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가주 취임식(4)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진우가 단상 위에 서있는 진태를 바라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취임식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대로 곳곳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가, 가주님?!”
“가주님이 왜 여기에…….”
무려 5년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진 가주였다.
그만큼 병원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충격에 빠진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동시에 진태의 등장은 진우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주자리가 공석인 걸 들먹여가며 시간을 끌려던 계획도, 시연이 가주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핑계도.
그의 등장으로 인해 전부 무산되었다.
하물며 그동안 저질러왔던 행각이 낱낱이 드러나기까지.
-꾸구국!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진우가 부들거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낭패라는 듯 입술을 씹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도 핀치에 몰린 상황인건 틀림이 없었지만, 판도를 뒤집을 방도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우기든, 급하게 자리를 피하든.
어떻게든 방법은 존재했다.
허나 지금 가주가 등장하면서, 자리를 피하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결국에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승률이 극악에 가까웠다.
이에 진우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흑발의 소년.
‘유현성……!’
그러자 진우의 시선을 눈치 챈 현성이 고개를 돌리고는.
그를 향해 들고 있던 잔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치얼스?”
그런 현성의 테이블 위에는 스마트폰이 놓여있었다.
그렇다. 자료에 이어, 가주를 부른 것 역시도 그였다.
그 모습에 진우의 깊은 속에서 뜨거운 화가 치솟았다.
“저, 저…망할 개새끼가……!”
그야말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
당장 할 수만 있다면 저 가증스러운 입 꼬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조소를 짓고 있던 현성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굳었다.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는 차가운 표정.
공성전에서 자신을 처참하게 박살낼 때의 표정이었다.
-움찔!
이에 진우가 주춤거리며 몸을 떨었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공성전에서의 기억.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제기랄……’
육체가 각인된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올게 왔다.
“그래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이냐?”
하 가문의 가주, 진태가 자료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진우가 먼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직계파들이 제 발 저려 말을 꺼냈다.
“오, 오해입니다!”
“맞습니다. 가주님께서 뭔가 잘못알고 계신 게 있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자료에 적힌 모든 내용을 시인하는 꼴.
뭐가 어찌되었든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야 했다.
덕분에 취임식은 어느새 직계파들의 필사적인 변명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그만.”
단호한 진태의 한 마디.
그러면서 그가 줄곧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단숨에 방출시켰다.
그와 함께 진태의 주변을 타고 폭사되듯 퍼지는 중압감.
-쿠구구구.
마치 누군가가 손아귀로 숨통을 조이듯,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쉬어지던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 섞여있는 진한 살기.
물론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수십 년간 하 가문을 이끌며 수백의 전장터를 누비던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 뿐.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그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자들이 속출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이에 그들의 입을 타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삐져나왔다.
“커헉…끅……”
“가, 가주님…크흡!”
“쿠, 쿨럭!”
그리고 그건 진우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힘겹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폐가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5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패기.
“…….”
심지어는 하나 둘씩 쓰러지는 자까지 속출했다.
허나 진태는 끝까지 패기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냉소적인 눈으로, 진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대표로 말해보거라. 사실이냐.”
“커헉, 끄르륵……”
차마 거짓을 고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지금 당장 드는 생각은 오로지 1초라도 빨리 이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것 뿐.
이에 진우가 황급하게 입을 달싹거렸다.
“실…입..니다……!”
허나 목소리가 제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 때마다 폐부 깊은 곳까지 찌르는 살기.
꾸구국, 얼마나 세게 손아귀를 움켜쥔 건지, 그의 손바닥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사실입니다…!”
진우의 입 밖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그를 옥죄고 있던 중압감이 한결 나아졌다.
이에 진우가 참아왔던 숨을 일제히 몰아쉬며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컥! 쿨럭, 쿨럭!”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대로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진우는 자신이 방금 어떤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모든 범죄행각을 스스로 인정했다.
이제는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스윽.
그러자 그곳에는 얼어붙을 듯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심한 것.”
진태가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벌레만도 못한 걸 대하는 싸늘한 말투.
그런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것은 멸시뿐.
-빠드득.
진우의 입을 타고 이빨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대로 그가 진태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저런 고아 년을 차기 가주로 인정할 셈입니까.”
허울 좋은 가식 따위는 집어던졌다.
