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공성전(12)
수연이 저 멀리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동생,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명치에 박힌 부러진 검을 붙잡은 채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 가문의 둘째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를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는 흑발의 소년.
유현성이었다.
이에 수연이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며 검을 쥐었다.
-꾸구국.
동생을 해한 것에 대한 분노?누나로서 기필코 그를 꺾겠다는 복수?
그녀의 검 끝에 그런 감정 따위는 일체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러한 감정을 품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웠으며.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하 가문의 이름 아래 살아오면서, 하 가문의 이름을 달고 태어난 순간부터.
남매간의 의리니, 가족들 간의 정이니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증명과 자격.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검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하 가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수연은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자격만 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이런 가문의 방식이 그리 싫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증명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으며,
자격이 되는 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수연은 하 가문 내에서 독보적으로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두 손에 검을 쥐고 있는 한.
그녀의 다리를 잡을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수연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그녀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그건 다름 아닌 불감증이었다.
더 이상 가문 내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더 이상 가문 내의 그 누구도 전력을 다해 상대하려 들지 않았으며.
더 이상 가문 내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검사는 없었다.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검을 잡아도 항상 어딘가 모자랐다.
그리고 그런 모자람은 점차 자극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갔으며, 그 끝에 가서는 지금처럼 강자와의 싸움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검을 쥐고 있는 이유를, 자신이 여기 존재함을 나타내는 증명을.
이를 알려주고 보여주는 증거는 오직 강자와의 싸움에서 오는 자극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강자와 겨루는 쾌감은 그만큼 강렬했으나, 동시에 그만큼 짧았다.
마치 거세게 불타오르고 사라지는 불꽃과도 같은 느낌.
타오를 때는 무엇보다 뜨거웠으나, 식은 후에는 무엇보다 차가웠다.
결국에는 그때의 자극을, 그때의 쾌락만을 쫓는 불나방과 같은 꼴.
그게 수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연은 지금 이 순간.
살아숨쉼을 느끼고 있었다.
시연과의 전투는 생각보다 훨씬 시시했다.
허나 눈앞의 소년은 다를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진우였다.
박살난 오른팔과 무릎, 으스러진 턱뼈, 명치에 박힌 부러진 검날.
상대를 향해 가차 없이 진심을 쏟아낸 결과였다.
‘그야말로 날 것의 전투 그 자체.’
그 사실이 지금 수연을 너무나도 설레게 하였다.
하 가문에서 진검으로 하는 대련이라 해봤자, 그 누구도 죽을 각오도, 죽일 각오도 없었다.
언제부터 진검싸움이 이렇게 가벼워졌는가.
‘그래, 검에 무게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녀석들은 검을 들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현성과의 전투에서 그간의 열망을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르르.
수연의 몸이 작게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이 멎은 순간.
그녀의 검이 현성을 향해 쇄도했다.
-퓻!
섬광 같은 찌르기.
방금 전 진우가 펼쳤던 것과 같은 검, 월영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풍경은 그와는 차원이 달랐다.
-콰가가각!!
현성이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기 무섭게, 쏘아진 검격이 그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바닥이 갈리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치 선천강에서 데일런트의 창을 보는 듯했다.
-부웅!
곧바로 공격을 피한 현성이 망치를 휘둘렀다.
이에 수연이 히죽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천류로 흘러내릴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있는 힘껏 아래에서 위로 검을 내려 그으며 낙천을 펼쳤다.
-쩌엉…!
그와 함께 수연의 검과 현성의 망치가 격돌하더니.
그 충격에 주변의 바닥이 움푹 주저앉았다.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육중한 무게.
“그래. 바로 이것이다!”
수연이 발을 내딛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센 푸른 검기가 반짝이며 현성을 집어삼켰다.
이에 현성이 검은 화염을 일으키고는 망치를 내리찍었다.
-콰아앙…화르륵!
그대로 검은 화염의 장벽과 검기가 부딪히며 사방으로 푸른 입자와 검은 불씨가 흩날렸다.
둘의 위력은 거의 호각.
그렇다면 둘 중 어느 누가 먼저 지치는지의 싸움이었다.
-채앵…끼기긱…!
맞댄 검과 망치 사이.
