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가주 취임식(1)
공성전이 마무리되고 3일이 지난 지금.
하 가문은 새로운 가주의 취임을 두고 내외적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써야할 것은 다름 아닌 취임식.
덕분에 요즘 시연은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그리고 앞으로 6시간 뒤.
하 가문의 가주 취임식이 열릴 장소.
-홀짝.
그곳에서 현성이 여유롭게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저 멀리 서있던 연서가 그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친히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오늘 있을 취임식에 대비해 온갖 매뉴얼이 적힌 패드가 들려있었다.
“…….”
그대로 연서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현성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 취임식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
당장 오늘도 몇 번 씩이나 동선과 시간을 확인하느라 편히 앉아있지도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현성은 뻔뻔하게도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줄곧 자리에 앉아있는 게 전부.
이에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있을 거야?”
그 말에 현성이 연서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
이어서 그가 연서를 향해 들고 있던 찻잔을 까딱이며 싱긋 웃었다.
“……차 향이 참 좋군.”
뻔뻔한 현성의 한마디.
그와 동시에 연서는 순간 들고 있는 패드로 그의 정수리를 찍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이를 증명하듯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
허나 오늘은 무려 친애하는 자신의 언니. 시연의 가주 취임식.
혹여나 바닥이나 식탁보에 피가 튀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로 연서가 애써 충동을 억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늘은 내가 참는……”
그러자 현성이 연서의 말을 자르며 차를 가리켰다.
“야. 이거 나 갈 때 몇 개 좀 챙겨줘라. 마음에 드네.”
“…….”
그 말에 뚝. 하고 간신히 참아오던 연서의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곧바로 그녀의 입을 타고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오더니.
-쉬익!
연서의 손에 들고 있던 패드가 쏜살같이 현성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녀의 패드가 그에게 닿기 직전.
-터업.
현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날아오는 패드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는.
그가 연서를 향해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느려.”
“이이잇…!”
이에 연서가 분노에 가득 차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그녀가 손에 힘을 빼고 현성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니는 어쩌자고 이런 놈을……”
연서가 현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흑발에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
무엇보다 묘하게 올라간 입 꼬리.
얼핏 보면 수려한 외모 그 자체였지만, 그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꼴 받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장 방금 전도 그랬지 않는가.
그대로 연서가 불과 3일전, 공성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붙잡았다.
“으으으윽……”
그러니까 직계파의 성 최상층에서 현성과 시연이 수연을 쓰러트린 그 순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 둘의 검은 그동안 연서가 봤던 그 어떤 검보다도 아름답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은 어떠했는가.
발코니에 서서 현성의 손을 잡은 채, 성 아래의 모든 병사들에게 가문의 증표를 보여준 시연의 모습은 고고하기 그지없었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병사들의 환호가 이를 증명하였다.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딱 한 가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고통스럽고,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언니의 고백……!’
-빠드득.
연서가 이를 갈며 손아귀를 부여잡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흑발의 소년과 소녀.
그 뒤로 보이는 금색의 드래곤.
그러니까 시연이 현성의 손을 잡고 화사한 미소와 함께 회심의 고백을 날린 그 당시.
당연한 소리지만, 그 자리에는 연서도 있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1등석에서 두 눈으로 직접,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관람하였다.
‘그전까지는 둘 사이에 끼어들기도 애매해서 조용히 빠져 있으려 했건만……’
현성 저 불 여우같은 놈이 그 틈에 언니를 꼬여냈다.
물론 고백을 한 건 시연이었지만, 충격적인 그 날의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한 연서에게 있어 그런 자잘한 인과관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중요한 건 단지 현성이 손아귀에 언니가 붙들려있다는 것.
이에 연서의 그 날 이후로 발작을 일으키듯, 자다가도 이불을 박차고 비명을 내지르고는 했다.
‘감히 내 언니를 빼앗아가다니(?).’
연서가 질투심어린 눈빛으로 현성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할 말 있냐?”
그러자 연서가 작게 혀를 쯧 차고는 대답했다.
“죽어.”
“오냐, 넌 꼭 무병장생해라.”
현성이 그녀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며 진심어린 축복을 던졌다.
‘하여간 공성전 이후로 나만 보면 저 지랄이야. 거 성질머리 하나 더럽기는……쯧.’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시연은?”
그 말에 연서가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래서 몰라?”
“아니. 아는데.”
“…….”
뻔뻔한 연서의 대답에 현성이 미간을 구겼다.
