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악몽(11)
시간을 조금 돌려 유진이 하린을 찌른 그 순간.
시계탑을 향해 날아오던 시연과 레이첼 역시 그 장면을 목격했으며,
곧바로 그가 현성마저 찌르려는 찰나.
둘이 타이밍 좋게 유진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이에 공격이 막힌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유진이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새 시대가 열리면 전부 죽을 것들이 괜한 발악을 하고 있……!”
하지만 그때였다.
시연이 차갑게 가라앉는 두 눈으로 유진의 말을 끊었다.
“그 손. 치우라고 했지.”
-끼긱… 채앵!
동시에 그녀가 제 4식 천류를 펼치며 유진의 검을 흘려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순식간에 이루어진 흘려내기.
그와 함께 시연이 레이첼과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끄덕.
그 다음은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레이첼이 유진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그녀의 단호한 한 마디.
“죽어.”
-콰가가각!
그러기 무섭게 돌연 바닥을 따라 솟구치는 붉은 피의 파도.
그런 레이첼의 피는 마치 짐승의 송곳니처럼 변해, 거칠게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이에 유진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혈마법!?”
솟구치는 붉은 피와 그 안에 느껴지는 진한 마력.
뱀파이어 특유의 혈마법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뱀파이어가 아카데미에?
유진이 솟구치는 피의 장막 너머, 레이첼을 흘깃 바라보았다.
허나 그런 그의 의문이 끝나기 전.
붉은 장막을 뚫고 날카로운 검격이 쏘아졌다.
-쉬이익!
방금 전 그가 현성의 목을 노린 것처럼.
이번에는 유진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
시연이 펼친 공격이었다.
“큭…!”
그대로 유진이 재빨리 고개를 틀었다.
그와 함께 피잇, 그의 볼을 따라 피가 흘러 내렸다.
그 모습에 뒤에 있던 레이첼이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그럼 이것도 피해볼래?”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 사이에는 소름끼치는 살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곧 그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붉은 피가 가시처럼 쏟아졌다.
-핏! 피비빗! 피잇!
그뿐만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붉은 가시 사이, 쉴 틈 없이 섞여 들어오는 시연의 검격.
이에 유진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쾅! 콰직! 끼기긱…… 채앵!
그는 검을 휘두르며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 상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이스페리아>의 메인급 히로인의 공격.
그 이명만 하더라도 하 가문의 차기가주와 피의 여제였다.
그런데 그런 둘이 작정하고 동시에 합을 맞추니, 유진이 아무리 검성의 그릇이라 한들.
밀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방금 전, 현성의 공격으로 인해 왼쪽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
온전히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이에 유진이 하나둘씩 공격을 허용하고.
시연이 다시 한번 월영을 펼친 그때.
-콰각.
달의 그림자를 꿰뚫었다는 그 이름처럼, 그녀의 검 끝이 정확히 유진의 목을 꿰뚫었다.
하지만 시연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보통의 인간이 아닌 언데드.
-뚜둑… 콰득!
유진이 거칠게 목에 박힌 검을 억지로 뽑아냈다.
그에 따라 보라색 피가 터지며 살점이 뜯겨나갔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유감이군.”
-움찔!
이에 시연이 작게 주춤거렸다.
그리고 유진이 그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콰악.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오른 붉은 피가 유진의 검을 물론.
팔까지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레이첼.
“어디서 기분 나쁜 악취가 나나 싶었더니 네 녀석이었군.”
레이첼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뱀파이어.
이미 가고일부터 웨어울프까지 봐왔던 마당에 언데드 정도로는 그리 놀라지 않은 게 당연했다.
-우드득!
그대로 그녀가 손아귀를 꽉 움켜쥐자, 유진의 오른쪽 팔을 타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시연이 검을 내리치며 폭발하는 충격파.
-콰앙!
이에 유진이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와 함께 그의 팔이 아래로 축 처졌다.
현성의 전투에 이어 방금 전의 공격으로 인해 양 팔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났다.
“쯧.”
유진이 그런 자신의 양 팔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언데드라 고통을 느끼지도 않으며, 치명상을 입고도 죽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미 내구도가 다 된 팔을 움직이는 건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다.
“…….”
시계탑 최상층.
벽에 처박힌 유진과 시연, 레이첼이 대치하고 있었다.
-처억.
<이스페리아>의 주인공 유진을 사모하며, 그의 일행이 되었어야 할 그녀들이 지금은 유진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니.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뒤에 있는 현성.
“현성, 다친 데는 없어?”
“몸은 괜찮아?”
시연과 레이첼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현성의 상태를 살폈다.
이에 그의 어깨에 있던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성은 괜찮다. 하지만 하린이…….]
알레시아가 현성의 품에 안긴 하린을 흘깃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이미 그녀와 바닥은 물론이며, 하린을 부축하고 있던 현성마저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건 전부 그녀의 피.
얼핏 봐도 보통 출혈량이 아니었다.
덕분에 주변에 넘실거리는 마기는 사라졌지만, 그만큼 하린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들리는 건 오직 미약한 숨소리 뿐.
