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악몽(7)
밤이 찾아온 아카데미.
하린은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우웅.
작은 울림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현성 : 아직 안 자지?
메시지의 주인공은 현성.
이에 하린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유하린 : 네. 아직은요. 하지만 이제 곧 자야죠. 근데 왜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토끼 이모티콘)
그러자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유현성 : 자기 전에 물약. 잊지 말라고.
유하린 : 물론이죠. 안 그래도 자기 전에 마시려고 옆에 뒀어요.
그와 함께 하린이 유리병을 든 채.
브이를 하고 있는 셀카를 찍어 전송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타자를 두드렸다.
유하린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현성 : 그래, 알겠어. 그럼 잘 자.
유하린 : 네. 선배님도 잘 자요.
(이불을 덮은 토끼 이모티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종료되고.
하린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침에 현성이 건넨 유리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찰랑.
그 안에는 마치 비타민 음료를 연상케 하는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다.
듣자하니 이클레아 교수님이 만들었다고 했었나.
그만큼 효과 하나는 확실하겠다만, 과연 맛은 어떨지 의문이었다.
“……후우.”
하린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유리병을 깠다.
끼릭, 동시에 그녀가 결심한 듯.
눈을 감고 한입에 음료를 털어 넣었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
그리고 그 뒤로 느껴지는 오묘한 맛.
마치 감기약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으읏…!”
마지막 한 모금까지 삼킨 하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이걸로 다 마셨다.
이에 하린이 물끄러미 빈 병을 바라보았다.
‘……분명 약기운 때문에 졸릴 수도 있다고 했었지?’
하린이 약을 먹기 전 현성이 말해준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5분정도가 지났을까.
그의 말대로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처럼 잠드는 게 두렵지 않았다.
어제는 악몽을 꾸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오늘은 약까지 먹었지 않는가.
그대로 하린이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11시가 훌쩍 지나, 12시에 가까워진 그 순간.
누군가 기숙사 밖으로 걸어 나왔다.
“…….”
그녀는 다름 아닌 유하린.
분명 약을 먹고 잠들어있을 그녀가 이 시간에 나왔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혹 아직 세뇌의 효과가 남아있던 걸까.
이어서 하린이 저 멀리 시계탑을 바라보고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아아.
차가운 밤바람이 하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자꾸만 금색의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이에 줄곧 아무 말 없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불편해.”
그러자 하린의 어깨를 타고 금색의 작은 드래곤이 대답했다.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는 걸?]
그 말에 하린이 정색하며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런 말 하지 마.”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모습도 청순하구나.]
“그만. 거기까지.”
그러면서 하린이 자신의 옷을 살폈다.
숄 아래 감춰진 아카데미 교복.
그런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있었다.
“쯧.”
그대로 하린이 작게 혀를 차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렇다.
그는 하린이 아닌, 도플갱어의 망토를 사용해 하린으로 변한 현성.
그리고 그가 굳이 하린으로 변장한 이유는 정해져있었다.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아카데미 침공은 하린이 세뇌에 걸리고, 그녀를 제물삼아 마법진을 발동시키면서 시작된다.
그에 따라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하린이 세뇌를 걸리는 걸 막기보다는, 차라리 현성 그가 하린으로 변장하여 마법진 가까이 잠입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당장 마법진이 발동하기 전에 현성이 마법진을 파괴하기만 해도 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역시 하린으로 변한 건 현성에게 있어 영 적응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평생 남자로 살아온 몸이 한 순간에 변하다니.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역시 기왕이면 치마를 입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네만.]
“기각.”
하린, 아니 현성이 칼같이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겉에 숄을 걸친 상태.
겉으로 보기에 현성은 이미 완벽하게 하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이 정도면 그 누구도 그가 현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대로 현성이 기숙사를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진짜 하린은 현성이 건넨 물약을 마시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게 사실 그가 건넨 물약은 단순한 수면제니까.
‘……못해도 아침까지는 쭉 잠들어 있을 터.’
덕분에 진짜 하린은 연주를 들을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현성이 작정하고 그녀를 연기하는 이상.
하린이 세뇌에 빠지지 않았다고 의심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진조차 말이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처억.
시계탑 바로 앞.
현성이 멈춰 섰다.
그러자 끼기긱,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물이 그를 반겼다.
“어서 와. 하린아.”
하린과 똑 닮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
<이스페리아>의 주인공이자,
그녀의 오빠, 유진이었다.
이에 현성이 마치 세뇌에 걸린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겉과는 꽤나 달랐다.
‘……다시 봐도 놀랍군.’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사실 이 시점에 유진 그가 현성의 눈앞에 있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도 그럴게 원래 본 게임의 주인공은 바로 유진.
물론 하린이 세뇌에 빠지는 건 원작에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런 하린을 구해내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공, 그러니까 유진(플레이어)의 역할이었다.
허나 지금의 주인공(플레이어)은 유진이 아닌 현성.
거기다 하린의 말에 따르면, 유진은 2년 전 죽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유진이 버젓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 하린을 감시하던 그날 밤.
그녀를 지켜보던 현성 역시도 적잖이 놀랐다.