수연이 뜨거운 숨결을 몰아쉬며 현성에게 속삭였다.
“방금 전의 화염은 뭐지? 게다가 진우와 싸울 때는 얼음까지 쓰던 거 같았는데?”
“……”
“더…좀 더 보여주거라…!”
수연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쿵! 발을 내려찍었다.
하여간 이 수연이나 저 수연이나 집착하는 건 똑같았다.
“원한다면.”
동시에 현성의 발끝을 타고 푸른 얼음조각이 바닥을 뒤덮었다.
-쩌저적!
“……!?”
현성의 얼음에 발이 묶인 수연이 움찔거렸다.
이에 현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복부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그대로 폭발하는 검은 화염.
-콰아아앙!
이어서 자욱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서서히 연기가 걷히고 저 멀리 밀려낸 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흥미롭기 그지없구나.”
그렇게 말하는 수연은 폭발 직전.
검을 들어 몸을 막아낸 듯 했다.
그러나 그 충격만은 고스란히 전해진 건지 그녀의 팔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직계파의 성 최상층.
그곳에는 어느새 검게 그을린 벽과 검격에 갈라진 바닥으로 가득했다.
-콰앙! 채앵…끼기긱! 콰가가각!
그리고 그 진원지에는 현성과 수연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머지않아 수연이 검을 털어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현성,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상대였다.
‘……기본적인 위력은 물론이고,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감각도 탁월하군.’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전투센스였다.
가까이 붙으면 얼음으로 발을 묶고, 떨어져서 공격하면 화염으로 반격한다.
거기다 주 무기는 망치.
‘얼음과 화염, 두 가지 속성을 쓰면서 망치를 휘두르는 상대라……’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조합이었다.
덕분에 어떤 식으로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곤혹스러웠지만, 전투가 계속됨에 따라, 수연은 점차 그 패턴에 적응하고 있었다.
-철컥.
그대로 수연이 뒤로 물러나며 발도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가 검집에서 검을 뽑은 순간.
수연의 몸이 현성을 향해 매섭게 쏘아졌다.
“자, 이번에도 받아 보거라. 현성!”
-파앗!
그와 함께 그녀가 검을 내리그었다.
시작은 낙천, 이어서 수연이 검을 내지르며 순서대로 월영과 천류를 펼쳤다.
그 상태로 속도가 붙은 그녀의 검은 도저히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콱! 콰가각! 채앵…끼기긱!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격.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 검격,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연의 필살기 오의 : 검무였다.
그대로 현성이 얼음과 화염을 두르며 수연의 검을 막아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점점 뒷걸음질 치는 현성의 발.
그 모습에 수연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주 무기는 망치.
그리고 제 아무리 망치를 잘 다룬다 해도 무기에는 기본적인 상성이 있는 법이었다.
상대적으로 망치는 위력에서 우위를.
그에 반해 검은 속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다 그 검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쾌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에 현성이 계속해서 뒤로 밀리고.
마침내 그의 뒤가 벽에 막힌 순간.
“걸렸구나!”
수연이 눈을 번뜩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녀의 검은 현성의 망치보다 한 박자 더 빨랐다.
허나 그때였다.
“글쎄요.”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의 몸 주변을 타고 흐르는 푸른 빛.
그건 분명 스파크였다.
“……전기?”
그러기 무섭게 돌연 공중을 타고 어마어마한 전격이 내리쳤다.
-콰르르릉!
그리고 잠시 뒤.
수연의 눈앞에는 번개를 두른 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발을 내딛었다.
-스팟!
그와 함께 현성의 모습이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연의 동체시력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속도였다.
곧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뒤.
그런 그의 주먹에는 어느새 은빛 건틀렛을 타고 시퍼런 번개가 응축되어있었다.
이어서 현성이 주먹을 내지르며 중얼거렸다.
“조금 짜릿할 겁니다.”
“……?!”
그렇게 최상층을 타고 푸른 전기가 쏘아졌다.
쏘아지는 섬광 사이.
우레 같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수연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전투가 시작된 이레 확실하게 들어간 유효타격.
이에 수연이 휘청거리며 검을 지팡이삼아 일어섰다.
-두근두근.
