는 다들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이클레아의 주장에 결국 미하일과 다른 교수들은 속는 셈 치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다.
그리고 지금,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미연의 사태, 아니 아카데미의 존망을 가를 사건이 일어났다.
“……자네는 이걸 어떻게 알았나?”
미하일이 이클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뭐…,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두죠.”
항상 현성이 하던 말버릇이었다.
아마 최근 그와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물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클레아가 시계탑 위, 열린 지옥문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괜찮은 거 맞지?’
그대로 그녀가 스마트폰을 꾹 쥐었다.
연락을 받고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전에 현성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마족들이 아카데미를 침공해왔다.
이에 그의 말대로 미리 준비를 해뒀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지 예상조차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시계탑에 있는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있는 건 그저 단 한 가지.’
그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정말이지 끝까지 부담주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자가 믿어주는데 그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이클레아가 작게 웃으며 손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상공에 있는 검은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이어서 점점 모여드는 검은 입자.
“온다. 전원 준비!”
이에 아카데미의 교사들이 전부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드래곤의 입을 타고, 심판의 기둥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