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가주 취임식(2)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시연은 병원에서 돌아와 취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태의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워낙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아직은 몸이 쇠약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확한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남기로 했다.
추가적으로 그가 깨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포함하여 하 가문 내에서도 극히 일부뿐.
그리고 시연은 취임식이 예정되어있는 탓에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어, 급한 대로 그들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돌아왔다.
아무튼 이제 취임식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
그에 따라 취임식이 열리는 장소에는 벌써부터 하 가문의 직계파는 물론이며, 방계파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시연은 따로 마련된 방에서 연설문을 포함한 대본을 확인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후우…….”
그런 그녀가 쥐고 있는 대본은 그 전에 얼마나 확인해본건지 잔뜩 헤져있었다.
취임식 날짜가 결정된 이후로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여전히 긴장되는 모양인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물론 연설 정도야 아카데미에서 회장직을 하며 해본 경험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무려 하 가문의 가주 취임식이었다.
그 무게가 남다른 건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시연이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하 가문의 사람 혹은 그녀의 비서가 온 것일까.
이에 시연이 들고 있던 대본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들어와.”
그러나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대로 시연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성?”
그는 다름 아닌 현성.
예기치 못한 그의 등장에 시연이 움찔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
현성의 말에 시연이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괜찮아.”
곧 현성이 자리에 앉고.
시연이 쭈뼛거리며 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차마 뭐라 말 할 수 없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
만약 평소였다면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달랐다.
당장에라도 숨통이 막힐 것만 같은 분위기.
이에 시연이 흘깃 현성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공성전이 끝난 직후.
시연이 당차게 현성을 향해 내던진 고백 때문이었다.
‘무, 무슨 말을 꺼내야하지?’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공성전에서 이겨서 그랬던 건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고백을 내뱉었지만, 그 후폭풍은 보다시피 참혹했다.
게다가 고백 이후로 현성의 대답은 듣지도 못한 상태.
덕분에 현재 시연은 점점 패닉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거절하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면…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돼! 절대 안 돼!’
순간 시연이 자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붕붕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기왕 고백까지 했는데, 거절은 무슨.
역시 무조건 성공하는 게 좋았다.
‘하여튼 뭐가 됐든 대답을 듣고 싶긴 한데…….’
문제는 대놓고 그때의 대답을 들려달라고 할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얼굴은 대책 없이 붉게 물들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만약 연서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떻게는 이 핑크빛 분위기를 박살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을 터.
허나 지금은 현성과 시연 단 둘이 있는 상태.
둘 중 누구 하나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서는 쉽사리 이 분위기가 깨질 리가 없었다.
이에 1시간 같이 느껴지던 30초가 지났을까.
“저기 현성…….”
마침내 시연이 뭔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씩씩하게 현성을 향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여긴 무슨 일로 왔어?”
단순한 물음이 전부였다.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틀렸다! 도저히 먼저 물어보지 못하겠어!
기껏해야 그때의 대답을 들려달라는 그 한마디를 못 꺼내서 이러고 있는 꼴이란.
시연이 연신 밖으로 들릴 리 없는 침묵의 비명을 내질렀다.
이에 현성이 대답했다.
“아, 별건 아니고 취임식 시작하기 전에 잠시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흠칫!
그런 현성의 말과 동시에 시연의 몸이 크게 동요했다.
공성전에서 고백을 던진 마당에 전해줄게 있다니.
그렇다면 추측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지 않는가.
‘설마……’
그와 함께 그녀의 머릿속을 타고 지금껏 봐온 영화와 소설의 로맨스씬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그대로 시연이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우, 우선 침착하자. 어차피 겉으로는 전혀 티 나지 않을 거야.’
어느새 붉게 물든 볼.
세차게 떨리는 동공.
꼭 포개놓은 두 손.
그런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시연이 스스로 이를 눈치 채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즉 현재 시연은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전해주고 싶은 거라니. 그게 뭘까.”
시연이 잔뜩 경직된 채 말했다.
허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녀는 지금 완벽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
덕분에 현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시연이 여간 귀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 말이지.”
현성이 품속에 자료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이거 어쩌면 많이 실망할지도 모르겠네.’
그대로 그가 품속에 있던 자료뭉치를 내려놓았다.
이에 시연이 멍하니 현성이 내려놓은 자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아.”
시연의 작은 단발마가 울려 퍼졌다.
그 사이 그녀의 허망함과 실망감이 새어나왔던 건 비단 현성의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 모습에 현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연아?”
그와 함께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알레시아가 작은 앞발로 현성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에잉, 쯧쯔…보아하니 많이 실망한 모양인데 이제 어쩔게냐. 현성.]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시연이 뒤늦게 퍼뜩 정신이 든 모양인지.