온전히 그의 진심이 우러러 나온 말.
그런 진우의 말에 진태가 자신의 옆에 있는 시연을 바라보았다.
“…….”
하시연.
폐허가 된 지하철에서 만났던 그 작은 것이 벌써 이렇게 컸다.
처음에는 단순히 검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던 검의 재능을, 그 재능을 키워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근 5년간 꾸준히 자신을 찾아온 건 오직 시연 하나밖에 없었다.
선천강에서의 이야기를, 불의 둥지에서의 이야기를.
공성전에서의 이야기를.
그 모든 걸 들려준 건 가문 내에서 시연이 유일했다.
설령 그것이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속죄라 한다 한들.
그 사실하나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주로서, 아니 아버지로서 이제는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할 차례였다.
“모두 들어라.”
그가 직계파와 방계파를 비롯한 다른 자들을 훑어보며 입을 떼었다.
“지금부터 나 하진태의 이름으로, 하시연을 공식적인 차기 가주로 인정한다.”
지금까지는 가주의 자리가 비어있어, 그 누구도 꺼낼 수 없던 말.
동시에 하 가문에서 오직 그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대로 그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혹 이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가주에 대한 월권(越權)행위로 간주하겠다.”
진우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 자료에 관한 건 추후에 자세히 묻고 처벌하도록 하겠다.”
이어서 진태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 말에 진우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전부 끝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른 직계파들 역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가주가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무슨 짓을 하든 이젠 전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이에 줄곧 그들을 지켜보던 방계파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처억.
그렇게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그들이 일제히 시연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차기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 취임식이 열린 자리.
그들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단상 위에 서있는 시연과 진태.
“가까이 와보거라.”
진태가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가까이 온 순간.
진태가 허리춤에 찬 검을 풀기 시작했다.
-스르륵.
티 없이 하얀 검집.
그런 검 끝에는 붉은 동백꽃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대대로 하 가문의 가주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검, 동백(冬柏)이었다.
“받거라.”
진태가 검을 내밀며 말했다.
이는 곧 그녀가 가주의 자리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증표와도 같았다.
그대로 시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동백을 받아들었다.
“…….”
시연이 동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검 손잡이를 잡고, 하얀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밝은 샹들리에 아래.
동백의 검신이 반짝였다.
그러자 시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검이군요.”
무릎을 꿇은 방계파.
가주의 증표, 동백을 든 시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공식적인 취임식이 끝나고.
남은 사람들은 서로 잔을 맞대며 그녀의 취임식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씬까지 나왔으면 가주 취임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이제 현성은 이대로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주 하진태에게서 이번 공성전 퀘스트의 보상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이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자네가 유현성인가?”
어느새 시연과 단상에서 내려온 진태가 현성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연서가 움찔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
“그래, 연서구나. 간만이구나.”
진태가 그런 연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저 연서를 보러온 건가 싶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현성을 향하고 있었다.
이어서 진태가 현성을 향해 악수를 청하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영광입니다.”
“듣자하니 시연이 많이 신세를 진 모양이야.”
그 말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세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
그런 현성의 대답에 진태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그를 하나하나 눈 여겨 보는 거 같은 미묘한 느낌.
이에 현성이 손을 놓으려 했지만, 왤까.
-꾸욱.
진태는 여전히 현성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꼭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 같았다.
그런 그와 현성 사이로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듣자하니 공성전에서도 많은 일이 있다고 들었네.”
그와 함께 불길한 직감이 현성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눈앞을 타고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캐릭터가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하필 왜 지금 이 메시지가?
분명 취임식은 문제없이 제대로 마무리했고 남은 건 보상을 받는 일 뿐일 텐데.
혹시 다른 변수라도 생긴 걸까.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은 머지않아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만 괜찮겠는가.”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그러자 진태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시연이 자네에게 고백했는가?”
“……예?”
나지막이 내던진 진태의 한마디.
그런 그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방금 전 진우와 직계파들을 억눌렀던 패기, 아니 살기가 서려있었다.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을 따라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캐릭터가 위협을 느낍니다.]
[캐릭터가 위협을 느낍니다.]
[캐릭터가 위협을 느낍니다.]
그 메시지에 현성이 주춤거리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거 X된 거 같은데.’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