저, 저 알면서도 삐딱하게 나오는 꼴 좀 봐라.
하지만 그도 잠시.
“병원에 갔어.”
연서가 짧게 대답했다.
그와 함께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 취임을 앞두고 병원에 갔다면, 그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바로 하진태를 보기 위해.
“넌 같이 안 갔어?”
“……됐어. 어차피 내 말 듣지도 못할 텐데.”
연서가 싸늘하게 패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진태, 현재 하 가문의 가주이자, 그녀의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일어난 지 못한지도 어연 5년이 다되어갔다.
처음에는 가문의 그 누구도 진태가 이렇게 오랫동안 가주의 자리를 비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기껏해야 1년 안에 훌훌 털고 일어나겠지.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고.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꾸준히 병실을 찾아가는 사람은 오직 시연 그녀 하나뿐이었다.
“괜히 가서 나까지 울적해질 바에는 안가는 게 나아. 어차피 내가 간다고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 오늘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
“……뭐?”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래서.”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은 시연이 가주 취임식을 가지는 날.
동시에 하진태, 그가 5년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뜨는 날이었다.
* * * * *
태철이 누워있는 병실.
그곳에는 여전히 회색 머리칼의 남성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팔에 달려있는 관과 입에 달려있는 호흡기.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이에 시연이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 왔어요.”
그리고 천천히 태철의 손을 잡았다.
양손 가득 자리 잡은 딱딱한 굳은 살.
그와 함께 시연이 언제나 그렇듯.
“저번에 가문승계를 두고 공성전이 열렸다고 한 거. 기억하시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공성전이 시작하고 현성이 확성기를 들고 선전포고를 날린 것부터.
마침내 최상층에서 수연을 꺾은 거까지.
물론 그동안 태철이 눈을 뜨는 일은 없었지만, 시연은 항상 그에게 들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버릇처럼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를 하는 게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습관만은 모든 걸 끊어낸 지금도 여전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바로 이야기를 건네는 시연의 표정.
항상 경직되어 있었으며, 어딘가 미안해보이던 얼굴과는 달리.
시연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말하는 중간 중간에 작게 웃기까지.
만약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꽤나 놀랄 모습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좀 길었죠?”
공성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끝마친 시연이 태철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 한참동안 병실을 타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혹시 기억나세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 아버지께서 물어보셨잖아요.”
그런 그녀의 눈앞에는 어느새 젊은 날의 태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시연이 진태의 손에 의해 구해지고, 본격적으로 검의 재능이 개화할 때였을 것이다.
그대로 그녀가 그 날의 기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넌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느냐.”
진태가 시연을 향해 물었다.
그 말에 그때의 그녀는 한참동안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않다가.
마침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 이유는?”
“더 이상 누군가를 잃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에서 부모님을 잃었던 날.
시연은 다시는 그 날의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리자드맨을 죽이고, 하 가문에 들어와 검을 쥔 날 이후로.
매일 밤 시연은 몇 번이고 후회하고, 또 자책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 더 강했다면, 조금 더 일찍 검을 잡았다면 부모님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를 잃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부모님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는 세계.
시연은 그런 세상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세상이 오면 자신도 더 이상 누군가를 잃는 아픔도 겪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나를, 하 가문을 따르거라.”
그런 시연의 대답에 진태가 말했다.
“내가 그리 만들어 줄 테니.”
“…….”
그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진태를 위해, 하 가문을 위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시연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소중한 사람이란 범주 안에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허나 이번 공성전에서 현성을 통해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는 세계.
그 범주 안에는 자신을 잃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지금.
“더 이상 누구도 잃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제 자신도요.”
만약 여기서 시연이 죽는다면, 과거 그녀가 그랬듯.
슬퍼할 사람들이 생겼다.
연서가 그랬으며, 현성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시연은 스스로도 자신을 잃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와서는 절대 죽을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왜냐하면……”
그대로 시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그의 이름은 유현성.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연은 더욱더 강해져야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진태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언젠가, 꼭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
“아직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시연이 조용히 눈을 감은 진태를 내려다보았다.
짐을 덜어낸 지금도, 그녀에게 있어 진태는 여전히 아버지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이에 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시연이 진태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손을 놓고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꼬옥.
진태가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움직이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시연이 재빨리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아버지?”
그리고 시연이 진태를 부른 그 순간.
병상에 누워있던 회색머리칼의 남성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대로 그가 시연을 향해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시연아.”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