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공성전(13)
-콰아아아아!
그대로 용오름이 갈라지며 거센 바람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 충격에 수연이 황급히 들고 있는 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이 저 멀리 밀려났다.
-스으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최상층.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고.
거의 벽 끝까지 밀려난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바닥을 타고 긴 검흔이 그어져있었다.
무엇보다 그 끝에 서있는 현성.
그 모습에 수연이 자신의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쿵쿵!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덜덜대는 손 끝.
처음이었다.
자신의 검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반격해온 자는 현성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온 몸의 떨림은 쉽사리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방금 전 풍경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갈라지는 용오름, 그 사이 반짝이는 현성의 검 끝.
그야말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만큼 현성의 검로(劍路)는 아름답고, 치명적이었다.
-뚝뚝.
어느새 그런 수연의 팔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성이 용오름을 반격한 이후.
폭발적으로 퍼진 바람에 베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왤까.
피를 흘리는 지금 순간마저도, 그녀의 심장고동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
염원하던 강자와 싸움을 할 수 있어서?
아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단발적인 흥분과 쾌락을 넘어선 순수한 설레임.
이에 수연이 고통을 씹어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그대로 수연이 현성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네가 좋아지려 한다. 아니, 이미 주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와 함께 수연이 비틀거리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한 번 그녀와 현성이 맞부딪쳤다.
-채앵!
* * * * *
한편 알레시아의 날개 아래.
현성을 중심으로 퍼져 나온 바람이 시연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그녀는 줄곧 알레시아의 힐링을 받은 끝에, 이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직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러니 지금은 현성에게 맡기고 좀 더 쉬도록 해라.]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몸을 움직이는 게 전부인정도.
알레시아가 그녀를 걱정하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허나 그녀는 애써 괜찮다고 대답하며 저 멀리 서있는 현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의 검은 분명 선천강에서 보여줬던 그때의 검과 똑같았다.
도저히 따라할래야 따라할 수 없었던 검.
그건 당장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쉬지 않고 수연과의 전투를 계속 이어가는 현성.
그 모습에 시연이 자신의 검 끝에 달린 고양이 네로 장식을 작게 움켜쥐었다.
“……한심해.”
시연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그를 따라할 수 없었다.
현성처럼 전략을 짜는 것도, 현성처럼 싸우는 것도, 현성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계파를 이끄는 리더 주제에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나.
연서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연에게 덤볐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
그 이후로는 현성에게 구해지고, 그에게 모든 걸 떠넘긴 꼴이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시연은 그런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넌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문제다.]
알레시아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시연이 멈칫거리며 되물었다.
“……네?”
이에 알레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현성이 네게 전해주라고 했던 말이다.]
“그게 무슨……”
그대로 알레시아가 저 멀리 수연과 싸우고 있는 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현성이 어떻게 항상 전력을 다 할 수 있는지 아느냐?]
그 말에 시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천천히, 그녀의 날개로 시연을 감싸며 말했다.
[그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이란다. 현성이 너를 돕겠다 한 것도, 지금 저렇게 싸우는 것도, 모든 건 현성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그대로 알레시아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자, 그럼 넌 어떤 것 같으냐.]
알레시아의 물음에 시연이 움찔거렸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냐니.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거야 물론……”
허나 곧바로 대답하려는 찰나.
돌연 뭔가가 목구멍을 턱 막은 것처럼.
대답이 그저 입안을 맴돌 뿐,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폐허가 된 지하철.
그곳에서 하진태에게 구해진 뒤.
시연은 줄곧 하 가문을 위해 검을 휘둘러왔다.
그게 바로 그녀를 구해준 은인을 위한 일이었으며.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과정에서 시연 본인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응당 해야만 하는 일.
지금껏 시연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가문의 승계를 둔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하 가문을 위한다면.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이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도 그럴게 외부에서 온 고아 주제에 하 가문의 승계를 바라는 건,
그건 너무나도 주제넘은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멈추지 않았다.
[주먹 끝에 의지가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주먹에 불과하다. 오래 전, 나의 친우가 했던 말이다.]
“……친우요?”
[그래, 참으로 순수하고, 또 강한 자였지.]
알레시아가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듯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허나 그도 잠시.
그녀가 다시 시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의 검 끝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느냐?]
이에 시연이 고양이 네로 장식을 움켜쥔 채.
자신의 검 끝을 바라보았다.
하 가문을 위해?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항상 그녀의 검은 타인에 따라 휘둘러졌을 뿐, 그 안에 정작 시연 그녀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겠어요.”
시연이 작게 대답했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싱긋 웃으며 입을 떼었다.
[검 끝에 아무런 의지가 없다면, 검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단다. 그건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지 않느냐.]
-멈칫.
그 말에 시연이 주춤거렸다.
