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가주 취임식(5)
자신의 딸이 눈앞의 현성에게 고백을 한 사실을 알고 살기를 내뿜는 하진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는 원작의 전개에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지금, 여기서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단 한 가지.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 있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넘겨야, 사지와 목숨을 부지하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에 따라 현성이 재빨리 옆에 있는 연서에게 sos사인을 보냈다.
‘살려줘.’
차마 말로 전할 수는 없었지만, 현성의 눈빛에 담긴 의지는 확실히 전해졌다.
하지만 그때였다.
연서가 히죽 웃더니 곧바로 입을 가리며 놀란 듯 말했다.
“아참! 맞아요. 그런 일이 있었죠.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안 그래도 호시탐탐 현성을 담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연서에게 있어 최적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잘 가라. 불여우.’
그대로 연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직 그 대답은 듣지 못한 거 같아요.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요?”
“……그래?”
그런 연서의 말에 진태가 현성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묘하게 살기가 강해진 건 그의 착각일까.
이에 현성이 식은땀을 흘리며 연서를 바라보고 작게 웃었다.
‘하하, 이 년 봐라.’
아주 날 담구겠다고 작정했구나.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서라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게…….”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시연이 재빨리 진태와 현성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와 함께 그녀가 덥썩 현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혀, 현성, 취임식이 끝나고 내가 부탁한 거 있었지? 그건 어떻게 됐어?”
그런 시연의 귀는 어느새 귀까지 빨개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잠시 멍하니 있던 현성이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아. 아카데미에 그거 말이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괜찮아?”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건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연이 급조한 말.
동시에 연서가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면 차라리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래?”
그러면서 연서가 현성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히히! 못가, 절대 못가!
연서의 눈을 타고 어떻게든 현성을 담가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저 독한 것……’
하지만 시연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녀가 현성의 손을 마저 끌며 말했다.
“연서야, 미안. 워낙 급한 일이라서 잠깐 자리를 비워야할 거 같네.”
그대로 시연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진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죄송해요. 잠시 실례할게요.”
“시, 시연아 잠깐…!”
“가자. 현성.”
그러면서 시연이 냅다 현성의 손을 잡아끌며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차마 따로 대처를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
그렇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모여 있던 테이블에는 연서와 진태만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제길.”
연서가 분한 듯 주먹을 쥐며 시연과 현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미 그 둘은 취임식을 벗어난 지 오래.
이에 그녀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 다음에는 기필코…….”
* * * * *
그 후로 얼마나 달렸을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시연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 가문 내에 위치한 작은 연못.
“하아…하아……”
그대로 시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건지 모르겠다.
방금 전은 빨리 현성을 데리고 그곳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현성, 괜찮아?”
시연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괜찮아?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자 시연이 크게 숨을 고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러면서 시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려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움찔!
뭔가 알아차린 시연이 멈칫거렸다.
오른손을 따라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
이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
그러자 그곳에는 아직까지도 현성의 손을 꽉 움켜잡은 자신의 오른손이 보였다.
방금 전 급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계속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연이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현성의 손을 놓았다.
“흐잇!”
그와 함께 시연이 갈 곳 잃은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시연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괜찮아. 오히려 내가 고마운걸. 너 아니면 큰일 날 뻔 했어.”
현성이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연서의 배신과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리고 살기어린 진태의 모습.
만약 시연의 어시스트가 아니었으면 현성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아무튼 덕분에 지금은 눈앞에 쉴 새 없이 떠오르던 메시지도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
이걸로 일단 그의 안위는 무사했다.
“그래서 지금은 좀 진정됐어?”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덕분에.”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들려오는 건 오직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 뿐.
안 그래도 가뜩이나 공성전 이후로 단 둘이 있으면 어색한마당에 이렇게 고요한 연못에 있으니 어색함은 더더욱 커져갔다.
“…….”
그대로 시연이 애꿎은 동백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 자료……고마웠어.”
취임식 전에 현성이 건네준 자료.
만약 그 자료가 아니었으면, 진우의 페이스에 휘말릴 뻔 했다.
무엇보다 진태를 부른 것 역시도 현성.
덕분에 취임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냐. 뭘 그런 거 가지고.”
