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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73화 (173/240)

173화 가주 취임식(3)

그런 진우의 말에 시연이 찬찬히 장내를 훑어보았다.

당장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만해도 한 둘이 아니었다.

거기다 타이밍 좋게 나선 진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애초에 취임식 전부터 계략을 꾸미고 있던 게 확실했다.

이에 시연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우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혹시 고아출신이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건가?”

동시에 연서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그녀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화기애애했다.

그런 진우의 말에 재밌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는 직계파들.

그에 반해 방계파는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에 연서가 주먹을 꾹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처음부터 전부 다……”

힘으로 찍어 누르든, 돈으로 찍어 누르든.

진우를 필두로 한 직계파에서 무슨 손을 써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일부의 방계파가 남아있다는 사실.

“진우 도련님. 말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방계파 중 가장 힘이 강한 세력의 리더가 말했다.

그러자 진우가 피식 웃으며 넉살좋게 대답했다.

“오빠로서 이런 이야기도 못합니까? 그리고 사실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왜? 내 말이 틀렸나?”

진우가 그를 흘깃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에 주변의 직계파들이 이때다 싶어 말을 더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딱히 틀린 말은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고아라는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있습니까? 오히려 방계파라면 고아출신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아가씨를 자랑스럽게 여겨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이 이죽거리며 시연을 돌려 깠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과열되는 분위기 속, 여론은 어느새 ‘시연이 과연 진정으로 가주의 자격을 충족하고 있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공성전에서 이긴 쪽이 가주가 된다고 한들, 현 가주님께서 자리를 비운 지금 같은 시기에는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합니다.”

“동의합니다. 가주란 무릇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 이리 중요한 자리를 너무 급하게 정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리를 비운 가주를 물고 늘어지지 않나, 너무 급하게 정한 게 아니냐고 하지 않나.

허울 좋게 꾸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속뜻은 하나였다.

우리는 시연을 가주로 인정하지 못한다.

애초에 현 가주가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 것도.

그 때문에 빠르게 차기 가주를 정한 것도.

전부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와 직계파들은 가문을 걱정하는 양. 교묘하게 말을 바꿔가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직계파의 수가 많은 이상, 여론은 그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계획대로군.’

진우가 웅성거리는 장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걸로 시연이 가주자리에 오르는 걸 아예 무산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이정도면 충분했다.

현 가주,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없는 지금.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건 직계파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시연이 가주에 오르는 걸 반대하며 시간을 끌기만, 자연스레 취임식은 미루어지기 마련.

그럼 이미 반쯤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인 취임식만 미뤄지면, 가주자리는 여전히 공석.

그 이후에는 직계파의 여론을 이용해 어떻게든 재대결로 끌고 가거나, 서서히 편을 늘리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공성전에서처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의 누나, 수연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수를 써두었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진우와 그의 뜻을 따르는 직계파 뿐.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유현성, 그가 나설 자리를 완벽히 차단시켰다는 점에서 이번 계략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게 저번 공성전에서 가장 큰 변수를 뽑자면 그건 분명 현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성전이 끝난 이후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어디까지 하 가문 내의 문제지. 가문의 외부인인 그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를 증명하듯 자리에 가만히 있는 현성을 보라.

이에 진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단상 위에 오른 시연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꼴이 꽤나 난처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천한 고아 따위가 하 가문의 가주 자리에 오른다는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이제야, 이제야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풀려가고 있었다.

그대로 그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지금 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그런 진우의 모습에 연서가 이를 갈았다.

도저히 이 꼴을 계속 지켜볼 수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연서가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였다.

-터업.

현성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연서를 말렸다.

이에 연서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떨쳐내며 말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자 현성이 자리에 앉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심정인지는 알겠지만 지금은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런 현성의 말에 연서가 화를 내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어?”

“이해는 하는데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라는 거지.”

“……너 설마 지금 공성전 끝났다고 이러는 거야?”

연서가 현성을 향해 물었다.

지금은 공성전이 끝났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한 상태.

만약 여기서 현성이 나선다고 한들,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는 건가.

겨우 그것 때문에?

연서가 그를 째려보았다.

자신의 언니는 그런 현성을 믿고 고백까지 했다.

그런데 고백에 대한 답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나서지도 않는다.

그런 그의 꼴이 마치 언니를 두고 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실망이야.”

연서가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작게 혀를 찼다.

“쯧. 이제야 철 좀 들었나 싶었더니만.”

이에 연서가 미간을 구기며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너 지금 뭐라고……”

그때였다.

현성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까닥였다.

“넌 그렇게 니 언니를 못 믿냐?”

“……뭐?”

“니가 보기에는 시연이 고작 이정도로 흔들릴 사람으로 보이냐고.”

그 말에 연서가 멈칫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단상 위에 있는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

시연은 조용히 그들을 관조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도,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때를 기다리듯,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냥 믿어봐.”

그러면서 현성이 팔짱을 끼며 히죽 웃었다.

“이제 곧 재밌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오른손에는 누군가에게 연락이라도 한 듯 스마트폰이 들려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줄곧 가만히 있던 시연이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짧은 그녀의 한마디.