알레시아의 말대로 언제부턴가 그녀의 검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언제나 자격의 고민이었다.
고아인 내가 하 가문에 남을 자격이 있는지.
가주의 자리를 탐할 자격이 있는지.
그렇다면 처음 검을 잡았을 때는?
그때는 그저 새로운 검식을 펼치는 게, 검 끝에 빛이 반짝이는 게, 자신의 손끝을 따라 검이 움직이는 게 좋았다.
동시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대로 알레시아가 그녀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검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너의 검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뭐라 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네 잘난 가문의 사람들이라도 말이다.]
그와 함께 알레시아가 현성과 싸우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에 시연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느냐?]
알레시아가 물었다.
그러자 시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뭘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연이 저 멀리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요.”
그대로 시연이 자신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하 가문이고, 은인이고, 은혜고 뭐고 전부 다 머리 아파졌다.
그저 지금은 그냥, 전력을 다해 현성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이거 원. 내가 바람을 넣은 셈이니 말리지도 못하겠군.]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싱긋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녀 오거라.]
그와 함께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발걸음은 어딘가 한결 홀가분해보였다.
* * * * *
한편 최상층의 중앙.
그곳에서는 여전히 수연과 싸우고 있는 현성이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그녀의 검을 튕겨내며 숨을 골랐다.
‘……거 더럽게 안 쓰러지네.’
그러면서 현성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팔은 흘러내린 피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오름을 반격하기 전에 박아 넣은 휴먼 라이트닝.
그 덕분에 지금은 꽤나 데미지가 쌓여있을 터였다.
일정 체력을 깎아야만 나오는 패턴인 용오름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그녀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쯧.”
이에 현성이 작게 혀를 찼다.
다른 건 몰라도 용오름이 나왔으니 2페이즈는 확실히 지났고.
그 후로도 조금씩 데미지를 쌓아왔으니, 이제 곧 마지막 페이즈가 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뒤에 있던 시연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
그런 시연의 등장에 수연이 눈을 좁혔다.
“……지금 뭐하는 거지?”
수연이 시연을 향해 불쾌한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론 그녀 역시 처음에는 시연과의 전투를 기대했으나, 생각보다 시시한 승리 이후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거기다 몸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였다.
그나마 피만 흐르지 않게 지혈한 정도.
그야말로 검 하나도 제대로 못 들 거 같은 모습이었다.
“흥.”
지금 수연의 관심사는 오로지 현성과의 전투.
그게 전부였다.
그만큼 수연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둘만의 전투에 난입한 시연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다시 추하게 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
수연이 시연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잠시 뒤.
시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다면?”
그대로 시연이 옆에 있는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와줘도 되지?”
도와줘도 되냐니.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앞서 말한 마지막 페이즈.
이 마지막 페이즈가 도달했음을 알리는 증거.
그게 바로 시연의 합류였다.
그리고 지금 시연이 여기에 합류했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 페이즈가 시작되었다는 말.
곧바로 현성이 스태프를 고쳐 잡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
이에 저 멀리 서있는 수연이 미간을 구겼다.
그토록 원하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 불청객이 난입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눈치 없이 끼어든 불청객을 치워버리는 수밖에.
“미안하다. 현성. 아무래도 잠시 실례해야겠군. 그래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면서 수연이 검을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 모습에 현성이 스태프를 작게 움켜잡았다.
2페이즈가 진입했음을 알리는 용오름.
그리고 이와 같이 3페이즈가 시작되면 하수연은 또 다른 패턴을 쓴다.
일명 귀곡성(鬼哭聲).
하지만 귀곡성은 2페이즈의 용오름과 명백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귀곡성은 용오름과 달리 절대로 플레이어가 막지 못한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용오름 역시 제정신 박힌 플레이어라면 반격하지 못하는 기술이긴 하지만, 현성이 했던 것처럼 반격 자체는 가능했다.
그러나 귀곡성은 달랐다.
반격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술.
-고오오.
곧바로 수연의 검신을 따라 소용돌이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바람이 새어나오며, 마치 귀신이 우는 것처럼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때였다.
“사라져라.”
수연의 단호한 한 마디.
이어서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콰가가가각!
검신에 모여 있던 소용돌이가 부채꼴 모양으로 찢어져 시연을 향해 쏘아졌다.
아니 시연뿐만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현성 역시도 휘말릴게 분명했다.
앞서 말했듯 귀곡성은 플레이어가 막을 수 없는 공격.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이 공격은 ‘플레이어’가 막는 게 아니니까.’
곧 수연의 소용돌이가 시연과 현성을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현성. 내 뒤로.”
온 몸 곳곳에 가득한 상처.
공격 하나 막기도 힘들어 보이는 시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검을 들었다.
동시에 그런 그녀에게서는 방금 전 수연과 싸울 때와는 사뭇 다른 기시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