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악몽(8)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시계탑 아래, 하나 둘씩 기숙사를 나서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저런 모습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군.”
유진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 그의 미소 안에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머지않아 절망으로 물들 아카데미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그렇다면 현성은?
그는 여전히 구석에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현성. 사과.]
‘과수원.’
[원리.]
기나긴 기다림.
그 사이 현성은 알레시아와 전음을 주고받으며 끝말잇기를 하고 있었다.
이에 그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리튬.’
[…….]
현성의 회심의 공격.
그와 함께 알레시아가 침묵했다.
그대로 잠시 뒤.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하지?]
알레시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튬.’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고 생각하네만.]
‘튬.’
알레시아가 애써 모른 척했지만, 현성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결국 머지않아.
그녀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치사하다. 현성.]
알레시아의 패배.
곧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그리고 아마 이제 슬슬 움직일 거야.’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마족이 아카데미 침공을 시작하는 시간은 아침 강의 시간.
그에 따라 시계탑이 폭발하고.
그 시각, 강의를 듣고 있던 유진을 물론이며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시계탑에 몰린다.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의 여동생 하린을 발견한 유진이 다른 교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계탑으로 달려간다.
허나 시계탑 아래에는 이미 온갖 함정과 마수들이 배치된 상태.
이에 유진이 그 모든 방해를 뚫고 마침내 이키펠과 격돌.
이게 원작의 전개였다.
그러나 지금은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여동생을 구해야할 유진이 시계탑 위에서 아카데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야말로 직무유기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 맨 처음 빙의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만 해도 현성의 목표는 하나였다.
주인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앞으로 그가 밟게 될 지뢰를 차근차근 제거.
그 끝에는 해피엔딩까지 도달하는 것.
주인공만 존재한다면 현성은 비교적 꿀을 빨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 어차피 큼직한 사건들은 주인공이 전부 해결하니까.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마족에게 넘어가 아카데미 테러를 계획하는 주인공.
이를 막기 위해 하린으로 변한 채 틈을 기다리는 현성.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하린아. 시간이 됐어.”
유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아카데미 침공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그와 함께 현성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자 유진이 하린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현성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그가 향한 곳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중앙.
유진이 그런 현성에게 단검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마법진이 발동하면 피를 내.”
결정적으로 마법진의 구동에 필요한 것은 하린의 피.
그러니까 반인반마의 피였다.
동시에 그녀는 성녀의 운명을 타고난 자.
이는 이번 계획에 있어 중요한 열쇠로 작용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진이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이에 곧 그의 손을 따라 검은 마나가 퍼져가고.
마법진 겉에 있는 글자가 하나 둘씩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침내 검은 빛이 마법진 전체를 가득 채운 찰나.
“드디어…….”
유진의 눈이 서서히 희열로 물들었다.
발동된 마법진.
그 위에 있는 하린.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하린의 피를 바치기만 하면, 아카데미를 단번에 쓸어버릴.
저 가증스런 인간들을 전부 파멸로 몰고 갈 존재를 소환할 수 있었다.
“하린, 지금이야!”
그와 함께 유진이 히죽 웃으며 외쳤다.
이에 멍하니 있던 하린이 양 손으로 단검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단검을 내리찍은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단검을 따라 붉은 화염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씨가 흩날렸다.
그 모습에 유진이 움찔거렸다.
“……뭐. 뭣?!”
발동된 마법진.
그 위에 있는 하린.
모든 게 완벽했던 풍경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스으으.
동시에 흩날리는 불꽃 사이.
돌연 하린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금발은 흑발로, 푸른 눈동자는 차갑게 내려앉은 검은색으로.
“이, 이게 무슨…….”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린이 있던 자리에는 웬 소년이 서있었다.
그대로 유진이 주춤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뿌드득!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
“웬 놈이냐!!”
이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니 동생. 이 새끼야.”
그와 함께 현성이 주먹을 움켜쥐고 팔을 들었다.
어느새 그런 그의 주먹에는 은빛의 건틀렛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바로 그의 양 팔을 휘감는 맹렬한 불꽃.
-화르륵!
그대로 현성이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방금 전의 충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폭발음.
그의 손을 따라 퍼져 나온 시뻘건 불꽃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물론이며, 시계탑 최상층을 휩쓸고 지나갔다.
-쿠르릉!
그 충격에 겉을 장식하던 형형색색이 유리가 산산조각 나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래 넘실거리는 붉은 불꽃.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시계탑은 한 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우리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유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희열에 가득 찬 그의 눈은 이미 혼란으로 물든지 오래였다.
-꾸구국.
그리고 그 혼란이 분노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의 대업을…!!”
유진이 당장에라도 현성을 찢어죽일 듯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남은 불씨를 털어냈다.
주인공 유진으로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그가 분노하는 모습은 여러 번 봐왔다.
허나 그 적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는 현성에게 있어 꽤나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대로 그가 유진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러게 줄을 잘 탔어야지.”
“…….”
