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공성전(14)
-스으으.
그대로 시연이 좌에서 우로.
검을 휘둘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검격.
화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 단 한번 검을 휘둘렀을 뿐.
애초에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당연한 공격이었다.
허나 그때였다.
-피잇!
시연의 검 끝을 따라 허공에 그려지는 푸른 선.
그대로 선이 흩어짐과 동시에.
뚝.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귀곡성이 단숨에 사라졌다.
마치 공간 자체를 베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일순간 고요해진 주변.
그곳에 흐르는 건 오직 고요한 정적이 전부였다.
그리고 잠시 뒤.
-쿠르르릉!!
사방에 있던 대리석 기둥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그런 대리석 기둥의 단면은 마치 예리한 검으로 잘려나간 듯 했다.
다 쓰러져가는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위력.
그와 동시에 수연의 눈앞을 타고 붉은 피가 꽃잎처럼 튀어 올랐다.
-촤아악!
“……쿨럭.”
수연은 처음에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지조차 못했다.
그러나 곧 그게 자신의 피라는 걸 깨달은 찰나.
수연이 검은 피를 왈칵 토해내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 검은 분명……”
수연이 시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허공에 그어진 푸른 선.
마치 공간에 잘린 것 같은 섬뜩함.
수연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리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시연의 검.
그 검은 바로 하 가문의 초대 가주만이 썼다고 알려지는 유일한 검.
극의 : 절(絶)이었기 때문이다.
-철컥.
시연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보여줄 건 다 끝났어?”
그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피를 토하는 수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 * * *
‘……됐다.’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다행히 알레시아가 제대로 말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그대로 그가 눈앞의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스페리아>의 주연급 등장인물 하시연.
그녀는 튜토리얼에서 하린을 살리는 히든 루트를 제외할 경우.
플레이어가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히로인이었다.
그리고 그 설정은 검술명가 하 가문의 자식.
허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숨겨진 설정이 하나 둘 씩 드러난다.
사실 그녀는 여타 하 가문의 인물들처럼 가주가 낳은 자식이 아닌, 고아 출신.
시연을 구해준 것은 분명 하 가문이 맞았지만, 동시에 그녀는 하 가문이라는 이름아래 속박된 존재나 다름없었다.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새, 하 가문의 검 그 자체인 도구와도 같은 신세.
하진태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하 가문을 위해.
시연의 인생은 오로지 하 가문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런 입장에서 가문 승계전은 시연이라는 캐릭터의 시련이나 다름없었다.
하 가문을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그녀가 하 가문에게 검을 들이밀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시연은 점차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하진태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 하 가문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모든 속박을 끊어낸다.
절(絶)이란 그런 의미였다.
비로소 모든 걸 끊어내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
이로써 시연은 완전한 성장을 맞이하며, 검의 극의를 깨우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스륵.
시연이 천천히 검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공성전은 끝나지 않았다.
“가문의 극의라…놀랍구나.”
수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눈은 이제껏 본적 없을 정도로 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로 수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과하지. 이런 걸 숨기고 있는 줄 몰랐다.”
“…….”
“그나저나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초대 가주의 극의가 내가 아닌 출신도 모르는 고아의 손에서 펼쳐지다니.”
그녀의 발밑이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수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는 점점 강해졌다.
그와 함께 그녀가 검을 치켜들었다.
-처억.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의 피가 30%남았습니다.]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이 광폭화 상태에 돌입합니다.]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이 ‘용오름 연격’을 준비합니다.]
전에 말했듯이 하수연은 망나니 기사 데일런트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그녀의 필살기 용오름과 데일런트의 창이 그랬으며.
광폭화에 따라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마저도 똑같았다.
“현성. 내가 마무리 할게.”
그때. 수연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하 가문의 승계 : 하수연에게 승리하라.]
퀘스트 내용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쓰러트리시오. (진행 중)
달라진 것 없는 퀘스트 창.
허나 하시연이 각성한 이상.
그 이후는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본 에피소드의 주연은 하시연인만큼.
어차피 수연의 용오름은 대부분 시연의 극의 : 절에 정리될 터.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그녀의 옆에서 공격 몇 번만 넣으면 퀘스트는 성공적으로 완료할 수 있었다.
‘요컨대 옆에서 짤딜만 뿌리면 된다는 거지.’
이에 플레이어는 시연이 마무리 한다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 끝까지 같이 가자.”
“…….”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작게 움찔거렸다.
허나 그도 잠시.
시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기존의 퀘스트 창과는 다른 금색의 퀘스트 창.
[히든 퀘스트 : 하수연을 쓰러트려라!]
퀘스트 내용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시연과 같이 쓰러트리시오.(진행 중)
발생조건 : 하시연의 제안을 거부.
데일런트 때와 비슷한 전개.
그렇다. 본 퀘스트는 데일런트 때와 비슷하게 전개되는 만큼.
분기점에 따라 히든 퀘스트가 발동하는 것마저도 같았다.
“하 가문의 극의와 내 검. 과연 어느 쪽이 더 뛰어날까.”
그대로 수연이 검을 고쳐 잡았다.
