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공성전(11)
그대로 현성이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그의 발끝을 타고 검은 불씨가 흩날렸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진우가 재빨리 검을 빼들었다.
이어서 그가 현성을 향해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서 그가 탁자 위에 띄워진 화면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성이 있던 아래층.
그리고 현성이 최상층에 있는 지금.
이제 곧 아래층에 있던 본대가 전부 이곳으로 올라올 터.
그렇게 된다면 현성을 물론이며, 시연과 연서까지 꼼짝없이 포위되는 모양새였다.
즉 그가 무턱대고 올라왔을 때부터 방계파의 패배는 확정이었으며, 결과는 바뀌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같잖은 객기는 그만부리고 순순히 가문의 증표가 어디 있는지 부는 게 좋을……”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돌연 진우의 귓가를 타고 저 멀리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퍼어엉! 쾅!
쉬지 않고 연달아 들려오는 폭발음.
그리고 머지않아.
진우는 폭발의 근원지가 성 밖, 좀 더 정확히는 성벽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를 증명하듯 방금 전 현성의 등장으로 무너진 천장,
그 너머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치솟았다.
게다가 한 곳이 아니었다.
직계파의 성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솟아오른 검은 연기.
그와 함께 땅을 울리는 진동과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방계파의 병력들.
[진격하라!!]
그대로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방계파의 병력이라면 분명 성까지 몰아냈지 않는가.
아니 그럼 애초에 방금 전 폭발은 어떻게 된 거지?
그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런 진우의 모습에 알레시아의 날개 아래 있던 연서가 피식 웃었다.
처음 현성과 시연, 연서가 직계파의 성에 침입하기 직전.
그 전에 미리 심어둔 함정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함정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본대의 병력에 포위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연서가 아래층에 있는 본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직계파의 본대는 갑작스레 일어난 폭발과 방계파 병력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성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길! 전 병력, 당장 아래로 가서 방어진을 펼쳐라!!”
탁자 위에 띄워진 화면을 타고 본대를 이끄는 총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삐져나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당할게 분명하니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이에 진우가 검을 꽉 움켜쥐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전부 예측했다고?’
허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아무리 현성이라고 한들, 이 모든 걸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한발먼저 대비할 수는 있었다.
공성전에서 벌어질 여러 경우의 수.
현성은 그 만일의 상황을 전부 대비해 그에 맞는 전략을 준비해둔 것뿐이었다.
방금 전의 폭발 역시도 그 중 하나.
현성은 혹시나 최상층에서의 결전이 끝나기 전에 본대의 병력이 합류할 경우를 대비하여,
성에 들어오기 전 곳곳에 미리 폭탄을 설치한 뒤.
방계파의 병력에게 타이밍을 봐서 설치된 폭탄을 터트리고 공격을 감행하라며 언질을 해두었다.
그럼 본대의 병력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막기 위해 최상층으로 오는 대신, 방어를 택할 것이고.
현성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시간을 더 벌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대로 현성이 인벤토리에서 하얀 스태프를 꺼내들었다.
그와 함께 철컥. 스태프 양 끝이 십자로 펼쳐지며 망치의 형태를 갖추었다.
아래층에서 본대를 상대할 때 썼던 무기였다.
그대로 현성이 진우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방금 전 가문의 증표가 어디 있냐고 물었지?”
그러면서 그가 품속에서 금색 펜던트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중앙에 그려진 하 가문의 문양이 뚜렷하게 빛났다.
가문의 증표였다.
곧바로 진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역시나 증표를 가지고 있는 건 현서이었다.
이어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줄게. 가져가.”
“……뭐?”
그 말에 진우가 멈칫거렸다.
하지만 무슨 속셈인지 알아차리기도 전.
현성이 진우를 향해 가문의 증표를 던졌다.
-휘익.
공중에 뜬 가문의 증표.
이에 진우가 자신도 모르게 배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쉬익!
현성이 인형(人形)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진우의 바로 옆.
그의 귓가를 타고 나지막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가져갈 수 있으면.”
