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악몽(9)
“…….”
현성에게는 유령 극단의 연주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은 이를 알아차리기 무섭게 검을 치켜들었다.
연주가 통하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현성을 저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스팟!
그대로 그가 현성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얼핏 보기에는 하 가문의 검식, 낙천과도 비슷한 검법.
허나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검은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바닥을 갈랐다.
이에 현성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기 무섭게 바닥을 가르는 검격.
-푸스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성이 서있던 자리는 마치 커다란 대검이 훑고 지나간 듯.
흉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사지 하나는 잘릴 위력.
그 모습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무기는 하필 또 검이야?’
현성과 같은 평균 스텟 3따리 삼류 악역과는 격이 다른,
<이스페리아>의 진주인공 유진.
그는 주인공답게 온갖 보정을 다 때려 넣은 사기캐 중의 사기캐였다.
이를 증명하는 부분이 바로 클래스.
그는 검을 비롯하여 어떤 무기를 잡든,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는 천재.
사실 이는 말이 천재일 뿐.
제작사가 게임 플레이에 있어, 클래스 선택의 폭을 넓게 하기 위해 만든 설정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으로 주어지는 클래스가 바로 검사다.
동시에 검사로 플레이 할 경우, 유진은 검성(劍聖)의 재능을 발현한다는 설정이 붙어있었다.
그만큼 <이스페리아>의 세계관 중.
유일하게 유진, 그만이 쓸 수 있는 검술.
그게 바로 검성식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맞고 뒤질 뻔한 게 그 기술이지.’
이는 곧 현성이 검성식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는 소리.
허나 그도 잠시.
그가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었다.
유진만큼은 아니지만, 삼류 악역 유현성에게도 일말의 재능은 존재했다.
그건 바로 격투계열.
중후반부 보스로 등장할 당시의 위엄.
‘뭐 누구누구처럼 파괴살이니, 화염의 호흡 같은 건 못쓰지만…….’
-화르륵!
동시에 현성의 양 손을 따라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이런 건 쓸 수 있다는 거지.’
무엇보다 그는 히든 클래스 힘의 마법사(physical wizard).
다른 건 몰라도 데미지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클래스였다.
그대로 현성이 양 손의 은빛 건틀렛을 부딪히며 히죽 웃었다.
-카앙!
“까짓 거 검성식 공략 한 번 해보지 뭐.”
흩날리는 불씨 속.
현성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있던 자리를 따라 푸른 뇌전(雷電)이 내리꽂혔다.
-콰르릉!
* * * * *
한편 아카데미의 강의동.
학생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어야할 이미 혼란으로 물든지 오래였다.
돌연 시계탑에서 일어난 커다란 폭발.
거기다 사방으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이에 아카데미 측은 황급히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일단은 모두 침착하고 대피하세요!”
그리고 그건 하린이 있는 강의실도 마찬가지.
학생들은 모두 교수의 지침에 따라, 하나 둘씩 강의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곧바로 하린의 친구들 역시 대피할 준비를 하며 하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린아, 우리도 빨리 나가자!”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하린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계속해서 떨리는 몸과 불규칙적인 호흡소리.
“하아…, 하아…….”
그 모습에 그녀의 친구들은 물론이며, 교수까지 하린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교수님, 하린이가 이상해요!”
“학생? 제 말 들립니까?”
혹 시계탑의 선율 때문일까.
안 그래도 이미 연주가 울려 퍼진 직후, 주변에는 환청과 구토를 호소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하린의 상태는 뭔가 조금 달랐다.
“…제발…. 제 주변, 에서… 떨어지세요…….”
“……뭐?”
하린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씹어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에 결국 교수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린 찰나였다.
돌연 하린의 주변을 타고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오지 마!!”
-콰아앙!
참아왔던 마기의 폭발.
그 충격에 주변에 있던 교수는 물론이며, 다른 학생들까지 전부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런 그들의 눈앞에 보인 건 비틀거리며 서있는 하린이었다.
그런 그녀의 주의를 따라 검은 마기가 그림자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린의 머리와 눈.
그곳에는 길쭉한 뿔과 역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마족의 증거였다.
점점 강해지는 반인반마의 피, 유진의 세뇌, 하린을 부르는 유령극단의 선율.
이 세 가지가 동시다발적으로 겹쳐 그녀 안에 있던 반인반마의 피가 폭주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하린의 친구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린아?”
그대로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방으로 퍼져 나오는 진한 마기와 번들거리는 역안.
그런 그녀를 발견하기 무섭게 다른 학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움찔!
그와 함께 교수가 복부를 움켜쥐며 다른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내 뒤로 와라!!”
그러면서 그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곧 그의 손을 따라 펼쳐지는 공격 마법진.
곧 교수가 하린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거기 가만히 서있어. 움직이는 순간 공격한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경계심 어린 눈빛.
