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악몽(6)
“……”
하린이 오빠가 내민 손을 보고 머뭇거렸다.
혼란스러웠다.
마족에게 구해졌다는 오빠도, 같이 마족의 편에 서자고 제안하는 것도 전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운 건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고요한 두 눈동자.
그곳에는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이름의 광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서, 내 손을 잡아.”
유진이 하린을 향해 읊조렸다.
물론 그녀라고 인간이 아예 밉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날 밤.
하린 역시도 유진과 같이 인간에게 쫓기던 몸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대변동 직후.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눈.
경멸, 증오, 분노.
유년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신이 반인반마인걸 숨겨온 게 아닌가.
동시에 유진이 망설이는 하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린,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유진이 하얀 손을 쥐었다 펼쳤다.
그러자 유독 핏기 없는 그의 손이 더욱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너도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 인간들은 결코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
“그 누구라 해도 말이야.”
그런 유진의 말에 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꼬옥.
이에 유진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하린이 자신의 양 손을 유진의 하얀 손에 포갰다.
마치 얼음장을 만지는 것 같은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대로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냐. 오빠.”
“……뭐?”
“단 한 명, 유일하게 단 한 명. 나를 이해해준 사람이 있어.”
그와 함께 하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현성.”
현성, 선천강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자,
어머니가 말했던 가문 중 유일하게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오빠와 헤어지고 나서 줄곧 혼자라 생각해왔던 그녀에게 있어,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해준 존재.
그게 바로 현성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오빠와 재회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
이에 하린이 유진의 손을 잡은 채 입을 열었다.
“오빠. 더 나은 길이 있을 거야.”
그녀는 이대로 영영 오빠가 인간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살아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인간에게 복수하는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과거 현성이 그랬듯, 이번에는 하린이 자신의 오빠의 손을 잡아줄 차례였다.
“그러니까 날 믿고, 내 곁에서 조금 더 지켜봐줄 수는 없을까?”
하린이 유진을 향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에 그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
잠시 고민하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대답에 하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좋아. 그럼 우선 나랑 같이…….”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진이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처럼 쉽게는 안 되는구나.”
그와 동시에 유진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대로 그의 발아래 있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모습에 하린이 유진과 아래를 번갈아보며 움찔거렸다.
“……오빠?”
뭔가 이상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에 하린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럴수록 유진은 더욱 더 강하게 그녀를 옥죄었다.
-스으으.
그와 함께 점점 커져가는 그림자.
그런 짙은 검은색 사이로, 무엇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흐릿한 회색의 형체들.
코와 입 같은 얼굴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네킹과 같은 얼굴형만 존재할 뿐.
말끔한 턱시도 차림의 그들은 저마다 악기를 들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부터 플루트나 호른까지.
그리고 따악. 유진이 손가락을 퉁긴 그 순간.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기기긱…!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소리.
이를 시작으로 시계탑을 타고 스산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하린이 옥상에서 들었던 그때와 같은 멜로디였다.
-멈칫.
그대로 하린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유령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서서히 초점을 잃어갔다.
이에 유진이 싱긋 웃으며, 하린의 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방금 전과는 달리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끌려오는 하린의 몸.
“전부, 전부 괜찮을 거야. 하린아.”
그러면서 유진이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일 밤 12시. 여기서 기다릴게.”
“…….”
그 말에 하린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율이 멎었을 때.
-뚝.
멍하니 서있던 하린의 몸이 무너졌다.
이에 그녀가 유진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잘 자, 내 동생.”
유진이 잠든 그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대사는 악몽 속,
하린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이 찾아온 아카데미.
하린이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으음…….”
그대로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하린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정말이지 이게 얼마 만에 맞는 상쾌한 아침인가.
무엇보다 어젯밤.
어젯밤은 그 지긋지긋한 악몽을 꾼 기억이 없었다.
덕분에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이에 하린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동안 피곤해서 그랬나.”
그럼 그렇지.
그것 말고 악몽에 별다른 원인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와 함께 하린이 창문 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아카데미의 모습.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
그대로 하린이 멍하니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도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린이 침대를 나섰다.
오늘은 아침부터 강의가 있는 날.
늦기 전에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다.
이에 잠시 뒤.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하린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음, 됐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기숙사를 나섰다.
역시 악몽을 꾸지 않아서 그런 탓일까.