그대로 허공에 반짝이는 펜던트 아래.
진우가 본 것은 망치 끝을 타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검은 화염이었다.
“……!”
어느새 몸 안으로 파고든 현성.
이에 진우가 재빨리 검을 들고 천류를 펼쳤다.
그렇게 그의 검신과 현성의 망치가 맞부딪쳤다.
-채앵…쾅! 콰광! 쿠웅!
곧 그 소리를 시작으로 둘이 공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런 현성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의 공격은 정반대였다.
한 번 막아날 때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검은 불씨.
거기다 검 끝에 느껴지는 무게는 또 어떠한가.
덕분에 검을 쥐고 있는 손아귀를 타고 저릿함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한참동안 막는데 급급하던 진우가 어금니를 악물고 눈알을 굴렸다.
-으드득!
이대로 간다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니 우선 거리를 벌리는 게 우선.
이에 진우가 힘겹게 현성의 공격을 빗겨내며 즉시 낙천을 펼쳤다.
‘좋아, 됐다. 그럼 천천히 거리를 벌리면서…!’
그와 함께 푸른 검기가 현성을 갈랐다.
아니 가르려는 찰나였다.
현성이 냅다 검기를 향해 망치를 후려쳤다.
-콰앙…푸스스!
동시에 푸른 검기가 그의 망치에 닿기 무섭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지금 단순한 완력으로 낙천을 소멸시켰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물론 검기를 소멸시킨 것은 완력이 아닌, 검은 불꽃.
즉 크루페돈의 불꽃과 결합한 현성의 마법이었지만, 진우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자신의 공격이 날아갔다는 사실.
그 사실에 진우가 재빨리 검을 그으며 폭참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달아 폭참을 펼치는 그의 검.
그에 따라 푸른 검기 수십 개가 현성을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진우의 특기 다연폭참이었다.
이에 현성이 양 손으로 망치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는 건가?”
그대로 현성이 방금 전 진우가 했던 것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망치를 그었다.
아니 휘둘렀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동시에 망치머리를 따라 검은 불꽃이 유려한 선을 그리더니.
-퍼어어엉…콰가가각!!
주변의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불꽃이 폭발했다.
그렇게 자욱하게 솟아오른 연기 속.
진우가 본 모습은 자신이 날린 수십의 검기가 불꽃에 잡아먹혀 힘없이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푸스스….
그 끝에 남은 건 오직 흩어지는 푸른 검기의 잔재 뿐.
그 모습에 진우가 급한 숨을 들이마시며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흐읍!”
그럴 때마다 공중에 푸른 선이 그려지며 검기가 쏘아졌지만.
-퍼억! 콰가각! 콰앙!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검기를 망치로 쳐내며 걸어오는 현성.
그런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이익…!”
진우가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검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초조함, 다급함, 그 사이 섞인 두려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초래한 결과는 보는 바와 같았다.
-우드득…!
“끄아아아악!”
검을 쥐고 있던 진우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꺾였다.
막무가내로 망치를 막으려 한 탓에 결국 그의 어깨가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현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망치로 그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콰드드득!
“크허어억!”
동시에 무릎이 내려앉으며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깨에 이어 무릎 뼈가 뒤틀리는 고통.
“끄으윽, 커허억……”
이에 진우가 팔을 움켜쥐며 침을 질질 흘렸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 따라 축 쳐져 덜렁이는 팔.
뼈가 내려앉은 무릎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저벅, 저벅.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그를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 현성의 모습에 진우가 움찔거렸다.
-오싹.
등덜미를 타고 싸한 소름이 스쳐지나갔다.
공포였다.
곧바로 진우가 검을 바꿔 잡고 휘둘렀다.
-부웅! 부웅!
“오, 오지 마! 저리 꺼지란 말이야!!”
그러나 이미 자세는 무너진 지 오래.
아니 애초에 박살난 오른팔과 내려앉은 무릎으로는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포에 잠식된 검이 올바른 검로를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탓에 진우의 검은 애꿎은 허공에 부지깽이를 휘적거리는 모양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진우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
그래, 수연!
