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악몽(1)
그대로 현성이 눈앞을 타고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무명(無名)의 검집]
[등급 : ??]
설명 : 과거 이름 없는 검사가 가지고 다니던 검집이다. 검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겉에 덮인 먼지만이 그 세월을 어렴풋이 추측하게 해준다.
무명의 검사가 쓰던 검집, 그리고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
설명 창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검집은 바로 옆에 진열되어 있는 다른 검들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보였다.
-푸스스.
현성의 손에 들린 검집을 타고 작은 먼지가 일었다.
이에 진태가 재차 그를 향해 물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는가.”
하지만 현성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네. 이걸로 결정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진태가 미간을 좁히며 아무 말 없이 검집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창고에 있었는지도 모를 검집.
수많은 검들 사이에서 과연 무엇이 그의 마음을 끈 것일까.
“혹 그걸 고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들으면 실망하실 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니 좀 더 들어보고 싶군.”
그런 진태의 말에 현성이 검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제 취미입니다.”
“……취미?”
“골동품을 모으는 걸 좋아하거든요.”
현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진태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별난 취미로군.”
그대로 그가 벽에 진열된 검들을 바라보았다.
그 검들은 전부 세간에서 장인들이 만든 명검이라 불리는, 그런 검들이었다.
그런데 과연 어느 누가 단지 취미라는 이유로 이 수많은 명검을 무시하고 낡은 검집을 고를 수 있겠는가.
물론 단순히 검을 보는 눈이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연과 연서는 물론이며, 자신의 첫째 딸 수연이 직접 말했지 않는가.
일검(一劍). 단 일합만으로 용오름을 갈랐다고.
단언한다.
그런 녀석이 검을 보는 눈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검집을 선택했다라…….’
그대로 진태가 현성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후회는 없겠지?”
“예.”
단호하기 그지없는 현성의 말.
이제 와서 검이 아닌 다른 물건을 보여준다 한들,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 그의 대답에 진태가 천천히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그만 나가도록하지.”
본인의 의지를 확인한 이상.
구태여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재밌는 녀석이군.”
진태가 현성이 들고 있는 낡은 검집을 흘깃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런 진태의 입가에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 가문의 정문 바로 앞.
그곳에는 연서와 현성이 서있었다.
“이제 간다고 했냐?”
연서가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슬슬 돌아가야지.”
하 가문에 있은 지도 꽤나 오래됐다.
무엇보다 퀘스트의 보상도 받았겠다.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야.”
그런 현성의 말에 연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모쪼록 한시라도 빨리 내 눈앞에서 꺼져…아니 돌아갔으면 좋겠어.”
“아. 꼬우면 눈을 감으시던지.”
그대로 현성이 귀를 후비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연서가 심기가 불편한 듯.
아무 말 없이 미간을 구기며 현성을 째려보았다.
“…….”
“왜 내가 직접 감겨줄까?”
그러면서 현성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에 연서가 작게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하여간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뭐래. 빨리 안 가?”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저 멀리 걸어오는 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직 챙길 게 있어서.”
현성이 굳이 뒤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연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불여우가 끝까지 사람의 성질을 긁는구나.
“챙기긴 누굴 챙겨! 언니는 나랑 같이 여기……”
“아니. 난 저거 말한 건데.”
현성이 연서의 말을 뚝 자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연의 품안에 들려있는 긴 케이스.
다름 아닌 방금 전 창고에서 가져온 낡은 검집이었다.
“……크흠.”
이에 연서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그녀가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시연이 들고 있는 케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넌 기껏 창고까지 가놓고서 무슨 저런 골동품을 고르냐? 하여간 보는 눈 없기는……저런 걸 도대체 어디다 쓰려고 가져왔냐?”
그러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나중이 되면 다 알겠지.”
의미심장한 그의 말투.
이어서 그가 케이스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실제로 저 검집은 다음 에피소드 때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 여기.”
어느새 그의 앞까지 온 시연이 케이스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
“아냐. 이 정도 가지고 뭘…그나저나 이제 돌아간다고 했지?”
“응. 이 이상 더 있는 건 실례일 거 같아서.”
시연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에 그녀 옆에 있던 연서가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응, 실례 맞으니까. 어서 사라져.”
하지만 그때였다.
시연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더 있어도 되는데…….”
-흠칫!
그런 시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서가 움찔거리며 휙 고개를 돌렸다.
“……언니?”
이 심상치 않은 핑크빛 기류는 도대체 무엇이냔 말인가.
연서가 주먹을 쥐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취임식이 끝나고 도주한 그때,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이 가증스러운…….”
그 모습에 현성이 연서를 향해 조소를 짓고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내일이면 아카데미에서 보잖아.”
이에 시연이 수줍게 웃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럼…내일 봐.”
“컥…크허헉…….!”
동시에 그녀의 옆에 있던 연서가 심장을 움켜쥐며 비틀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하도록 하자.
아무튼 그렇게 시연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현성은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 *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카데미.
우우웅. 현성의 스마트폰을 타고 작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런 그의 액정에는 시연의 메시지가 떠있었다.