-스으으.
그런 그녀의 검 끝을 따라 심상치 않은 기류가 모여들었다.
그 모습에 시연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현성, 준비됐어?”
“물론이지.”
현성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수연의 외침과 동시에 그녀가 검을 올려 베었다.
그와 함께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듯.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지며 용오름이 생성되었다.
허나 처음 용오름 썼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멈추지 않는 수연의 검.
-콰가가각…!
그에 따라 연달아 생성되는 여러 개의 용오름.
그런 용오름들은 점차 한 데 모여들어 최상층을 가득 채우기에 이르렀다.
-쿠오오오오오!!
마치 여러 마리의 용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것 같은 모습.
이에 시연과 현성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 둘이 같은 타이밍에 무기를 들었다.
곧 다시금 현성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반격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그리고 현성이 Y를 누른 순간.
그에 맞춰 시연이 극의 : 절을 펼쳤다.
그대로 허공에 그려지는 2개의 유려한 선.
-피잇!
하나는 시연의 극의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현성의 반격기였다.
그 모습에 시연이 작게 웃었다.
그동안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던 선천강에서의 현성의 검로.
허나 그 말이 무색할 만큼.
시연의 검로는 현성과 자연스럽게 섞여 유려하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옆에 설 수 있게 됐어.”
그렇게 시연과 현성, 두 개의 선이 맞닿았다.
그때였다.
현성의 귓가에 들려오는 경쾌한 알림음.
-띠링.
이에 현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방금 전 그가 히든 퀘스트를 발동시킨 이유로는 우선 보상이 있었다.
히든 퀘스트는 발동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좋은 보상이 뒤따라오니까.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현성이 노린 두 번째.
[두 개의 스킬이 합쳐집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합동기 : 창천(蒼天)]
그건 다름 아닌 합동기였다.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스킬이자, 특수한 상황에 생성되는 시스템.
그에 따라 과거 정령의 신전에서 현성과 레이첼이 같이 썼던 빙혈에 이어, 두 번째 합동기 창천이 발동하였다.
-스팟!
그대로 둘의 검이 하나로 합쳐져 하늘을 가르고.
용오름 연격과 창천이 맞부딪친 그 순간.
성의 천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밝은 빛이 폭사되었다.
-콰아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빛이 사그라 들고.
시연과 현성이 각자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
창천은 이미 용오름은 물론이며.
위를 가리고 있던 천장까지 전부 날려버렸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그저 구름한 점 없이 티 없는 맑은 푸른 하늘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말 그대로 완벽한 소멸(掃滅).
이것이 바로 하늘아래 존재하는 모든 걸 베어버리는 둘의 합동기 창천이었다.
승천하는 용조차도 그들의 검 끝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챙강!
수연의 검이 두 동강나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털썩.
그녀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결국, 나의 패배로군……”
수연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검을 다시 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강자와의 싸움이었다.
그 끝은 언제나 차갑게 식어가는 불씨뿐이었으나, 오늘만은 뭔가 달랐다.
그동안 무슨 짓을 해도 충족되지 않았던 자극과 갈증이 날아간 듯.
후련한 느낌이 수연의 몸을 감싸 안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대로 따스한 햇살이 그녀를 비추어 내렸다.
이에 수연이 품속에서 금색 펜던트를 꺼내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가문의 증표.
그녀가 시연과 현성을 향해 증표를 건네며 말했다.
“받아라.”
그런 수연의 대사와 함께 메시지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쓰러트렸습니다.]
[히든 퀘스트 : 하수연을 쓰러트려라!]
퀘스트 내용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같이 쓰러트리시오.(완료)
발생조건 : 하시연의 제안을 거부.
그대로 시연과 현성이 수연의 가문의 증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 내밀어봐.”
그 말에 시연이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고.
현성이 그런 그녀의 손 위에 또 다른 금색 펜던트를 쥐어주었다.
기존이 방계파가 가지고 있는 증표였다.
동시에 이걸로 모든 가문의 증표가 모였다.
“……끝났네.”
시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에 현성이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밖은 남은 직계파의 병력과 방계파의 병력이 한데 모여 있었다.
[…….]
직계파 방계파 나눌 것 없이,
그런 그들의 시선은 전부 성 최상층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시연의 손을 이끌고, 발코니로 향했다.
그 아래로 드넓은 평원과 한데 모여 있는 직계파와 방계파가 한 눈에 보였다.
그러자 현성이 시연의 손을 잡고는.
-처억.
모두에게 보이도록 손을 높이 들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반짝이는 가문의 증표.
그리고 방계파들이 시연의 손에 들려있는 증표를 확인하기 무섭게.
[와아아아아아!!]
아래를 타고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공성전의 승리를 알리는 환호였다.
이에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해.”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응.”
그렇게 성 최상층.
흑발의 소년과 소녀.
그리고 금색의 드래곤이 자리한 그곳은 한참동안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있지. 현성.”
그런 함성 속.
시연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덕분에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거 같아. 그래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래?”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고 싶은 말?”
그러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현성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 아주 많이.”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시연이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