어릴 적, 하린이 봐왔던 그때의 눈빛이었다.
이에 다른 학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 교수님. 하지만 저건 하린…….”
“아니야!”
학생의 만류가 끝나기도 전에 교수가 일갈했다.
방금 전의 폭발과 당장 지금도 흘러나오는 마기.
도저히 인간에게서 흘러나올 수 없는 기운이었다.
“저게 인간일 리가 없잖아!”
동시에 머리에 솟아있는 뿔과 역안.
마족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교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저 정도의 마기라면 장시간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했다.
게다가 방금 전 그 폭발.
그 폭발만으로도 상처부위가 마기에 침식되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즉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마족을 상대로는 다른 학생들을 지키는 게 맞았다.
허나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면,
그가 지켜야할 학생의 범주에는 더 이상 하린이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멈칫.
이에 하린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동안 감춰왔던 치부가 드러난 것뿐이었다.
“…….”
그러니 지금 반응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왤까.
방금 전 교수의 외침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린,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그래, 오빠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순간 머리를 타고 깨질 듯한 두통이 전해져왔다.
“…읏!”
달빛이 내리는 숲 속.
자신을 껴안고 있는 오빠.
시계탑 아래, 손을 뻗고 웃고 있는 유진.
그런 오빠의 손을 뿌리치려던 자신.
동시에 유진의 뒤에 나타난 유령들과 울려 퍼지는 그 선율까지.
잊고 있던 그 날 밤의 일이 전부 기억났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교수의 마법진에서 쏘아진 날카로운 바람이 하린을 꿰뚫었다.
-쉬익…피잇!
이에 바람의 화살이 그녀의 뿔을 스치고 지나가고.
하린의 이마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의 피는 더 이상 인간의 붉은색이 아닌, 마족의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투둑…. 뚝…….
하린이 아무 말 없이 흘러내리는 보라색 피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녀가 입술을 꽉 악물며 말했다.
“알겠어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만…….”
허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하린의 주변에 있던 마기가 쏜살같이 교수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그런 짙은 마기는 마법진은 물론이며, 그의 복부까지 꿰뚫었다.
-푸욱!
“……교…, 수님?”
하린의 의지가 섞여있지 않은, 동시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그런 교수의 입을 따라 거친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컥…. 쿨럭!”
엉망이 된 강의실을 타고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비명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꺄아아악!!”
한 학생의 비명을 시작으로 학생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앞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하린이 앞으로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저리 꺼져!”
그와 함께 공포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에서 유독 친하게 지내던 하린의 친구였다.
그 모습에 하린이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터업.
이어서 누군가 그녀의 발을 잡았다.
피를 흘리고 있는 교수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하린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내… 학생들에게…, 손대지마…….”
그런 교수의 말에 하린이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지켜왔던 무언가가 단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하린이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쥐었다.
-꾸욱.
그녀가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입술을 씹었다.
한 번 울면 도저히 멈출 수 없을 거 같았다.
하린이 작게 속삭였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 마.”
동시에 시계탑을 타고 유령극단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끼기긱, 찢어지는 바이올린 소리와 그 사이 섞여 들어가는 멜로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듣기 싫은 선율은 이상하게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
연주를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주변의 풍경이 어둡게 물들어갔다.
피를 흘리고 있는 교수도, 도망친 친구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직 높게 솟은 시계탑 뿐.
하린이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펄럭!
그러자 그의 등을 타고 검은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졌다.
그와 함께 하린이 시계탑을 향해 날아갔다.
* * * * *
한편 다른 강의실에서는 학생회장 시연이 다른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이쪽으로 나가세요!”
곧 한 무리의 학생들까지 나가고.
시연이 텅 빈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아마 다른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도 거의 대피했을 터.
“그쪽은 다 나갔나요?”
그녀가 반대편에서 학생들의 대피를 돕고 있던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가소로운 듯.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이쪽은 진즉에 다 끝냈다고.”
“……다 제 덕분이죠.”
시연이 레이첼을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둘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럼 다 나갔겠다. 이제 시연과 레이첼이 나갈 차례였다.
“그럼 이제 저희도 슬슬…….”
그리고 시연이 강의실을 나가려는 그때였다.
건너편 창문을 타고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저건…….”
그대로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시계탑.
그곳을 향해 날아가는 금발의 소녀.
그건 틀림없는 하린이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시연이 시계탑 위에 있는 흐릿한 인형(人形)에 미간을 좁혔다.
“…….”
“야, 넌 뭘 그리 보고있…….”
너무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쪽은 금발의 남성.
그리고 다른 쪽은.
-멈칫!
다름 아닌 흑발의 소년.
이에 시연은 물론이며, 그녀의 옆에 있던 레이첼이 그를 발견했다.
동시에 그런 둘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현성?”
“유현성?!”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