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공성전(9)
처음에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수연이 허리춤에서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우선은 거슬리는 것부터 치우고 시작하지.”
그게 연서가 기억하는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와 함께 순간 눈앞이 암전된 것처럼 어두워지더니.
곧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촤악!
그대로 머지않아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뒤늦게 고통이 따라왔다.
이에 연서가 비틀거리며 뒤로 주춤거렸다.
“……쿨럭!”
그런 그녀의 입을 따라 검은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아, 그래. 분명 제 1식 폭참(瀑斬)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덜컥.
그 사이 한쪽 무릎이 꺾이며 연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시야의 높낮이가 단숨에 바뀌었다.
이에 옆에 있던 시연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연서야!”
그러나 그도 잠시.
연서가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쓰러지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연서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어코 자신의 검을 지팡이삼아 필사적으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수연이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 그래도 한 번에 쓰러지지는 않는군.”
그러면서 그녀가 검을 휙 휘둘렀다.
마치 귀찮은 날벌레를 잡아버리듯.
아래에서 위로 이어진 검격.
-피잇!
그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스치는 듯싶더니.
연서가 짚고 있던 검이 두 동강나며 그녀의 몸이 무너졌다.
-털썩.
그대로 연서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 사이.
시연이 그녀를 향해 뭐라고 말하는 듯 했다.
허나 연서는 그저 시연이 자신을 향해 뻐끔거리는 입모양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연서가 현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왜 수연이 줄곧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그러면서 연서가 눈앞의 시연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언니, 미안.”
기왕이면 자신도 언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래, 현성처럼 말이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연서의 눈앞이 뚝. 끊어졌다.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연서.
시연이 연서를 안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서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걱정하지마라. 죽이지는 않았으니.”
수연이 그런 시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아무튼 이걸로 방해물은 치웠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꾸나.”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말에는 기대감이 잔뜩 섞여있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지켜보기만 할 뿐.
당장에라도 튀어나가고 싶은 걸 참느라 꽤나 애먹었다.
“그럼 어서 검을 들거라.”
수연이 시연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에 진우가 작게 혀를 차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여간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게 처음부터 같이 몰아붙이자고 했건만…….’
그는 시연과 연서가 최상층에 올라오기 전부터.
수연에게 같이 나서 한 번에 정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런 진우의 조언에 수연은 그랬다가는 지금껏 기다린 보람이 없다느니.
기다린 만큼 최대한 즐기고 싶다느니.
진우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녀만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결국 진우는 편할 대로 하라며 그녀를 내버려뒀다.
‘뭐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말이지.’
진우가 저 멀리 바닥에 쓰러진 연서를 흘깃 바라보았다.
단 일격. 그것만으로 연서를 전투불능상태로 만들었다.
아무리 연서가 어리다고 한들.
그녀는 진우와 큰 실력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격에 연서를 정리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진우 그 역시 일격에 정리당할 수 있다는 말.
“……하여간 괴물이 따로 없군.”
진우가 수연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시연이 강하다고해도 수연에게만큼은 안 된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며 히죽 웃었다.
-처억.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연서를 안은 채 가만히 있던 시연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대로 그녀가 수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검. 들어.”
평소와 같이 차갑게 내려앉는 목소리.
허나 오늘만큼은 어딘가 달랐다.
그 안에 담긴 분노.
-촤르륵.
동시에 그녀의 뒤로 수십 개의 검이 펼쳐졌다.
마치 날개를 연상케 하는 모습.
그 모습에 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수십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시연만의 특이한 전투방식.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이걸 꺼냈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드디어 제대로 할 생각이 들었나보군.”
수연이 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면서 수연이 작은 도발을 던졌다.
“연서도 나름 쓸 만한 구석이 있군.”
그 말에 시연의 검 끝이 움찔거렸다.
“……그 입 닫아.”
그와 함께 시연의 인형(人形)이 순간 흩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수연을 향해 쏘아졌다.
-퓻!
직계파의 성 최상층.
그렇게 시연과 수연.
둘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 *
-콰아앙! 끼기긱…채앵! 콰앙!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둘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공기가 갈리며 주변으로 그 충격파가 삐져나왔다.
이에 주변의 바닥이 작게 떨려오고 있었다.
“과연 제법이군…!”
수연이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벌써 수십 합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이 깨질 것 같으면 그때마다 다른 검을 뽑아 대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쉬이이익…서걱!
섬광과도 같은 쾌검.
제 1식 폭참이 수연의 머리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에 수연이 검을 들어 4식 천류를 펼치며 그녀의 공격을 흘러내렸다.
-철컥.
그와 동시에 시연이 양 손을 뻗어, 각자 검을 쥐고는.
연달아 휘두르며 수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검사는 당연하게도 하나의 검을 기본으로 사용한다.
허나 시연은 조금 달랐다.
수십 개의 검을 다루는 만큼, 그녀의 검술 역시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때로는 하나의 검으로 발도술을, 때로는 두 개의 검을 다루는 쌍검술을.
-챙! 채쟁! 콰과가가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연의 검은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완벽한 균형.
시연은 수십 개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전부 알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재능이 따로 없군!’
검술명가라고 불리는 하 가문을 모두 통틀어도 이런 재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수연이 히죽 웃으며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지금껏 수많은 검사들을 상대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새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수십의 검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느낌.
“그래, 좀 더…조금 더 보여다오…!”
수연이 흥분에 차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그대로 시연의 검이 번쩍이며 검집에서 뽑아져 나왔다.
이어서 시연의 양옆에 있던 검의 날개가 촤악 펼쳐지더니.