그와 동시에 웅성거리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직계파 중 하나가 그 사이를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뭘 어떻게 하겠다는……”

[조용.]

그러기 무섭게 시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대로 그녀가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그런 시연의 주위로 중압감이 피어올랐다.

이에 그가 작게 움찔거렸다.

곧 그가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시연이 다시 입을 떼었다.

[여러분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확실히 현 가주가 위독한 이상, 제가 가주에 오른다 한들 하 가문을 지탱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

그 말에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변명을 해도 모자를 마당에 이렇게 순순히 인정을 한다니.

뭔가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는 걸까.

[그리고 무릇 커다란 나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부터 튼튼해야하는 법.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기서 썩은 뿌리를 잘라내려 합니다.]

그와 함께 시연이 직계파의 한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연설이 끝나기 직전, 처음으로 말을 꺼내 여론을 만들려한 녀석이었다.

그대로 시연이 말했다.

[이하철. 하 가문의 직위를 내새워 4개의 길드를 대상으로 15차례 이상의 금품을 포함한 아티팩트 갈취.]

“……예?”

그 말에 그가 움찔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연이 다른 직계파의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백사. 전 헌터재정부 장관과 강남의 00나이트에서 수차례의 성상납과 성매매 알선 사례 확인.]

[김진혁. 고의로 일부 지역에 마력석을 포함한 강한 마력을 띈 아티팩트를 뿌려 주위의 마수를 모여들게 한 뒤, 마수토벌을 핑계로 정당하지 아니한 이득을 취함.]

[이태현. 하 가문 내의 정보를 빼돌려 친인척을 포함한 일부 부동산업자들과 투기를 하여 근 2년간 던전 주변의 시세를 조작함.]

금품 및 아티팩트 갈취.

성상납과 성매매 알선.

던전 시세 조작.

전부 중범죄에 해당하는 굵직한 범죄행각이었다.

그 이후로도 시연은 계속해서 직계파의 이름과 그 범죄행위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직계파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불리고 나서야 시연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름을 불린 직계파의 사람들이 분기탱천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무리 아가씨라 해도 감히 이런 허위소문을 뿌리는 건 용서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가주님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워낙 수십 명이 일제히 소리치느라 그 내용을 전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은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말하느냐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다.

이에 시연이 그녀의 품에서 자료를 꺼내들었다.

-처억.

그건 다름 아닌 취임식이 시작하기 전.

현성이 그녀에게 건네준 자료였다.

그대로 시연이 고개를 까닥이자, 그녀의 비서를 비롯한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카피본을 배부하기 시작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시죠. 애초에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시연이 뒷말에 힘을 주어 말하며,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이에 그가 움찔거리며 재빨리 건넨 카피본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걸……’

그도 그럴게 그 자료는 전부 진우의 서재 뒤쪽에 마련된 비밀장소에 있던 것.

혹시나 직계파의 녀석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모아둔 약점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지금 시연의 손에 있는 것인가.

[왜 그러시죠. 혹시 오라버니께서도 아시는 자료입니까?]

시연이 진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물론 지금껏 그가 해온 모든 범죄행각 역시도 기록되어있었다.

다른 가문의 녀석들을 폭행해온 것부터 횡령, 사기, 심지어는 현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암살의뢰까지.

-덜덜.

자료를 들고 있는 진우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이에 저 멀리.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현성이 조소를 지었다.

<이스페리아>의 전개에 따르면, 공성전이 시연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연을 방해한다.

바로 지금처럼.

덕분에 에피소드는 길어지며, 이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꽤나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공성전까지 이겼는데 이제는 하 가문의 여론을 뒤집어야하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성은 오히려 한 발 먼저 나서 선제공격을 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진우를 포함한 직계파의 모든 비리자료.’

진우의 비밀장소에 있는 숨겨져 있던 자료이자, 전에 현성이 수연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수연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모든 자료를 빼오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마스터 암살자다운 실력.

실제로 원작에서도 핀치에 몰린 주인공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이 자료를 얻어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현성은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아예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자료를 입수한 뒤.

아예 해당 에피소드를 통째로 스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보낸 그대로.

판이 완전히 뒤집혔다.

-으드득!

“이런 망할……!”

곧바로 진우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시연은 일부러 그의 범죄행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물러나라는 일종의 경고.

이에 주변의 직계파가 흘깃 진우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결정을 내려야했다.

“…….”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진우가 분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물러나야 했다.

‘허나 괜찮다. 아직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건 그대로. 이 이후에 다시 기회를 노리면 충분하다…!’

어차피 현 가주가 없는 건 매한가지지 않는가.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당장에라도 전부 찢어죽이고 싶었지만, 진우가 애써 분노를 씹어삼키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니 다음을 기약하려는 찰나였다.

“……지금 이게 전부 다 사실인가.”

단상 위를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진우가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보다는 그 기력은 쇠하였으나, 진우가 그 목소리를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시 한 번 묻겠다.”

검술명가 하 가문의 가주이자,

그의 아버지.

하진태였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 다 사실이냐.”

취임식이 이루어지는 단상 위.

진태가 노기(怒氣) 가득한 눈으로 진우와 직계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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