발걸음조차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덕분에 하린은 평소보다 빨리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발견한 하린이 발을 멈추었다.
그는 다름 아닌 현성.
곧 그녀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고 그를 불렀다.
“오…!”
하지만 그때였다.
오빠라고 말하려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움찔.
이에 하린이 주춤거리며 입을 닫았다.
뭐지. 방금 전 그 느낌.
그리고 그녀가 망설인 그 틈에 하린을 발견한 현성이 먼저 말했다.
“안녕. 일찍 일어났네.”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하린이 방금 전의 기시감을 털어내며 싱긋 웃었다.
“선배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하린이 알기로는 현성은 오늘 아침수업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대로 그녀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당연히 트레이닝 룸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성은 아침수업이 없는 날에는 보통 트레이닝 룸에서 운동을 하는 게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그를 마주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잠깐 전해줄 게 있어서.”
“……저한테요?”
“응, 다행히 늦지 않게 만났네.”
그와 함께 현성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자, 이거. 받아.”
그대로 그가 건넨 것은 비타민 음료를 연상케 하는 유리병이었다.
“이게 뭐예요?”
그런 하린의 물음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클레아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받은 물약. 최근 악몽 때문에 잠 못 잔다면서.”
“아. 고마워요. 근데……, 이제는 괜찮을 거 같아요.”
“그래?”
“네, 오늘은 악몽 안 꿨거든요, 역시 그냥 조금 피곤했나 봐요.”
하린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현성이 아쉬운 듯 유리병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럼 이건 괜히 가져왔나?”
“네? 아, 아뇨.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러자 하린이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유리병을 건넸다.
“알아. 농담이야. 아무튼 그래도 이건 챙겨둬. 혹시 모르잖아. 그렇지?”
현성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하린이 유리병을 받았다.
“……고마워요.”
그의 말대로 당장 내일 다시 악몽을 꿀 지도 모르지 않는가.
무엇보다 현성이 자신을 생각해서 준 물약이다.
당연히 받는 게 예의였다.
“다음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이번에 괜찮은 가게를 찾았거든요. 기대해도 좋아요.”
하린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와 함께 어느새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들어가 봐. 강의에 늦겠다.”
“그럼 다음에 봐요. 선배.”
그대로 하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저 멀리 있는 시계탑과 방금 전 하린이 들어간 강의실을 번갈아보았다.
[……어젯밤 있었던 일. 말 안 해줘도 되겠느냐?]
어느새 그의 어깨 옆에 나타난 알레시아가 물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알레시아의 턱밑을 간질거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어제 하린이 악몽을 꾼 것부터 시계탑에 갔던 것까지.
현성은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알려줘도 바뀌는 게 없으니까.’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던 선율.
하린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세뇌에 걸린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지금 와서 어젯밤 있었던 일을 알려준다 한들.
세뇌가 풀리지 않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억지로 세뇌를 푸는 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
중간에서 마족이 눈치라도 챈다면 하린의 신상에 위험이 갈 수 있으며, 무사히 세뇌를 푼다고 해도 다시 걸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하린의 세뇌를 풀려고 하기보다는 아예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나았다.
“……아무튼 그래서 전에 말한 건 가능할 거 같아?”
현성이 알레시아를 향해 말했다.
[글쎄. 최대한 힘을 모으고는 있지만, 자세한 건 그때 가봐야 알 것 같군.]
이번 에피소드를 앞두고 현성은 알레시아에게 한 가지 부탁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본체로 헌신하여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모아달라는 것.
이에 알레시아는 최대한 힘을 비축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 그 결과는 확신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티리카였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그녀의 계약자는 현성.
그에 따라 간단한 마법정도는 문제없었지만,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만약 무리하게 힘을 썼다가는 나까지 위험해진다.’
둘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만큼.
자칫하면 역으로 현성까지 데미지를 입을 수 있었다.
거기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블랙마켓에서 온갖 저주에 당해 잡혀있지 않았는가.
‘짧긴 하지만 공성전에서도 본체로 헌신했었고.’
이에 알레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면목이 없군.]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말고 지금은 힘을 모으는 데만 전념해줘.”
현성이 알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제로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승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방심은 금물.
“우선은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자고.”
[오늘 밤 말이지?]
“그래.”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바로 오늘 밤.
그때가 이번 계획의 성공을 가르는 키 포인트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