그에게는 아직 하 가문 제일의 검 수연이 남아있었다.
곧바로 진우가 수연을 향해 소리쳤다.
“누님! 지금입니다! 당장 저놈을……”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이 그의 턱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그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진우의 고개가 반대로 꺾였다.
“커흙, 켁…끄르륵…..!”
뇌리를 때리는 끔찍한 고통에 진우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짐승 같은 웅얼거림 뿐.
부서진 턱 아래로 검은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으어어억…느, 느니…스은…..!”
누님! 수연!
진우가 수연을 부르짖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건.
“……쯧.”
일말의 감정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혀를 차는 수연이었다.
그녀의 척도는 어디까지나 강함.
약자는 수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단하구나.”
그대로 수연이 현성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싱긋 웃었다.
그런 그녀의 웃음에는 방금 전의 무표정과는 달리, 기대감과 흥분으로 가득 젖어있었다.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현성에게 가있었다.
“느…느니……?”
그 모습에 진우가 멍하니 웅얼거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상황을 파악한 진우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저 싸움에만 미친 멍청한 년이 기어코 일을 망치는구나!
그와 함께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천한 고아 년이 자신을 깔보며 도발하지 않나.
웬 출신도 모를 몰락가문의 버러지에게 당하지 않나.
-처억.
고개를 숙인 진우의 눈에 현성의 발이 들어왔다.
검은 불씨가 남아있는 그의 발끝.
녀석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끔찍한 굴욕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올랐다.
-스으으.
나는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장차 검술명가 하 가문을 이끌어갈 몸이다.
나는 저런 더러운 피가 흐르는 잡종들과는 격이 다르다.
당장에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그가 덥썩 자신의 턱을 잡고는.
터걱! 억지로 반쯤 으스러진 턱뼈를 맞추었다.
“날…다…지마……”
진우가 고개를 숙인 채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우가 아직 멀쩡한 왼팔로 검을 부여잡았다.
-터업.
동시에 그가 핏발 선 두 눈으로 현성을 바라보며 외쳤다.
“날 내려다보지 말란 말이야!!”
분노에 찬 진우가 그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쉬익!
정확히 현성의 목을 노린 찌르기, 월영이었다.
이번만큼은 방금 전처럼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검 끝에 공포가 담겨있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월영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 끝이 현성의 목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챙강!
현성이 손을 휘두르며 검을 튕겨냈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손끝에 서려있는 하얀 서리.
이에 진우의 검이 두 동강나며, 현성의 손에 튕겨나간 검 날이 그의 명치에 단단히 박혔다.
-콰직.
진우가 자신의 명치에 박힌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현성을 꿰뚫기 위해 내지른 검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숨통을 꿰뚫고 있었다.
부러진 검. 이것은 그의 검이었으며, 동시에 지금 진우의 모습 그 자체였다.
“끄어어억…쿨럭!”
진우가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명치에 박힌 검을 뽑아내려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그의 명치에 박힌 검날을 지그시 눌렀다.
-꾸구국.
그대로 현성이 진우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빼면 죽는다.”
나지막이 내뱉은 그의 한 마디.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눈은 아직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켁…크흑……”
진우는 그런 현성의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박살난 오른팔과 무릎, 으스러진 턱뼈, 명치에 박힌 부러진 검날.
처참하기 그지없는 패배였다.
-스윽.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에 줄곧 소파에 앉아있던 수연이 일어났다.
“이제 내 차례인가?”
-스르릉.
그대로 수연이 검을 뽑고, 그를 향해 팔을 벌리며 싱긋 웃었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서는 도저히 주체하지 못할 흥분이 느껴졌다.
“자, 현성, 어서 날 만족시켜 주거라.”
그리고 어느새 현성의 눈앞에는 하나의 퀘스트 창이 떠올라 있었다.
[하 가문의 승계 : 하수연에게 승리하라.]
퀘스트 내용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쓰러트리시오. (진행 중)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