“하아…, 하아…….”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되는 건 하린의 외형이었다.
마족화가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뿔과 역안.
그 모습에 시연이 현성을 향해 물었다.
“현성. 이건…….”
그러자 옆에 있던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반인반마인가?”
“맞아.”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꽤나 복잡해보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족화의 속도가 원작의 전개보다 너무 빠르다.’
원래대로라면 하린은 마법진의 구동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게 전부.
그 과정에서 마족화는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마족화가 아예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봤자 고작 뿔이 조금 솟아나고 말았다.
허나 눈앞의 하린은 이미 완벽하게 마족화가 진행되었다.
과연 어느 부분이 변수로 작용했는지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애초에 유진이 나타난 것부터가 크나큰 변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린이 유진과 조우하면서 마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모양인데…….’
현재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 멀리서 나지막한 유진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소용없어. 이미 늦었다.”
이에 시연과 레이첼, 현성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유진이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목은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져 있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양 팔은 박살난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유진의 모습은 좀비 그 자체였다.
그의 말에 시연이 물었다.
“……이미 늦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어느 의미로든.”
그녀의 물음에 유진이 작게 조소했다.
그대로 그가 현성의 품에 안겨있는 하린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리고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뭐?”
“말려들기 싫으면 말이지.”
그와 함께 유진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동시에 유령극단이 소환되더니.
끼기긱, 시계탑을 타고 시끄러운 연주가 울려 퍼졌다.
이에 현성이 시연과 레이첼을 향해 재빨리 외쳤다.
“전부 귀 막아!”
그런 현성의 외침에 둘이 뒤늦게 귀를 막았지만, 유령극단의 연주는 즉발기.
그 피해를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에 따라 시연과 레이첼이 휘청거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우우웅!
둘의 눈앞이 흔들리며 사방에서 시끄러운 선율이 메아리쳤다.
그나마 다행인건 현성은 검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
곧바로 그가 연주를 막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달려 나가려는 찰나였다.
“나보다는 다른 쪽에 신경 쓰는 게 좋을 텐데?”
유진의 한 마디.
그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린의 주변을 타고 마기가 폭발했다.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현성, 당장 피해야…!”
“크윽!”
-콰아아앙!!
그 충격에 현성은 물론이며, 시연과 레이첼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그런 하린의 아래를 따라 빛나는 문양.
그것은 분명 마법진의 구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에 유진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족화가 끝난 하린.
반인반마의 피.
처음 그가 하린을 찔렀을 때부터 마법진의 구동조건은 전부 다 갖춰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린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주위로는 짙은 마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마법진이 발동되기 직전, 현성이 본 마지막 모습은.
“……미안… 해요.”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는 하린의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이 히죽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새로운 시대를 목도하라!!”
드높은 시계탑.
광기어린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종말을 도래할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 *
처음은 그저 먹구름이 낀 하늘같았다.
허나 그게 먹구름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름처럼 보이던 것은 전부 짙은 마기.
곧 하늘을 가득 메운 시꺼먼 마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공허한 어둠이 열렸다.
-쩌억!
그와 함께 붉은 액체가 떨어지며 악취가 진동했다.
피와 썩은 살점이었다.
그리고 허공에 열린 문을 따라,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
“그워어어억……!”
동물인지 사람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는 목소리.
이어서 좀비와 스켈레톤을 비롯한 온갖 언데드들이 문을 비집고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의 문을 연상케 하였다.
허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드득… 콰득!
뼈와 살점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옥문 너머, 거대한 무언가가 이곳으로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안개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파충류의 그것과 같은 뿌연 눈동자.
그 눈동자는 어딘가 알레시아와 비슷했다.
“……!”
이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시연과 레이첼이 흠칫거렸다.
수년간 단련된 검사의 기감.
뱀파이어 특유의 감각.
그 모든 게 말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고.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고작 녀석이 지옥문을 넘어오는 걸 지켜볼 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지옥문이 완전히 갈라지며 붉은 안광의 주인이 내려왔다.
-화르륵!
그대로 안개가 걷히며 사방으로 검은 불씨가 흩날렸다.
그와 함께 하늘을 잔뜩 메운 소름끼치는 흉성.
[크롸라라라라!!!]
붉은 두 눈동자, 한 쌍의 날개.
날카로운 발톱과 검은 비늘.
그 형체는 중간계의 패왕이라 불리는 드래곤과 똑같았다.
-찌릿!
그 울음소리에 레이첼의 몸이 거세게 떨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스산함과 원초적인 공포.
알레시아를 조우했을 때 느껴졌던 온화함과 신비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다른 점은 그 외형이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피막과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
비늘은 물론이며, 뼈를 드러내는 썩은 살점.
그런 드래곤의 중심.
피와 살점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그 작은 틈 사이로 불길한 검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그 빛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드래곤 하트.
“저건 도대체……”
과연 살아있는 생명체가 맞나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 서 있는 무언가.
동시에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사룡 카이락스.”
사룡(死龍) 카이락스.
하린의 피를 제물 삼아 마족이 되살려낸 언데드 드래곤이자,
<이스페리아>의 3부 메인 보스의 이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