하시연 : 현성, 혹시 잠깐 학생회실로 와줄 수 있어?
이에 머지않아.
메시지를 확인한 현성이 답장을 보냈다.
유현성 : 무슨 일인데?
하시연 : 아, 그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한편 학생회실.
그곳에는 시연이 스마트폰을 붙든 채, 긴장되는 얼굴로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말까 고민한지 어느새 30분이 지났다.
그 결과, 마침내 메시지를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
이제 남은 건 답장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띠링!
현성에게 답장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시연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유현성 : 알았어. 금방 갈게.
흔쾌한 현성의 대답이 있었다.
이에 시연이 배시시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제 곧 현성이 온다는 사실에 시연이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10분정도 지났을까.
-똑똑.
학생회실을 타고 노크소리가 울려 퍼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아. 들어가도 돼?”
현성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시연이 대답했다.
“응, 들어와.”
“그럼 실례할게.”
-끼익.
그와 함께 현성이 문을 연 순간이었다.
고요한 학생회실에 들어온 그가 처음 본 모습은.
다름 아닌 단발머리의 시연이었다.
그동안 허리까지 길게 나있던 머리칼과는 달리.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칼.
이에 시연은 달라진 머리가 여간 부끄러운 듯,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자, 잘 어울려?”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쭈뼛거리는 시연.
그런 그녀는 평소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꽤나 색달랐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보여주려고 부른 거야?”
“응. 그게 잘 어울리는지도 물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은 꼭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러면서 시연이 현성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이스페리아>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극의 : 절을 익히고, 모든 것을 끊어낸 만큼.
시연은 머리를 자르며, 나름대로 자신의 다짐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성이 봤던 건 게임 안의 컷씬이 전부,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게 메인 히로인의 위력인가.’
그동안 보기만 해도 차가움이 묻어나오는 분위기와는 다른, 따스함이 가득 느껴지는 분위기.
만약 다른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연서가 봤다면 당장 심장을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모습이었다.
“잘 어울려. 엄청.”
그대로 현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그제야 줄곧 긴장되어 있던 시연의 표정이 풀렸다.
동시에 그녀가 옅은 미소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이에 현성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머리 자른 모습을 본 건 내가 처음이네?”
“응, 연서도 모를 거야.”
“……그래?”
“아. 그리고 사실 하나 더 부탁할게 있는데…..괜찮아?”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원작에서도 이런 게 있었던가.
그의 기억 상으로는 분명 단발 시연의 컷씬을 보여주고 끝나는 걸로 아는데.
“무슨 부탁?”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념으로…사진 하나만 같이 찍어줄 수 있어?”
시연이 귀까지 빨개진 채.
조심스럽게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안 돼?”
이에 현성이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혀, 현성? 어디 아파?”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갑작스레 너무 강한 공격이 들어왔다.
‘……이렇게 올려다보는 건 반칙이지.’
현성이 애써 진정하며 대답했다.
“그럼 찍을까?”
그런 현성의 물음에 시연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연과 현성.
단 둘이 있는 학생회실을 타고 몇 번의 카메라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이제 됐어?”
“응, 고마워.”
시연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는 여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작은 미소를 지으며 앨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뭔가 생각난 듯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혹시 이거 나한테도 좀 보내줄 수 있어?”
“응. 바로 보내줄게.”
그와 함께 현성의 스마트폰으로도 사진이 도착하고.
사진이 온 걸 확인한 그가 누군가에게 시연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현성의 스마트폰을 타고 쉴 새 없이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에 그가 히죽 웃으며 액정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연서.
-우웅! 웅! 우우웅! 우웅! 웅!
마치 융단폭격을 연상케 하는 연서의 메시지.
그녀는 돈을 주고서라도 사진을 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출함과 동시에, 현성이 시연과 같이 사진을 찍었음에 분노하고 있었다.
“……현성? 확인 안 해도 돼?”
시연이 현성의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며 말했다.
“응. 괜찮아. 스팸이야.”
그렇게 말하는 현성은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그러면서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이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다음 수업은 시연과 같은 강의.
그대로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의 늦겠다. 이제 갈까?”
“응, 가자.”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 후로 학생회실을 벗어나 강의실로 향하는 길.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코너를 도는 찰나였다.
“아니 현성 얘는 왜 전화를 안 받……”
레이첼이 현성의 스마트폰이 꺼져있음에 툴툴대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쿠웅!
현성과 레이첼이 부딪혔다.
이에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화를 냈다.
아니 화를 내려 했다.
“뭐야? 눈 똑바로 뜨고……현성?”
그대로 현성을 발견한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뒤에 있던 시연은 아직 벽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태.
곧바로 레이첼이 현성의 손을 잡아끌고 말했다.
“야. 너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일단 내 방으로 가서……”
-멈칫.
그때였다.
뒤늦게 레이첼이 현성의 옆에 있던 시연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현성과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
-꼬옥.
그와 함께 시연 역시도 현성의 손을 잡고 있는 레이첼을 확인했다.
이에 시연과 레이첼 둘 사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
그리고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시연과 레이첼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너. 누구야.”
그런 둘의 눈빛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