현성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시연이 빤히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떻게 그 자료를 손에 넣을 걸까.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동시에 현성이 시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에 시연이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만 속아줄게.”
이럴 때마다 현성은 맨날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 뒤에는 항상 그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선천강에서도, 불의 둥지에서도, 공성전에서도.
현성은 최고의 결과를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시연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현성의 곁에 있고 싶었다.
“있잖아. 현성.”
시연이 연못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 최상층에서 했던 고백 있지.”
직계파의 성 최상층.
모든 싸움이 마무리된 그 날.
진심을 담아 그에게 건넸던 말.
“그때의 대답. 당장 지금은 안 들려줘도 돼.”
“…….”
“그러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러면서 시연이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들려줄 때까지는, 꼭 내 곁에 있어줘.”
폐허가 된 지하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처럼.
아무 대답도 없이 누군가 떠나버리는 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제야 겨우 그의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대답은 듣는 건 나중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대로 시연이 목걸이를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알겠지. 현성?”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하 가문의 저택 안.
고요한 연못.
둘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시연이 현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 *
그렇게 취임식이 끝나고 이틀 뒤, 하 가문의 창고 앞.
그곳에는 진태와 시연, 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로 진태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 말한 대로 단 한 가지. 창고에서 뭐든 한 가지 원하는 걸 가져가도록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진태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에 공성전에서 수연을 쓰러트림과 동시에 완료한 히든 퀘스트.
그리고 그 보상이란 보는 바와 같았다.
하 가문의 창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하나 가져올 수 있는 기회.
물론 그 과정에서 진태는 계속해서 몇 번씩이나 현성에게 살기를 쏘아댔지만, 그때마다 시연이 그를 저지하였다.
‘뭐 그렇다고 보상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처음에는 원작에 없던 전개에 혹시 보상마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곧 진태가 커다란 문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럼 열겠네.”
그와 함께 그가 문을 민 순간.
진태의 손바닥을 따라 부드럽게 퍼진 푸른 기운이 문을 뒤덮었다.
그리고 잠시 뒤.
-끼기긱…!
마침내 창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시연과 현성이 천천히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억.
그대로 창고 안에 들어온 현성이 주변을 살폈다.
무려 검술명가 하 가문의 창고였다.
그만큼 그 안에는 검부터 온갖 진귀한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당장 벽에 진열되어 있는 수십 자루의 검들이 이를 증명했다.
그 검들은 저마다 보통 검이 아닌 듯, 화려한 장식과 예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무거나 집어도 꽤나 쓸 만할 게다.”
그 말에 현성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입구에서부터 진열된 검만 해도 게임 내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무기들.
실제로 과거 그가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할 당시.
하 가문의 창고에서 습득한 검들은 경매장에 올리는 즉시 당일 최고가를 갱신할 정도로 귀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그도 그럴게 무려 히든 퀘스트의 보상.’
발동조건과 내용이 까다로운 만큼 톡톡히 그 값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진열되어 있는 검을 몇 번 훑어보기만 할 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클래스는 힘의 마법사.
검은 현성의 주무기가 아니었으며, 이미 그에게는 신화등급의 무기.
기사왕 티리카의 건틀렛과 맞춤 제작형 스태프를 가지고 있는 상태.
구태여 검을 쓸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 창고에 들어올 때부터.
현성은 이미 뭘 고를지 정한 상태였다.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나보군.”
그런 현성의 모습에 진태가 말했다.
“허나 걱정하지 말게나. 이곳에는 검 말고도 더 많은 물건들이 있으니.”
그의 말대로 창고에는 비단 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내력을 증진시키는 환약부터 갑옷, 특수한 효과를 지니고 있는 아티팩트와 유물까지.
그대로 진태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쪽으로 안내하지.”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와 함께 그가 구석에 박혀있던 검을 빼들었다.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것도 모자라 겉에 녹이 가득한 검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검도 아니었다.
“……검집?”
현성이 들고 있는 것은 검이 들어있지 않은 검집 뿐이었다.
그대로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결정했습니다.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먼지가 쌓인 낡은 검집.
이것이 바로 현성이 처음부터 노린 물건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