온 몸을 타고 찌릿찌릿한 격통이 뇌를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도 수연은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짜릿한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손 끝, 머리칼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이 느낌.
간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대로 수연이 현성을 향해 광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현성, 넌 최고다!”
그러고는 수연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번개에 직격하고도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고통을 이겨낼 만큼 지금 현성을 상대하며 느끼는 쾌락이 더 클 뿐.
“그럼 나 역시 뭔가 보여줘야겠지?”
그런 수연의 말에 현성이 올게 왔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에 말했듯이 <이스페리아>에는 특정상황에 따라 출력되는 특수대사가 있었다.
시연의 ‘모든 걸 쏟아 붇겠다.’ 라는 대사가 그랬고.
레이첼의 ‘대미를 장식할 때군.’ 가 그 예시였다.
‘……그리고 방금 전 수연의 대사.’
바로 그것이 수연의 필살기를 의미하는 대사였다.
곧 그녀가 검을 고쳐 잡았다.
머지않아 수연의 검 끝을 따라 모여드는 심상치 않은 기류.
-스으으.
지금껏 하 가문의 검식이 모두 그랬듯.
그 시초는 태초의 자연에서 이름을 따왔다.
폭포를 베는 제 1식 폭참(瀑斬).
하늘을 떨어트리는 제 2식 낙천(落天).
달의 그림자를 쫓는 제 3식 월영(月影).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제 4식 천류(川流).
그에 따라 수연의 필살기 역시 태초의 환경에서 비롯된 검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동시에 수연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일순간 주변의 공기가 멎었다.
그대로 잠시 뒤.
-쿠오오오오!!
마치 용이 울부짖듯 커다란 굉음을 따라 매서운 소용돌이가 현성을 향해 몰아쳤다.
이것이 바로 수연의 필살기이자, 시연의 백익과 같은 오리지널 기술.
용오름.
먼 과거, 바다 한 가운데 몰아치는 폭풍이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모습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그렇게 생성된 소용돌이는 눈앞을 가로막는 것을 전부 집어삼키며 몸집을 키워갔다.
그야말로 자연재해 그 자체.
그 앞에서 현성이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부여잡았다.
하수연의 필살기 용오름.
그 생김새는 튜토리얼의 보스, 데일런트의 궁극기 폭풍의 창과 굉장히 유사했다.
동시에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말했듯이, <이스페리아> 2회차에서 기사단 에피소드를 진행하며 밝혀지는 사실.
‘폭풍의 창’은 반격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반격기를 배우기 위해 수련을 하면서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조력자가 바로 눈앞의 하수연.
그녀의 궁극기가 데일런트의 폭풍의 창과 유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스페리아>를 2회차 이상 플레이하면서,
타이밍이 어렵기로 유명한 반격기를 습득한 것도 모자라.
맨 처음 튜토리얼부터 데일런트를 쓰러트린 플레이어가 하수연의 궁극기를 마주한다면?
그 결과는 간단했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현성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특수 조건 달성]
[조건 달성에 따라 특수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업적 <폭풍의 창을 받아낸>이 발동합니다. 그에 따라 용오름을 반격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현성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특수 조건 달성 시 발생하는 업적의 숨겨진 효과.
이게 바로 처음부터 그가 개같이 굴러오며 악착같이 업적을 긁어모아온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업적의 숨겨진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까다로운 조건이 따랐지만.
그만큼 효과가 발동했을 때의 위력은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반격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이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Y를 눌렀다.
그리고 그가 스태프를 블레이드 형태로 변환하여 든 찰나.
처음 튜토리얼 당시, 폭풍의 창을 반격할 때의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구태여 그때처럼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타이밍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방금 전의 메시지 창으로 반격기라는 스킬을 발동한 상태니까.
그리고 폭풍이 그의 몸을 집어삼키기 직전.
순간 그의 검 끝이 흔들리더니, 현성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사아악.
일검(一劍).
마치 장인이 한 획을 긋듯이, 그의 검로(劍路)는 유려했으며 동시에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0.1초의 기적.
그때의 검로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었다.
“내가 이 맛에 이 게임을 못 끊지.”
직계파의 성 최상층.
반으로 갈라지는 용오름 사이.
현성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