날갯짓 한 번에 수십 개의 검이 단번에 수연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
과거 불의 둥지에서 크루페돈을 상대할 때 선보였던 검이자,
수십 개의 검을 동시에 다루는 시연만이 쓸 수 있는 그녀의 오리지널 기술.
백익(白翼)이었다.
“……!?”
이에 수연이 주춤거리며 검을 들었다.
허나 그녀조차도 이번만큼은 전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쏘아진 날갯짓은 하나하나 날카로운 검으로 변해 수연을 향해 쏘아졌다.
-핏! 피잇! 피비빗! 피잇!
결국 검을 하나 둘씩 놓치고.
수연이 점차 그녀의 공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수연의 몸을 타고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생기고 있었다.
-처억.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줄곧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을 지키던 시연이 입을 떼었다.
“끝까지 몰아붙인다. 모든 걸 쏟아 부어서라도.”
그 말에 수연이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 온다!
그리고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모든 걸 쏟아 붓겠다는 시연의 말.
이는 <이스페리아>의 특수한 시스템.
필살기를 사용할 때 입력되는 대사였다.
-스으으.
그대로 시연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발도자세를 취했다.
이미 백익으로 날렸던 검들은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시연이 재빠르게 공격을 날렸다.
-퓻!
그 신호를 시작으로, 시연이 차례차례 하 가문의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폭포를 가르는 베기, 제 1식 폭참(瀑斬).
하늘마저 떨어트리는 검, 제 2식 낙천(落天).
달의 그림자를 꿰뚫는 일격, 제 3식 월영(月影).
물이 흐르듯 검을 흘려내는 제 4식 천류(川流).
시연이 4개의 식을 쉴 새 없이 펼쳤다.
-쉬이익! 채채쟁! 챙…끼기긱! 쉬익!
마치 춤을 추듯 발을 놀리며 검을 휘두르는 시연의 모습.
이게 바로 그녀의 오의 : 검무(劍舞)였다.
그렇게 시연이 수연을 벽 끝까지 몰아붙인 때였다.
-덜컥!
“……뭣?!”
순간 시연이 공격을 멈췄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공격이 막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덥썩.
수연이 시연의 손목을 꽉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오의, 검무는 기본적으로 수십 개의 검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초식을 펼치는 기술.
그런데 여기서 다른 검을 뽑는 행동자체를 저지해버린다면?
-끼기긱…!
검무는 그대로 멈추게 된다.
이것이 유일한 검무의 파훼법.
그리고 수연은 본능적으로 그 파훼법을 알아차렸다.
“보여줄 건 전부 다 보여줬나?”
수연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시연의 검무는 멈춘 상태.
이에 수연이 그녀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그러자 시연이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큿!”
그러나 이후에 펼쳐진 수연의 공격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공격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동시에 수연이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제 1식 폭참이었다.
그 다음에는 위에서 아래로 향한 검로.
제 2식 낙천이다.
이어서 찌르기 월영까지.
그리고 수연은 방금 전 시연이 했던 것처럼.
-콰아앙! 채앵! 끼기긱…피잇! 쉬익!
1식부터 4식을 쉬지 않고 펼치며 시연을 공격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의 오의, 검무와도 같았다.
이에 시연이 당황한 듯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수연은 단 한 번.
그녀의 오의를 본 것만으로 시연의 기술을 파훼한건 물론이며.
보란 듯이 완벽하게 재현했다.
시연이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수연 역시도 재능을 타고났다.
그 재능으로만 두고 보면 시연과 비슷한 수준.
-채앵!
이에 결국 시연이 쥐고 있던 검이 저 멀리 날아가고.
그녀가 다시 검을 집으려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처억.
수연이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대로 수연이 실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게 끝인가?”
그 말에 시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
그 모습에 수연이 작게 혀를 찼다.
“쯧.”
그런 수연에게서는 조금 전의 희열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한 쾌락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허망함.
이에 수연이 미간을 구기며 검을 거두었다.
“흥이 식었다.”
그와 함께 수연이 등을 돌리며 소파에 앉아있는 진우를 향해 말했다.
“진우. 알아서 하거라.”
그런 수연의 말에 진우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이제 가문의 증표를 넘겨받기만 하면 끝.
“자, 그래서……”
시연의 바로 앞.
진우가 그녀의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가문의 증표는 어디 있지?”
“…….”
그렇게 묻는 진우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어.”
“……뭐?”
“나한테 없다고.”
단호한 시연의 대답.
그 말에 진우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연은 수연에게 졌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계파가 직계파에게 진거 아직 아니었다.
공성전의 승리조건은 어디까지나 가문의 증표를 빼앗는 것.
이에 시연은 처음부터 가문의 증표를 가지고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공선전에서 이런 방식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하 가문은 유구한 전통을 가진 검술명가.
이런 교활한 방식은 쓰지 않는 게 당연했다.
허나 이번 공성전에는 조금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명문가의 프라이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승리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자.
그건 바로.
“유현성……!”
진우가 그 이름을 되새겼다.
그 망할 새끼밖에 없었다.
그대로 그가 이를 빠드득 갈며 시연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럼 증표는 누구한테 있는데!!”
현성의 말했던 대로였다.
만약 자신이 증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진우는 무조건 방금처럼 말할 거라고 했다.
그럼 그때, 현성은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부탁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어.”
시연이 뻔뻔하게 말했다.
평소 그녀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리가 없는 말.
이에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이 년이 뭐라고……”
“아니면 공손하게 존댓말이라도 써봐. 그럼 혹시 모르잖아.”
그대로 시연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바뀌어서 말해줄지도.”
그런 시연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현성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