세차게 고개를 저은 것도 모자라, 손사래까지 치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리일까? 실망했다니, 내가 실망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럴까? 아냐. 나 전혀 실망하지 않았어.”
이어서 시연이 현성이 준 서류뭉치를 한 움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야야! 뭔가 했더니 종이구나! 그래, 종이는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지. 암 그렇고말고.”
이에 알레시아가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연아……]
그런 시연의 모습에 현성 역시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시, 시연아 취임식 올라가기 전에 그건 꼭 챙기고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알겠지?”
“당연하지. 종이는 소중한 자원이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현성이 난처한 듯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끝을 흐렸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나중에 전해주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판단한 현성이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시연아. 이거.”
그대로 현성이 시연에게 작은 선물상자를 건넸다.
그와 동시에 시연이 순간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제자리에 뚝 정지했다.
그리고 곧 그녀가 선물상자와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이건……”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가주 취임식 선물. 원래는 가주 취임식이 끝나고 전해주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잠시 놀란 듯,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현성.”
이제야 그가 알고 있는 평소의 시연으로 돌아왔다.
이에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열어봐. 그리고 그 자료.”
현성이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가리켰다.
“취임식 전에 확인해보는 거 잊지 말고.”
-똑똑.
그와 함께 방문을 타고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연님, 가주 취임식까지 30분 남았습니다.”
그녀의 직속 비서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시계를 확인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걸로 전해줄 건 다 전해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러면서 현성이 시연을 향해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 봐.”
“응. 이따 봐. 현성.”
짧은 인사를 끝으로 현성이 방을 나섰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시연 혼자 남은 방.
그녀가 현성이 주고 간 선물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스윽.
시연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선물상자를 풀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검은 고양이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장식이 저번 연회에서 썼던 목걸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때였다.
-투욱.
바닥에 메모지하나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선물상자 안에 목걸이와 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대로 시연이 메모지를 주웠다.
“…….”
곰돌이가 그려진 노란 메모지.
그리고 그 위에 적힌 짧은 글씨.
[고마워.]
그건 과거 시연이 처음 현성과 만났던 그 날.
병원에서 그가 남기고 간 메모지에 적혀있던 말과 똑같았다.
이에 시연이 싱긋 웃으며 자신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검은 장식이 그녀의 검은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시연이 현성이 건네준 또 다른 물건.
중요한 자원, 아니 자료를 살펴보았다.
‘……분명 취임식 전에 읽어보라 했었지?’
그와 함께 시연이 자료를 읽은 그 순간.
그녀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다.
“이건……”
허나 그것도 잠시.
현성이 건넨 자료를 훑어본 시연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취임식 전에 그가 이런 자료를 줬다면, 그 목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마워.”
고요한 방 안.
시연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서류를 품에 챙기며 마지막으로 연설 대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시연의 가주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이에 하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
-처억.
시연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길게 내려온 흑발과 차분한 두 눈동자.
그 주위로 느껴지는 차갑고도 고고한 분위기.
하 가문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연의 모습 그 자체였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목에는 목걸이 하나가 걸려있었다.
방금 전 현성이 전해준 목걸이였다.
“…….”
그리고 저 멀리.
시연이 연서와 현성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그러자 연서가 그런 그녀를 향해 힘내라는 듯 주먹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연서는 공성전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몰라볼 정도로 솔직해졌다.
드디어 표현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시연이 그 옆에 있는 현성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왠지 그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작게 웃자, 시연 역시 싱긋 웃으며 마이크 앞에 섰다.
[하 가문의 차기 가주. 하시연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시연이 본격적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 자체는 역시나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애초에 대본의 숙지는 진즉에 끝냈고, 기본적인 화술 자체도 밀리지 않았다.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강하게.
시연은 완벽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성전에서 시연이 승리한 이상.
연설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덕분에 아무런 문제없이 연설이 끝났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시연이 하 가문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끝마치려는 찰나였다.
“전 인정 못하겠습니다.”
돌연 취임식 한 가운데서 누군가 손을 들고 말했다.
직계파로 추정되는 세력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러기 무섭게 곳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역시 인정 못합니다.”
“동의합니다.”
마치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시연이 가주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그와 함께 익숙한 얼굴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이 정도로 반대세력이 많을 줄은 몰랐군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남성.
그건 다름 아닌 하 가문의 둘째 하진우였다.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향했다.
이에 진우가 히죽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취임식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기 가주님?”
진우가 저 멀리 단상 위.
하시연을 향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