죽은 줄 알았던 유진이 살아있었다니.
아무리 모든 전개를 알고 있는 현성이라고 한들, 이는 명백하게 처음 보는 경우일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 따르면 시계탑에 있어야할 건 유진이 아닌 이키펠.’
이키펠, 작중 몽환의 지휘자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마족으로.
하린을 세뇌하기 위해 유령극단을 다루는 것도 그였다.
그에 따라 유령극단이 등장한 것까지는 똑같았지만, 그 주체가 이키펠이 아닌 유진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등장에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현성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애초에 자신이 유진이 아닌, 유현성의 몸에 빙의한 것부터 변수라면 변수였다.
즉, 지금 와서 이런 변수에 놀라기보다는 한 발 빨리 그 변수를 고려하여 계획을 짜는 게 맞았다.
그와 함께 현성은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 첫 번째는 눈앞의 유진이 진짜 유진인 경우.
그리고 두 번째. 눈앞의 유진이 가짜인 경우.
일단 전자는 원작의 전개에서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유진(플레이어)이 마족진형을 선택한 케이스.
물론 그 선택에는 플레이어의 개입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온전히 유진의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똑같았다.
그렇다면 후자는?
냉정히 생각하자면, 마족들에게 있어 유진을 되살리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되살렸다기보다는 그의 시체를 찾아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당장 네크로멘서 계열의 마법을 이용해 그를 언데드로 부활시켰다거나.
그게 아니면 그의 시체로 겉모습만 닮은 꼭두각시를 만들어냈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가장 우려 되는 건 다름 아닌 첫 번째 경우였다.
눈앞의 유진이 진짜라면, 지금껏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마족 편에 넘어간 게 확실시되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현성이 그릴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하린과 그를 같이 구해내는 것.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최상의 시나리오.
이미 손을 쓰기에 늦은 상황이라면, 그가 내릴 판단은 단 한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유진을 죽여야 한다.’
마족 편으로 넘어간 유진은 필시 어떤 방향으로든 세상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회유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멸망이 초래하기 전에 그 근원을 제거해야 했다.
그대로 현성이 눈앞의 유진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여전히 세뇌에 빠진 하린을 연기하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결국 모든 건 유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따라 나뉠 상황. 지금 당장은 변하는 게 없다.’
우선 지금은 계속 하린을 연기하며 아카데미 침공계획을 막아내야 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유진이 하린을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그대로 나를 따라 오면 돼.”
“…….”
그 말에 현성이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남자에게 포옹을 당한 것도 모자라, 귓가에 속삭임까지 겪을 줄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현성, 참아라. 죽이면 안 된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알레시아가 재빨리 현성에게 전음을 전했다.
이에 현성이 알고 있다는 듯, 표정하나 변하지 않으며 꾹 참아냈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넌 주인공인거에 감사해라.’
유진이 <이스페리아>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서 참고 있는 거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현성은 당장에라도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파이어 펀치를 갈겼을 게 분명했다.
“하린아, 너도 좋지?”
“……응.”
그대로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이지 너무 좋은 나머지 혀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 대답에 유진이 싱긋 웃으며 그녀, 아니 그의 손을 잡았다.
“가자. 하린아.”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눈앞의 하린이 현성인 걸 눈치 채지 못했다는 사실.
그와 함께 유진이 하린의 손을 잡아끌며 시계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성은 틈틈이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사실 가장 확실한 건 그냥 한 번 베어버리는 건데.’
만약 가짜, 그러니까 언데드라거나 유진의 겉모습을 흉내 낸 꼭두각시라면 공격했을 때 살아있는 육체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 보일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냅다 공격하는 건 무리.
‘무엇보다도 만약 빼도 박도 못하게 진짜 유진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유진을 회유해야할지.
회유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오면 그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하군.’
현성이 눈앞의 유진을 흘깃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그때였다.
앞서 걸어가던 유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도착했어.”
마침내 시계탑 최상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유진이 등을 돌리고는.
양 팔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바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장소야.”
그런 유진의 뒤로는 아카데미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새로운 역사란 아카데미의 파괴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대로 유진이 현성을 향해 걸어왔다.
“그럼 그때까지 잠시 쉬고 있을래?”
“…….”
“넌 누구보다 소중한 열쇠가 될 테니까.”
그와 함께 유진이 손을 뻗어 현성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감촉.
이에 현성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마치 잠에 들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정황상 여기서는 이래야할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성의 감은 적중했다.
곧 유진이 쓰러지는 그를 받아들며, 구석에 눕혔다.
-스윽.
곤히 잠든 하린(의 모습을 한 현성).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진.
그대로 그가 시선을 돌려 밝은 달빛 아래, 아카데미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
그렇게 유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찰나.
구석에 조용히 누워있는 현성이 작게 미간을 좁혔다.
‘거 씨발, 눕혀줄 거면 좀 편한데 눕혀줄 것이지. 꼭 이딴 콘크리트 바닥에 눕혀야 속이 시원했냐.’
[……현성 참아라.]
‘알아, 알고 있다고.’
고요한 시계탑.
그곳에는 유진에게는 들릴 리 없는,
현성과 알레시아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