그런 현성의 말에 유진이 이를 악문 채 속삭였다.
“하린…. 지금 당장 하린을 찾아야 한다…!”
박살난 마법진은 다시 복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하린.
그녀가 없다면 마법진을 복구한다한들, 구동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를 바꿔 말한다면.
하린만, 그녀만 있다면 다시 마법진을 구동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당장 유령극단의 연주로 하린을 불러내야 했다.
어젯밤, 세뇌에 걸린 하린이라면 그 선율에 반응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눈앞의 소년.
그 역시도 인간인 이상, 세뇌의 선율을 듣고 멀쩡히 서있지 못할 것.
이에 유진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사방으로 펼쳐졌다.
-스르륵.
그에 따라 유령극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턱시도, 저마다 손에든 악기들.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따악!
그리고 유진이 손가락을 퉁긴 그때.
유령극단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끼기긱, 찢어지는 바이올린을 선두로 사방으로 스산한 선율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시계탑에 있는 현성은 물론.
아카데미에 있는 하린에게까지.
그와 함께 유진이 재빨리 현성에게 달려들었다.
‘우선은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 먼저…!’
-쉬익!
동시에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 유령극단의 선율을 들은 이상.
눈앞의 인간은 움직일 수 없을 터.
‘이대로 숨통을 끊는다!’
그대로 유진의 검 끝이 현성의 목을 꿰뚫으려는 찰나였다.
-채앵!
둘 사이를 따라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유진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보란 듯이 자신의 검을 막아낸 현성이었다.
“……?!”
그와 함께 유진이 황급히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몽환의 지휘자, 이키펠의 유령극단.
그들의 공격은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즉발.
그만큼 유령극단의 연주는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아니 그 공격을 견뎠다고 한들.
못해도 일순간은 움직이지 못해야함이 맞았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채 1초의 딜레이도 없이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이에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현성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소하고 있는 현성.
“……그게 끝이야?”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현성은 허리춤에 낡은 검집을 차고 있었다.
다름 아닌 무명의 검집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검집을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대로 검집은 확실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명(無名)의 검집.
이는 그 이름처럼 이름 없는 검사의 검집에 불과했다.
허나 아이러니 하게도 현성은 그 주인을 알고 있었다.
‘검집의 주인은 하신우.’
검술명가 하 가문의 초대가주이자,
과거 몽환의 지휘자, 이키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검신(劍神)의 이름이었다.
[검신 하신우의 검집]
[등급 : 유니크]
설명 : 과거 검신이라 불리던 하 가문의 초대가주, 하신우의 검집이다. 검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그 검집에는 꺾이지 않는 그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눈앞에 떠오른 아이템 설명창을 바라본 현성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느새 검집의 이름은 무명의 검집에서, 검신 하신우의 검집으로.
등급은 ??에서 유니크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설명창의 마지막 문장.
검집에는 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부분이었다.
무려 이키펠을 꺾은 검신의 정신.
그에 따라 그 효과는 정신계 공격에 저항을 달아준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는 일종의 게임사의 배려이자, 일부러 숨겨둔 설정이었다.
유령극단의 연주.
앞서 말했듯 이들의 연주는 쉽게 막을 수 없다.
정신계 공격이라는 특성 탓에 물리적인 방식으로는 막을 수 없고, 애초에 그 위력 또한 정신계 마법 중에서 상위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유령극단의 연주는 <이스페리아> 내에서도 부모 없는 패턴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도플갱어 퀸 때의 정신계 공격도 쌍욕을 유발하며 부모님 안부를 물어볼 정도지만, 그래도 궁극기니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허나 유령극단은 궁극기도 아니고 기본 스킬이다.
덕분에 본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플레이어들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게 정신계 공격을 막는 방법은 오로지 의지 스텟을 올리는 것뿐인데, 누누이 말했듯 의지는 드럽게 올리기 힘들다.
그러나 공략은 존재했다.
그것도 바로 이전 에피소드인 하 가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열리는 가문의 창고에 말이다.
거기서 무명의 검집만 습득한다면, 지금처럼 유령극단의 연주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알아내기 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사실 알고 들으면 간단하다.
그야 이전 에피소드에서 보상만 제대로 선택하면, 자연스레 깰 수 있는 공략이니까.
하지만 개발사는 이를 이스터에그라는 이름으로 꽁꽁 감춰두었다.
‘……아주 개새끼들이 따로 없어.’
과연 이걸 찾으라고 만들어 둔건지 의심스러운 악질설정.
그러나 현성은 기어코 수백 번의 트라이 끝에.
<이스페리아> 최초로 이 이스터에그를 찾는데 성공했다.
이에 당시 게임을 플레이하던 유저들은 이걸 숨기는 제작사와 또 그걸 찾아낸 현성을 두고.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의 싸움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의 최초의 공략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 다시 해봐.”
“……뭐?”
“다시 연주해보라고.”
그대로 현성이 광기어린 눈빛으로 유령극단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