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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77화 (177/240)

177화 악몽(2)

그대로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시연이었다.

“……아, 이름이 분명 레이첼이었죠?”

시연이 레이첼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말했다.

아마 아카데미 입학식 때였을 것이다.

그때 당시 레이첼은 아직 속세에 물들기 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뱀파이어를 부흥시키겠다는 사명을 가졌던,

한마디로 피의 여제로서의 포스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만큼 레이첼 본인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당시의 그녀는 알게 모르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은발과 적안은 물론이며 주위에서 풍겨오는 고귀함.

거기다 결정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외모까지.

주목을 받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덕분에 시연이 그녀를 기억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때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확실해.’

시연이 눈앞의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입학식 때와 비교하면 어딘가 가벼워진 분위기지만, 저 밝은 은발과 붉게 빛나는 적안.

그 둘만은 여전했다.

“그러는 넌 누군데.”

레이첼이 까칠하게 물었다.

그러자 시연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하시연.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입니다.”

-움찔.

학생회장이라는 소리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차분한 눈빛과 깔끔하게 정돈된 옷매무새.

레이첼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녀석과 얽히면 뭔가 껄끄러워질 거 같아.’

그런 그녀의 판단은 다년간의 방구석 히키코모리 생활로 다져진,

그러니까 양지의 인간을 기피하려는 경향도 있었지만, 분명 뱀파이어 특유의 뛰어난 직감도 있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줄곧 현성 옆에 서있는 시연을 흘깃 바라보았다.

‘분명해. 현성과 뭔가 있다.’

학생회장인 걸 감안한다 한들, 단순히 현성과 마주친 사이가 아닌 거 같았다.

뭐랄까. 그보다 더 깊은.

그래, 가령 예를 들자면 흔히 말하는 썸과 같은 묘한 분위기.

현성과 시연 사이에서는 그런 핑크빛 분위기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둘 사이를 잘 모르는 제3자 봤다면 그냥 지나칠만한 느낌.

그러나 레이첼이 가진 뱀파이어의 레이더는 여전히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

이에 레이첼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시연을 향해 강한 경계심을 표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평소와 다른 냄새를 풍기는 주인을 발견한 고양이와도 같았다.

그때였다.

“그래서 현성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시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보기에는 그저 물어보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투 속에는 묘한 견제가 섞여있었다.

시연 역시도 레이첼과 현성사이에 뭔가 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흔히 검사의 기감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마주치기 직전.

레이첼이 했던 말.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맥락 상 현성을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이려 했어.’

그리고 레이첼의 말투나 태도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 같았다.

그렇다면 레이첼은 현성과 무슨 밀회를 가졌던 걸까.

‘느낌이 좋지 않아.’

시연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작게 주먹을 쥐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단 둘이 볼 일이 있어서 말이지.”

레이첼이 ‘단 둘이’ 라는 말에 강세를 주며 싱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시연이 주춤거렸다.

이에 레이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공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잠시 비켜주겠어? 전부터 약속했던 일이거든.”

단 둘이 만나는 것도 모자라, 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일.

그런 레이첼의 말에 시연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전장에서 느껴오던 위기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위험이었다.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하며, 이대로 가다가는 현성과 멀어질 거 같은.

그래, 꼭 그를 뺏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위기감에 시연이 재빨리 현성의 손을 낚아채며 꼬옥 힘을 주었다.

“그건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저희는 이제부터 수업을 들으러 가야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말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초조함을 적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동안의 전장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연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레이첼을 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였다.

허나 그건 레이첼도 마찬가지.

“수업보다 급한 일이라면 어쩔래. 가령 미래의……”

“학생에게 있어 수업보다 급한 일이 있다니 그것 참 궁금하네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대로 둘 사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

이에 결국 보다 못한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둘 다 진정해.”

그러면서 그가 우선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그 약속이란 거. 게임패드 고장 났다는 거였지?”

“윽.”

그와 함께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현성의 말대로 방금 전 말한 약속은 다름 아닌 게임패드의 고장에 관한 것.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뭔가 시연에게 밀릴 거 같아 괜히 그럴싸하게 말했던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게임패드?”

이에 시연이 현성과 레이첼을 번갈아보았다.

“응. 고장 났다고 해서 내가 고쳐주기로 했거든.”

그런 현성의 대답에 시연이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단순히 게임패드 때문이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기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았다.

“아무튼 레이첼. 게임패드는 수업 끝나고 봐줄게.”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영 심기가 불편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러던지.”

방금 전 같은 상황에서는 모른 척 자신의 편을 들어줘도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굳이 그걸 그렇게 말하냐.”

레이첼이 혼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웅얼거렸다.

만약 평소라면 이 정도 말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연의 앞.

이상하게 그녀 앞에서는 요만큼도 밀리고 싶지 않았다.

‘……꼭 지는 느낌이란 말이야.’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허나 그때였다.

현성이 레이첼을 빤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 근데 너도 우리랑 같은 강의실 아니었어?”

분명 현성의 기억이 맞다면 이번에 들으러 가는 수업은 시연 뿐만이 아니라 레이첼도 같이 듣는 강의.

그런 그의 말에 시연이 흠칫거리며 휙 고개를 돌렸다.

“……!”

같은 강의실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종종 강의실에서 레이첼을 봤던 거 같다.

물론 그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랬다.

“같은 강의?”

“그래, 너 설마 이번에도 째려고 했냐?”

“…….”

