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악몽(5)
깊은 밤이 찾아온 아카데미.
시계탑 안.
유진이 자신의 품에 안긴 소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제 진정됐어?”
그런 소녀의 금색 머리칼은 유진의 머리칼과 똑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하린.
이에 하린이 눈물을 닦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하린은 도대체 얼마나 운건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이 피식 웃으며 남은 눈물을 닦아줬다.
“아주 개구리가 따로 없네.”
“아. 뭐래.”
그런 유진의 말에 하린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대로 그녀가 빤히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려 2년 만에 보는 오빠였다.
덕분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좋아서.”
하린이 유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저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분명 아직도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의문이 있기 때문일 터.
“…….”
달빛이 내리던 깊은 밤.
적막함이 흐르는 깊은 숲 속.
유진은 그 날, 하린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하린은 다시는 자신의 오빠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던 오빠가 돌아왔다.
이에 하린은 당장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 날이 궁금해?”
유진이 그런 하린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대로 그가 하린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듣고 싶어? 원한다면 들려줄게.”
“…….”
그런 유진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주먹을 꾹 쥐고는.
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야. 그날의 진실을 전부 이야기에는 말이야.”
그와 함께 유진이 그 날.
고요한 숲 속.
자신이 하린을 위해 희생했던 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 *
10년 전 대변동이 터지고 나서.
곳곳에서는 게이트 너머에서 마족과 괴수들이 쏟아졌다.
그때는 매일 매일이 지옥이었으며, 매일 매일이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전쟁을 끝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건 유진과 하린의 부모도 마찬가지.
둘의 어머니는 마족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들의 편에 서서 싸웠다.
그 결과, 그녀는 인간들과 함께 자유를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대변동이 끝나던 날.
유독 햇살이 밝던 그 날.
하린의 부모는 장렬히 전사했다.
인류는 그 날을 자유를 얻은 날이라 기록했으나, 그 날은 하린에게 있어 첫 번째로 떠올리기 싫은 날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이 전부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의 부모님이 남긴 유언의 내용은 이랬다.
‘너희를 남겨두고 죽는다한들 분명 다른 가문에서 너희들을 도와줄 테니 슬퍼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이때만 해도 하린은 그런 부모님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가문의 도움 따위는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싸워왔던 가문들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제 막 상처가 아문 인류에게 있어, 마족에 대한 용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건 반인반마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그렇게 하린은 오빠와 단 둘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둘의 나이가 고작 6살과 7살.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다른 가문을 찾아가기로 했지. 여기까지는 기억나?”
“……응. 기억나.”
유진의 말에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가문에서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직접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당시 7살인 유진은 6살인 자신의 동생, 하린의 손을 잡고.
부모님의 남겨준 유언장을 속에 꼭 쥔 채, 대변동 당시 같이 싸웠던 가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가문들을 찾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에게 있어 대위기를 구해낸 영웅들이었으니까.
그만큼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추앙했으며, 입을 모아 그들의 업적을 칭송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과 하린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이야기 속, 자신들의 부모님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부모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유진과 하린 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같이 싸워왔던 가문들은?
그들이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을 품었으나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지.”
하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다른 가문들을 만나도 그 결과는 똑같았다.
하지만 둘의 눈에는 보였다.
입으로는 전혀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눈은 전부 경멸과 분노로 물들어있었다.
채 아직 마족에 대한 분노가 식지 않았던 그때.
이는 곧 반인반마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며,
마족과 인간, 그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허나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었을까.
“그 많은 가문들 중 단 하나의 가문만이 우리를 받아줬지.”
“…….”
유진의 말에 하린이 주먹을 작게 쥐었다.
아마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대변동 이후 마족과 괴수들을 연구했던 걸로 유명한 가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파괴와 살육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인류의 의학기술이 그랬으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족과 괴수들의 경이로운 회복력과 인간보다 몇 배나 강력한 육체.
그들은 그 능력을 선망했으며, 동시에 그걸 인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인반마의 피가 그 열쇠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연구가 계속되기에는 크나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실험재료.
괴수만으로는 연구에 한계가 명확했다.
그야 그들이 필요한건 괴수가 아닌,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니까.
그런데 반인반마가 제 발로 가문을 찾아왔다.
그것도 무려 둘이나.
그만큼 그들의 입장에서는 유진과 하린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실험체였다.
이에 그들은 두 팔 벌려 둘을 받아들였다.
그때만 해도 하린은 그게 부모님이 말한 인간의 따뜻한 마음씨와 순수한 호의라고 믿고 있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너나 나나 서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테니까.”
유진이 싸늘하게 말했다.
방금 전 따뜻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하지만 하린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우리 둘에게 있어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처음에는 그저 따뜻한 밥을 주고, 깨끗한 옷을 주고,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허나 그들은 점차 본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인반마의 피.
그리고 그걸 먼저 알아차린 건 유진이었다.
가주의 방에 가득한 연구자료.
그곳에는 유진과 하린의 피를 손에 넣을 계획까지 자세히 적혀있었다.
이에 유진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 전.
하린과 같이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때도 오늘처럼 달이 밝은 밤이었지. 그렇지?”
유진이 그날을 떠올리며 창을 따라 부서지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하린과 도망치던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우선 나와 너.”
“…….”