이에 잠시 멍하니 서있던 레이첼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나도 이제 가려고 했는데?”

“아니긴 무슨.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같이 가.”

“……그, 그렇게까지 말하니 별 수 없네!”

곧바로 레이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히 현성의 옆에 붙었다.

“자, 그럼 가볼까?”

그러면서 레이첼이 시연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늦기 전에 가야하잖아. 그렇지?”

어느새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예. 늦기 전에 가야죠.”

그대로 시연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레이첼을 바라고 있는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강의실.

현성과 시연, 레이첼이 앉아있는 자리의 바로 뒤.

“야. 오늘 뭔가 춥지 않냐.”

“그러게. 이상하네.”

두 학생이 묘하게 추워진 강의실의 공기에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체모를 추위의 근원지는 바로 그들의 앞.

그러니까 시연과 레이첼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

“…….”

둘은 얼핏 보기에는 조용히 강의를 듣고 있는 거 같았지만, 그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강의 내내 서로를 향해 견제의 눈빛을 주고받는 시연과 레이첼.

레이첼이야 그렇다 치지만, 평소 모범생으로 유명한 시연에게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자, 시연아, 이 경우에는 답이 어떻게 되지?”

갑작스레 들어온 교수의 질문.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검술명가 하 가문의 차기가주이자 학생회장 하시연.

“56%입니다. 오차 값까지 포함한다면 정확히 55%에서 58%가 됩니다.”

레이첼을 견제하는 와중에도 시연은 강의내용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여러 의미로 무시무시한 집중력.

이에 교수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정확하네.”

그런 교수의 말에 시연이 레이첼을 흘깃 바라보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도발.

그대로 레이첼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저게…….’

허나 그도 잠시.

교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기서 x값을 170으로 지정했을 때 결과 값은 어떻게 될까요. 아는 학생?”

그때였다.

레이첼이 눈을 반짝이고는 곧바로 손을 들며 대답했다.

“14500입니다.”

그와 동시에 교수가 꽤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쳤다.

“맞습니다! 대단하군요. 설마 그 짧은 시간 내에 식을 계산한건가요?”

“물론이죠.”

레이첼이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레이첼 그녀는 <이스페리아>의 설정상 천재.

그 중에서도 기억력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그건 암산도 마찬가지.

“하하, 이번 학기에는 뛰어난 학생들이 많군요. 아주 좋습니다.”

교수가 흡족한 듯 말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방금 전 시연이 그랬던 것처럼.

시연을 흘깃 바라보고는 보란 듯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

그 모습에 시연이 입술을 깨물며 작게 미간을 좁혔다.

덕분에 그 사이에 껴있는 현성은 정말이지 난처할 다름이었다.

그대로 그가 조용히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먹은 것도 없는 데 체할 거 같군.’

그렇게 둘의 치열한 경쟁(?)은 기어코 강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기 무섭게.

-벌떡!

현성과 시연, 레이첼.

셋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일어났다.

그와 함께 시연과 레이첼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내 방으로……!”

“현성, 잠시 나랑 학생회실에……!”

이에 둘이 하던 말을 멈추고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서로를 째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틈을 노리던 현성이 재빨리 둘 사이를 벗어나며 한 학생을 향해 손을 들고 다가갔다.

“야, 해철아, 간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냐?”

“……어? 나?”

“그래, 임마!”

그런 현성의 말에 해철이라고 불린 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난 진석인데…….”

“하하, 농담도 참.”

그러자 현성이 황급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럼 넌 이제부터 해철이다.”

-움찔!

그러고는 그가 당황한 진석, 아니 해철을 이끌며 말했다.

“뭐? 잠깐 이야기 할 게 있다고? 아, 이거 어쩔 수 없네.”

“난 그런 적 없……”

“그래, 가자. 가! 음료수는 내가 쏜다.”

곧바로 현성이 시연과 레이첼을 향해 고개들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미안. 금방 올게!”

그대로 현성이 해철을 끌고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뒤.

강의실을 벗어난 현성이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었다.

“허어어어……”

그야말로 숨 막히는 강의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무사히 자리를 피하는데 성공한 현성이 해철을 향해 말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그, 그래? 그럼 뭐 다행이네…그래서 이제 나 가도 돼?”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어, 그래. 다음에는 내가 진짜 음료수라도 하나 살게.”

“으, 응….”

그 말에 해철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평화가 찾아온 아카데미의 복도.

고요한 복도 계단 저 너머,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빠?”

그건 다름 아닌 유하린.

곧 현성을 발견한 그녀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간만이네요. 근데 왜 그렇게 숨을 몰아쉬고 계세요?”

하린이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 급한 일이 있었거든.”

그에 이어 숨을 돌린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하여간 오랜만이네. 하린아.”

“그러게요. 그동안 오빠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뭐……나름 이것저것 하면서?”

현성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블랙 마켓가서 드래곤도 좀 만나고, 직계파랑 땅따먹기도 하고 왔지.

그 사이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도 만나고 말이지.

“넌 그동안 어때? 잘 지냈어?”

“……저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새 악몽을 좀 자주 꾸긴 하는데……”

그러면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허나 그도 잠시.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요즘 따라 몸이 피곤한가 봐요.”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멈칫.

악몽이란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며 날짜를 확인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그대로 현성이 눈앞의 하린과 창밖을 바라보았다.

등장인물 유하린의 악몽.

이는 곧 다음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전조와도 같았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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