“그 다음은 우릴 쫓는 가문의 인간들.”
유진이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다름 아닌.
“마족.”
하린이 주먹을 쥐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문에서는 뒤늦게 그들의 탈출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추적대를 보냈으나, 예기치 않은 다른 세력의 개입으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은 바로 대변동 이후 몰래 숨어있던 마족들.
그동안 뒤에서 하린과 유진을 감시하고 있었는지,
그게 아니면 뒤늦게 알아차린 건지.
둘의 위치를 알게 된 마족은 가문의 추적대를 가차 없이 죽여 버리며, 유진과 하린의 뒤를 쫓았다.
아직도 하린의 기억 속에는 추격대의 심장을 으깨며 낄낄거리는 마족이 생생했다.
그렇게 둘은 가문의 인간들과 마족, 두 세력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가문의 추격대에게 죽든.
마족에게 죽든.
뭘 어떻게 해도 죽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두 세력 다 노리는 건 반인반마의 피였으니까.
이에 유진은 결단을 내렸다.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그 사이 동생만이라도 살리기로.
유진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하린을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하린이 도망치던 그날 밤.
“내 걱정하지 말고 먼저 도망쳐.”
“하지만 오빠는…….”
“유하린. 후회는 항상 늦잖아.”
그녀가 망설일 때마다 매번 말하던 오빠의 말버릇.
그 말버릇을 마지막으로.
하린은 두 번 다시 유진을 볼 수 없었다.
후에 무사히 도망치고 나서.
다시 그 숲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 남아있던 것은 오직.
붉은 피로 범벅이 된 브로치뿐이었다.
그리고 그 브로치는 어머니가 죽기 전.
하린과 유진에게 준 유품이었다.
그 날, 숲속에서 브로치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지금 그녀의 앞에는 유진이 서있었다.
이에 하린이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며 말했다.
“꼼짝없이 거기서 죽은 줄 알았어.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고.”
“…….”
그 말에 유진이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맞아. 만약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거기서 그대로 죽었을 거야.”
“……그들?”
하린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로 그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오빠도 뒤늦게 다른 가문들의 도움을…….’
자신이 현성을 만난 것처럼.
오빠도 다른 가문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었다.
만약 지금도 현성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오빠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현성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선천강에서 죽었을 터.
동시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하린은 지금껏 버티며, 이렇게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잘됐다.
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빠에게 현성을 소개하자.
그렇게 생각한 하린이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 사실은 나도…….”
“…그들은 바로.”
그대로 하린이 현성을 소개하려는 찰나였다.
유진이 한 박자 빨리 말했다.
“마족.”
“……뭐?”
“그들이 나를 구해줬어.”
-움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하린이 주춤거렸다.
마족. 대변동 당시 인류를 학살한 종족이자, 그날 가문의 인간들과 똑같이 자신과 오빠의 피를 노린 종족.
그런데 마족이 오빠를 구해줬다니.
“……그게 사실이야?”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유진이 이해한다는 듯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충분히 이해해.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전부 사실이야.”
“그럼 마족들은 왜 우리를 쫓아온 건데? 우리의 피를 노리고 온 거잖아!”
그 날, 추격대의 심장을 움켜쥐고 낄낄거리는 마족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마족이 자신과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찾았다.”
단 한마디.
그 하나만으로도 공포를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족들 역시 우리의 피를 노리고 있단 걸.’
허나 유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마족은 우릴 구하러 온 거였어.”
“……뭐?”
그 말에 하린이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유진이 말했다.
“우리의 어머니. 그들은 우리 어머니의 부탁으로 지금껏 우리 둘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어.”
“……그럼 마족들에게 구해진 뒤에는?”
하린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 뒤에는 왜 나를 안 찾아왔는데!”
그동안 오빠가 죽은 줄로만 알고 얼마나 외로웠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건…….”
유진이 하린의 어깨를 잡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금에서야 때가 도래했기 때문이야.”
“……때가 도래해?”
“그래, 마족이 이 세상을 바로 잡을 때가.”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마족에게 구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날을 잊지 않았어.”
그와 함께 유진의 입을 타고 으드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우리를 배신한 인간들을, 우리를 찢어놓은 그 인간들을, 그 가증스러운 인간들에게 복수할 날을.”
격양된 어조로 말하는 유진의 눈은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꾸구국!
동시에 점점 하린의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분노에 찬 유진은 그런 동생을 신경 쓰지 못했다.
“우릴 경멸하고, 무시하던 그 인간들을 전부 끝내 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오빠, 우선 이건 좀 놓고…….”
“내 말 알아들어?”
“오빠, 아파!”
결국 참다못한 하린이 표정을 찡그리며 외쳤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유진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뒤늦게 손을 놓고 사과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어.”
“…….”
방금 전 유진의 모습은 줄곧 다정하고 따뜻하던 오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유진의 말대로 그가 마족에게 구해졌다면.
자신을 죽이려던 인간을 증오하고, 그들에게 복수심을 품는 건 당연했다.
허나 그 분노는 생각 이상이었다.
하린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럼 오빠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맞아.”
그대로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린아. 나와 같이 마족들의 편에 서자.”
달빛이 내리는 시계탑 아래.
유진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런 그의 미소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섬뜩했다.
마치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는 그때의 선율처럼.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